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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성투뿔++순한우

by 한아

24년의 마지막 주말 오후.

간다고 해서 아쉬울 것도 전혀 없고 오히려 제발 어서 끝나주길 바랬던 24년 한해였지만, 어떻든 한해가 끝나가니 마음이 싱숭생숭했는지 바깥 양반이 예정에도 없던 가족 여행을 급조하고,'여기 어때'에서 골라준 '요기'로 세식구의 갑작스런 공간 이동. 그리하여 여기는...서울에서 한시간 남짓 걸리는 강원도 횡성 어느 골짜기의 황토 펜션입니다.


냉장고에 있는 생수병, 굴러다니는 사과, 귤, 파프리카 등 과일, 야채조각, 언제 뜯었는지 기억도 안나는 쌈장과, 반쯤 먹다 남은 우유팩 통채로, 오래되어 굳어버린 떡국 몇조각에 비닐에 꽝꽝 얼려놓은 밥봉지, 아침으론 썰지도 않은 식빵 봉지 등등을 대강 박스에 쑤셔넣고 계획이라곤 일도 없이 그냥 온... 우리의 유일한 계획은

'횡성은 한우가 유명하니 다른건 다 됐고, 마트에 들러 한우만 좀 사도록 하자!!'


횡성 시내 초입에 위치한 식자재 마트는 주말 저녁인데도 횡~하니 한산하기 짝이 없고 우리말보다는 베트남인지, 태국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떠들석한 외국인들만 몇명 보이더군요. 한끼 먹고 낼 아침 일찍 갈거니 딱 고기만 사고 다른 건 사지마! 초장에 선포를 했습니다.


뭣도 모르고 횡성은 한우지.. 한우 코너로 성큼성큼... 한우투뿔++꽃등심과 장초딩의 최애 부위 부채살을 살펴보며 몇번이나 눈을 비비며 의심을... 노안이 와서 잘못 보고 있는 건가, 안경을 벗고 자세히 들여다봐도 그 가격이 맞나봅니다. 커어억!!!! 뭣이라고??? 꽃등심 요만큼이 7만원? 그것도 50% 세일... 그럼 세일 전엔 14만원?? 백설공주의 일곱 난쟁이 부채 사이즈만도 못한 부채살 요..코딱지만큼이 5만원???? 그것도 40% 세일해서?? 이게 그러니까 원래 10만원어치였다고? 아니.. 아무리 한우래도 그렇지 여기는 고기값이 좀 싸다는 산지가 아닌가요? 한우 얘네들은 황금을 먹여 키우나...

고기를 그닥 즐겨먹는 편도 아니고. 게다가 최근 몇년간은 한가로이 고기 파티를 할 정신도 의욕도 없어서 내 돈주고 고기를 사본 기억이 가물가물한 불량주부이긴 해도, 이런... 한우 가격을 몰라도 너무 몰랐던 거죠.


옆 코너에 미국산 소들을 보니 가격이 한우의 5분의 1정도로 저렴해서 고민을 했습니다.' 어차피 고기맛에 예민한 미식가들도 아닌데 그냥 기분만 내고 아메리칸 소로 먹지 뭐... 아냐. 그래도 4년만에 세식구가 일박 여행을 왔는데 횡성까지 와서 U.S.A cow를 먹긴 좀 그렇지 않아??' 무한 내적 갈등을 하다가 다시 한우 코너로....꽃등심은 미련 내려놓고, 엄마 맘에 그래도 장초딩이 제일 좋아하는 부채살이라도 쬐금 먹일까 싶어 들었다 놨다 하고 있는데, 스윽 다가온 녀석이 '와... 비싸도 진짜 너무 비싸다...'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나 봅니다. 제가 들고 있던 한우 부채살과 미국산을 보더니 지가 봐도 가격이 너무 차이가 난다 싶었던 게죠.


"엄마, 얘들은 미국에서 왔어도 순한우니까 마찬가지야."

"으으응??" (이건 또 뭔소리냐...)"

"횡성투뿔++순한우는 아니지만, '순한/ 우'...였을껄?"

"아... 엄마 말 잘듣는 착한 소들이었겠구나."

"숙제도 잘하고, 게임도 안하는 순한 소들이었던게지."

"그래 어려서부터 모짜르트 음악을 들려주고 키웠을지도 몰라. 육질좋고 순하게 자라라고 그치?그지? 그럼... 우리 그냥 '순한우' 말고 '순한 우' 먹을까??"

"응. 그래. 그러자."


그렇게 우리 가족은, 고맙게도 순~한 장초딩의 손을 잡고, '횡성투뿔++순한우' 대신 미국의 어딘지 모를 초원에서 엄마 말씀 잘 듣고 자란 '순한 소'고기 약간과, 승질은 어떨지 모르겠으나 가격만큼은 참 착하고 순한 한국 돼지(한돈) 조금을 사들고 마트를 나섰습니다. 그리곤 환기라고는 1도 안되는 초가삼간같이 생긴 황토방 펜션에서 연기를 풀풀내며 그 착한 미국소와 성질이 어떤지는 모를 한국 돼지를 맛있게 구워 먹었네요.


엄마가 너무 오래 정신줄 놓고 헤메느라, 한우 가격도 이렇게 모르고, 너와의 추억이 될 여행 한번 못하고 시간이 이렇게 훌쩍 지나버렸다는 것도 몰랐어. 미안해.... 그동안 넌 언제 이렇게 커서 유머러스하고도 어른스럽게 엄마를 위로하는 아이가 되었을까.

사랑한다 아들. 잘 자라고 있어 주어서 감사해.



미국 어느 초원에서 뛰놀던 순하고 착한소와 한국 어드메 농장의 성깔있는 돼지고기로 차린. 순한우의 고장 횡성에서의 한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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