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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 han a Sep 02. 2024

한 말씀만 하소서

이미지 출처:  스테파노의 겨자씨 묵상한톨 한 말씀만 하소서 : 네이버 포스트 (naver.com)



제 브런치 북의 제목은 ‘사기당해 다행이다’입니다.

고민끝에 제목을 그렇게 붙여놓고 총 6개의 글을 발행했고, 심지어 가장 최근 발행 글인 <어떤 죽음 III> 앞에는 번호만 바꾼 같은 제목의 글이 두 개나 있습니다. 브런치 연재에 올린 3편의 글과 <어떤 죽음 I,II>는 실은 어떤 죽음 III을 쓸 용기를 내기 위해 시간을 벌기 위한 글이었습니다.


그 일이 있고 몇 년의 시간이 지났지만, 저는 여전히 그 일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이제는 고인이 된 그 사람을 용서하지 못했으며, 무엇보다 이 모든 일의 원인이, 악연을 피하지 못하고 기어이 이 사단을 만든 제 탓이라 여기며 제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했습니다. 자꾸만 날카롭게 벼린 칼날을 제 안쪽으로 휘둘러 더 깊게 상처를 내고 있었어요. 스스로에 대한 자책이 너무 힘이 들어, 그 사람 탓을 했고, 잘못된 인연을 탓했고, 심지어 이 일을 계기로 다시 만난 하느님께도 악을 쓰며 따졌습니다. 당신 탓이라고.


저는 잔뜩 화가 나 있었고, 제 안에서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어쩌지 못해, 손에 칼을 든 어린 아이처럼 함부로 휘두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걸 글로 한 번은 꼭 써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그냥 그러면 이 가눌 수 없는 분노가 조금은 삭혀지지 않을까, 하느님께 기도해도 잘 안되던 ‘남을 용서’하고 ‘나를 용서’하는 것이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조금은 되지 않을까. 그래야만 비로소 또 한걸음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엔 생각뿐이었지만, 날이 갈수록 꼭 그래야만 할 것만 같았습니다.

이상하죠....     


그런데 그 글을 쓰려면 어쩔 수 없이 지난 일을 하나씩 기억해내야 하잖아요. 간신히 가라앉힌 흙탕물을 다시 우르르 흔들어야 하고, 그러면 또 부유하는  오염물질 같은 부정적인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저는 어느새 과거의 그 시간, 그 자리로 돌아가 그런 선택을 했던 스스로를 미워하고 증오할 것이 불 보듯 뻔해서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미루고 싶어서, 3편의 이야기를 쓰고 그것도 모자라 같은 제목의 두 편의 이야기로 제 나름의 완충재를 깔고, 겨우겨우 세 번째 같은 제목의 <어떤 죽음 III>썼어요.     

 

예상했던 대로, 앞에 5편의 글을 쓸 때는 그래도 감사와 다행의 감정이 들기도 했는데, 여섯번째 글을 쓰면서 다시 분노의 감정이 치솟았습니다. 쓰다가 자판을 마구 두드리며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제 가슴을 퍽퍽 치고, 머리를 쥐어뜯고, 주저앉아 엉엉 울기도 하고, 아주 쌩쑈를 했네요. 그런데, 실은....저를 가장 힘들게 한 건 그 사람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자책과 자괴감, 수치심이었어요.자존감이 바닥을 치다못해 땅으로 한없이 꺼져내려가고..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소리가 끊임없이 환청으로 들려서 정말이지 할 수만 있다면 머리를 뽑아버리고 싶을 지경이었습니다.


“인생 평탄한 줄 알고 까불더니 꼴좋다. 다른 사람 위하는 척, 돕는 척 다 위선이었지? 결혼 20년 차, 유난스럽게 악착을 떨더니 결과가 겨우 이거? 너 그동안 벌어놓은 거, 모아놓은 거 다 날렸네? 도로 원점 만도 못하게 된 기분이 어때? 헛똑똑이,멍청이, 이제 바닥에서 꺼져버려.그냥 죽어버려라...”  

   

쓰지말까... 관두자... 무슨 불행 베틀하는것도 아니고..멍청하게 사람 잘못 만나 쫄딱 망한거  대단한 자랑이라고 쪽팔리게 이걸  써서 남들 다 보는 브런치에 올리나.. 몇 번을 고민하고 또 고민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래도 이 글을 기어이 발행하는 것이 제가 꼭 해야만 할 과제 같았어요. 아무도 시킨 적도 없는 혼자만의 숙제같은.

그래서, 수치스럽고 창피함을 무릅쓰고 세 번째 죽음, 그 사람의 죽음에 관한 글을 올렸습니다. 글의 마무리에도 썼듯이, 저는 여전히 그 사람도, 저도 용서하지 못한 채였고 그 마음 그대로 썼습니다.

“아버지, 저는 여전히 그 사람도 저도 용서가 안됩니다.”

그리고 글의 마지막 문장은

“어떤 죽음은 용서를 강요한다. 그리고 용서는 남은 자의 몫이다”

라고 끝냈습니다.      


숙제를 마치면 홀가분 할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어요. 글을 쓰며 다시 헤집어진 기억으로 내내 힘이 들었고, 부끄럽고, 수치스러워 그대로 땅으로 꺼져버리고 싶었습니다. 그나마 예전처럼 죽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들었던 걸 보면, 제가 조금은 달라지고 있는 중이기는 한가보다.. 했어요. 그렇게 글을 올린 주말이 지나고 맘이 너덜너덜 한 채로 한 주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봉합했던 상처가 다시 터지고 곪아가는 것처럼 아프고 힘들었고 괜히 글을 썼나 솔직히 후회도 했어요.      


수요일 아침의 일입니다.

제게 거의 꼬박 3년을 아침마다 성경 구절을 보내주시는 분이 계세요. 남편과 부모님 외에 제게 일어난 그 일을 알고 계시는 몇 안 되는 지인이신데, 제가 그 일로 아파하기 시작할 무렵부터 아침마다 같은 시간에 하루도 빠짐없이 성경 말씀을 보내주셨어요. 처음 거의 1년은  내용을 읽지도 않고 ‘감사합니다’ 성의 표시의 답만 보냈는데, 상황이 악화되고 제가 점점 약에 의존하고 정신을 못차리게 되자  눈에 안들어오던 성경 구절이 저절로 마음에 들어오더라구요. 그렇게 읽고, 울고, 매달리고 하며 시간이 흘렀고, 제 발로 기다시피 성당으로 다시 간 데에는 제게 매일 아침 성경 말씀을 보내주시던 그 분의 기도의 힘도 분명히 컸을 겁니다. 제가 성당에 다시 나가고, 하느님 앞에서 남편과 결혼 19년 만에 혼배 성사를 올리고, 아들도 세례를 받고 첫영성체를 하는 모든 과정을 지켜보시며, 그분은 저희 엄마 못지 않게 진심으로 기뻐하고 축복해주셨습니다.   

  

수요일 아침도 어김없이 그 분께 성경 말씀 메시지가 와있었는데, 그 날은 말씀 구절 밑에 유튜브 동영상을 하나 붙여주셨어요. 베이직 교회 조정민 목사님의 영상이었습니다. 그냥 말씀만 읽고 영상은 나중에 봐야지,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네.. 하고 말았습니다. 목요일 밤이 돼서야 시간이 나서 영상을 보는데, 그 영상을 보자마자 2주 전에 도서관에서 빌려놓고 보지 않은 채 반납기일이 다 되어가는 책이 떠올랐습니다. 조정민 목사님이 쓴 책 ‘왜 낙심하는가’를 우연히 보고 너무 위로가 되고 치유가 돼서, 그 분의 책을 시리즈로 모조리 빌려와놓고 정작 보지 않고 잊고 있었던 거예요. 바닥에 쌓여있는 책 중 맨 위의 책을 집어들었는데, 책 제목이 “왜 분노하는가” 였습니다.     


자정이 넘은 시간, 책을 읽기 시작했고 몇 페이지 안 읽고 깨달았습니다.

타인을, 나 자신을 용서하지 못해 주기도문을 외울 때마다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듯이...’이 구절에서 주춤거리는 제게 하느님이 이 책을 통해 답을 주고 계시다는 것을요.      


-분노는 정상적인 감정입니다. 화가 나면 화를 내는 게 정상입니다. 화내는 것이 잘못은 아닙니다. 문제는 화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입니다.     


-하나님 관점에서 인생을 보면 해석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절망하거나 위축될 일이 없습니다. 일어난 사건에 분노하거나 얽매이지 않게 됩니다. 현실을 빨리 수용하고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디딤돌로 놓은 것을 장애물로 착각해서 걸려 넘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분노를 다스리고 극복하는 이유는 그것이 사람을 살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고 기근의 때에 그들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고난이 필요했다고 고백했습니다. 우리 앞에 놓인 걸림돌도 생명을 살리기 위한 다딤돌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분노를 다스리려고 애를 쓰면 그 분노에 내가 묶이게 될 것입니다. 분노하지 않으려고 하면 할수록 분노는 더 집요하게 나를 좇습니다. 그런데 내 마음이 분노보다 더 중요한 생각으로 가득하게 되면 내 분노는 점점 중요하지 않은 일이 됩니다.      


-누군가에 혹은 무언가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다 보면 내 안에 있는 분노를 곱씹을 시간이 없습니다. 내가 처한 상황에 집중하는 눈을 바깥으로 돌리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분노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 사람은 온전히 용서할 수 없습니다. 다윗조차 그럴 수 없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마음에 쏙 드는 사람이었지만 죄를 용서할 수 없는 한계를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온전한 용서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악을 하나님께 고백해야 합니다. 내가 지은 잘못을 하나님께 고백함으로 용서 받아야 합니다. 사람에게 사죄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내가 죄를 지은 그 사람에게는 사는 날까지 용서를 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죄는 사람이 용서할 수 없습니다. 용서는 오직 하나님의 일입니다.


-무엇보다 나 자신이 분노에 사로잡히도록 내버려두지 마십시오. 누군가 나를 분노하게 했다면 그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고 내 안의 솔직한 심정을 하나님께 있는 그대로 토로하십시오. 더 심각한 2차 피해가 없도록 해가 지기 전에 분노를 처리하십시오. 그럴 때 우리도 다윗처럼 하나님이 마음껏 쓰실 수 있는 자녀가 될 것입니다.

 <왜 분노하는가? : 분노사회에서 나를 지키는 길> (조정민 지음) 중에서     


“아.. 진짜... 또 그러시네... '내가 너를 다 보고 있다'라고 하시는 거죠? 저번에 라디오 문자 당첨 때도 그러셨잖아요. 그때도 제가, '오늘 프로그램 끝나기 전에 문자 당첨되게 해주시면 아버지 믿을께요...' 발칙하게 감히 당신을 시험하며 대들었을 때, 저를 벌하시기는커녕 프로그램이 끝나기 직전에 저랑 같은 번호를 쓰는 다른 사람의 사연을 당첨되게 하셔서 내가 다 듣고, 보고 있노라.. 하셨죠. 이번에도 역시.. 이 책을 진즉에 빌려오게 하시고, 몇날 몇칠을 발에 치어 굴러다니게 하시다가 제가 '아버지, 도저히 용서를 못하겠는데, 저 어떡해요. 강요하지 마세요. 그건 산 자의 몫으로 여길께요...' 글로써 답을 구하자, 아버지 앞에 저를 다시 불러들인 지인을 통해, 제게 치유와 위로를 준 목사님의 글을 통해 이렇게 답을 주시는군요.     

'그건 너의 몫이 아니니 걱정말고 내게 맡기렴'

언제나처럼 지나고 보면 그 모든 길에 당신이 계셨고, 제 주위를 움직이시고, 저를 움직이셔서 깨닫게 하십니다. 당신의 어린 딸, 어리석고 미약하여 늘 한참 후에야 알아차리고 뒤늦게서야 ‘아...’ 합니다. 이제 당신 뜻을 알겠습니다.      


그러니... 뜻대로 하소서.     


P.S 하느님, 그러나 앞으로도 언제 또 좌절하여 그 사람이 밉고 나 자신이 밉습니다. 아버지 원망스러워요... 이럴지도 몰라요. 그러면 아버지, 부디 노여워 마시고 긍휼히 여기시어 한 말씀만 하소서. '내가 여기, 다 보고 있단다.' 그러면,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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