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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 han a Sep 09. 2024

글 쓸 자격

  



살아가면서 ‘자격’이 필요한 일이 몇 가지나 될까.

운전면허증, 조리사 자격증, 기능공 자격증, 변호사 자격증, 의사 면허증 등과 같이 시험을 통과해서 물리적으로 진짜 ‘자격증서’가 주어지는 ‘자격’말고도, 인간으로서 어떤 일을 하는데 필요한 조건이나 능력을 말하는 그 ‘자격’ 말이다. 꼭 어떤 ‘일’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떤 ‘역할’을 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자격을 논한다. 그리고 보통 이런 역할은 누릴 수 있는 권리만큼이나 상당한 책임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는 당신이 부모 될 자격, 선생 될 자격, 선배 될 자격이 있냐고 묻지, 자식 될 자격, 학생 될 자격, 후배 될 자격이 있는지 묻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글을 쓰는데도 자격이 필요하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다. 어릴 때 쓰던 그림일기부터 아침 해가 밝으면 차마 다시 읽지 못할 부끄러운 치기로 가득한 사춘기 시절의 낙서, 신춘문예 당선자의 소설에서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작품까지 모두 ‘글’이라 칭하는 걸 보면, 글을 쓰는데 딱히 어떤 자격이 필요한 것 같지는 않다. 해마다 각종 문예상의 당선자들에게 듣기 좋으라고 ‘작가’라는 호칭을 줄 망정, ‘작가 증서’ 라든가, ‘작가 합격증’ 같은 걸 주지는 않는 것만 봐도, 글을 쓴다는 것, 혹은 작가가 된다는 것은 아무나,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처럼 느껴진다.

아니, 아니다.

아무나, 누구나 마음대로 시작은 할 수 있지만, 아무에게도, 누구에게도 글쓰기는 힘들고, ‘진짜 작가’되기는 더욱 힘든 일이다.


언젠가부터 나는 저 혼자 이 듣도 보도 못한 ‘작가 자격’을 세워놓고, ‘나는 자격이 없어서 글을 쓸 수 없다’고 생각했다. 작가라면 모름지기 인생의 희노애락을 처절하고 찐하고 녹진하게 경험하고, 그 과정에서 눈물로 얼룩진 상처와 고름이 엉겨붙은 피딱지를 스스로 핥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경험을 글로 써내어 사람들에게 인간 승리의 위로와 감동을 주어야 한다고. 그래야 진짜 작가고, 그런 글이 진짜 작품이라고. 혼자서 만들어놓은 이 어이없는 자격 조건에 나는 맞지 않으므로 평생을 가도 나는 ‘작가’는 될 수 없을 거라고 그렇게 정해버렸다.      

솔직히 ‘글 쓸 자격’ 따위는 영영 안 주어지길 바랬다.


첫째로 그건 적어도 내겐, ‘인생 풍파’의 또 다른 이름이었고, 나는 사회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건 아니었어도, 나름 남들이 보기에 꽤 괜찮은 삶을 영위하고 있었기에 굳이 인생 고난을 겪고 작가가 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 간혹 커뮤니티나 단체톡방 등에 올린 글에 누군가 ‘글을 참 잘 쓰시네요. 작가하셔도 되겠어요.’ 댓글이라도 달면 펄쩍 놀라며 ‘어머 과찬이세요. 제가 무슨 작가는요. 작가는 아무나 하나요’ 하며 한껏 겸손을 떠는 척 했지만, 실은 작가라는 직업을 대단한 것으로 여기고 높이 칭하는 듯한 이 말 속에는 ‘내가 작가 자격이 없는게 얼마나 다행이야. 그래도 나는 이만하면 평탄하고 풍족한 인생이지. 인생 쓴 맛 양분 삼아 위대한 글 써내는 작가보다 이게 낫지. 이게 맞지...’ 하는 안심과 심지어 약간의 우월감조차 있었다는 것을. 나는 안다.      


둘째로, 나는 작가 자격이 없다고 스스로 못을 박아버린 데는 실은 비겁한 속내가 하나 더 있었다.

글을 쓰기 위해 오롯이 자기 자신을 들여다봐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귀찮고, 힘든 일인지 알기 때문이었다. 쇼츠에 중독된 아이에게 300페이지짜리 세계문학 전집을 읽고 진심을 다해 한땀 한땀 손으로 노트 몇 페이지 분량의 독후감을 쓰라고 하는 것 보다 몇 배는 더 힘들고 귀찮고 피하고 싶은 일이다. 몸의 귀찮음은 둘째 치고, 그 과정에서 숨길 수 없는 날 것 그대로의 내 안의 속물근성, 거짓, 위선을 맞닥뜨려야 한다는 것은 끔찍하고 두렵고 때로는 불쾌하기까지 한 일이었다. ‘자격’이 주어졌는데도 그걸 안 한다면 비겁하게 피하는 꼴밖에는 안되니까, 차라리 떳떳하게 안 해도 되도록 ‘글 쓸 자격’ 따위는 영영 주어지지 않는 편이 나았다.       


어린 시절부터의 나를 오랫동안 보아온 지인이 나도 모르게 내 생일과 태어난 시를 용하다는 철학관에 들이밀어 내 사주를 본 적이 있다. 철학관 선생이 말하길,

“여자 팔자가 이래 가지고 어따 쓰나. 글이나 써야지...” 했단다. 그 말이 꼭 ‘시난고난 겪으며 힘겹게 살 팔자’를 다르게 표현한 것만 같아, 용하기는 개뿔, 순 돌팔이라고 강하게 부인했던 기억이 난다.      

그 후로도 나는, 좋은 부모님 밑에서 큰 고생 모르고 자라, 역시 좋은 시어른 밑에서 자란 착한 남자 만나 결혼하고, 좀 늦은 나이긴 했지만 무탈하게 건강한 아이도 낳아 잘 커가고, 노력에 비해 과분하게 자산도 일구고.... 뭐 그렇게 적당히 편안하고, 딱히 대단할 것도 없지만 남들에게 그닥 꿀리지 않을 정도로 풍요로운 내 삶이 글 쓸 자격이 없다는 것에 적이 안심하며 살아왔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그리고. 깨달았다.

나란 인간이 얼마나 오만방자하기 짝이 없었는지.      


순풍에 돛단배인 줄 알았던 내 인생이, 잘못된 인연으로 얽힌 일련의 사건들과 그로 인한 손해를 만회하기 위해 내린 몇 번의 판단 미스와 시행착오로 순식간에 역풍을 맞다 못해 바닥으로 가라앉기까지는 그닥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불과 3-4년만에 사람도 잃고(나에게 사기를 친 그 사람은 실제로 얼마전 고인이 되었다), 결혼 생활 20년간 모아온 전 재산도 잃고, 건강도 잃고, 자존심도 자존감도 모두 잃었다. 손해가 너무 커서 그동안 든든한 비빌 언덕이 되어주었던 부모님까지 피해를 보셨고, 이 모든 일의 발단이 된 당사자는 책임을 물을 수도 없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다 끝난 줄 알았다. 자책이 너무 힘들어 그만 죽자 했다. 그랬는데...

하느님을 다시 만나고 기도를 다시 시작했다. 부모님의 기도와 눈물, 남편의 헌신과 사랑, 나를 위로해 줄 만큼 어느새 훌쩍 커버린 아이가 잡아준 손이 나를 다시 살게 했고 여전히 힘들긴 해도 더 이상 ‘죽을 결심’을 하지는 않게 되었다. 그리고 어이없게도 그 자리에 ‘글 쓸 결심‘이 생겨났다. 그동안 ’글 쓸 자격‘이 없다며 겸손한 척 오만방자 까불었는데, 이 지경이 되고 보니 나는 어느새 내 기준에 ’글 쓸 자격‘이 차고도 넘치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가장 친한 지인한테 사기당하고, 내가 구경도 못해본 남의 사채빚도 갚아보고, 아파트도 몇 채 날려보고, 수십억 재산도 까먹어보고, 어린 자식있는 에미가 죽겠다고 약도 먹어 보고.... 이만하면 글 쓸 자격 정도가 아니라 당장 등단이라도 시켜줘야하는 거 아냐 생각이 들 정도였다. 왜 그 일을 그토록 쓰고 싶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글 쓸 자격‘ 이란 걸 멋대로 만든 것도 나였으니, 그 자격이 없다고 정한 것도, 이제 자격이 생겼다고 여기는 것도 순전히 다 내 맘이었다. 그야말로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고 쌩쑈를 하는 격이었다.   

  

글을 쓰면 치유가 되지 않을까... 밑도 끝도 없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그 일‘이 오히려 내 인생의 전환점이자 교훈이 되어 앞으로 꽃길만 펼쳐질 거다...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며 발행한 첫 번째 브런치 글의 제목이 ’사기당해 다행이다‘ 였다. 스스로 속을 다스려보고자 그렇게 제목을 붙이긴 했지만 실은 거짓말이었다.


다행은 개뿔


쓰는 내내 잊으려 잊으려 간신히 애를 쓰고 눌러놨던 깨진 기억의 파편들이 모서리 모서리마다 날카롭게 벼려져 내 속을 또 온통 헤집어 피가 철철철 흘렀다. 분노가 치밀어 열불이 나고 속이 쓰리고 맘이 천갈래 만갈래 갈기갈기 찢어 발겨진 느낌에 맨가슴을 쥐어뜯으며,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가며, 꺼이꺼이 통곡하며 미친년처럼 자판을 두드렸다.

그렇게 어찌어찌 한주에 하나씩 글을 올렸다. 나를 너무 아프게 하는 글이 힘들어서 아들 녀석의 엉뚱한 말장난을 주제로 일상을 그리는 브런치북도 하나 더 만들어 나름 ’글쓰기의 중화제‘ 로 삼았다.      


나는 시간 관념이 참 ’데데한‘ 편이다. 약속시간에 늘 오분 정도 늦고, 학생 때는 수업 시간에 늘 단골 지각생이었으며,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출근 시간도 늘 간당간당 맞추고, 심지어 성당의 주일미사에도 늦게 도착해서 십자가 위의 예수님과 신부님 눈치를 보기 일쑤다. 그런 내가 누가 시킨 것도 검사를 하는 것도 아닌데, 나 혼자 월요일로 정해놓은 브런치 글은 심지어 늦을까봐 일요일에 미리 발행하기도 한다. 그렇게 브런치에 글을 올리고, 다른 작가님의 글에 누른 ’좋아요‘가 알림이 되어 내 글에 ’좋아요’ 보은으로 돌아오기도 하고, 내가 구독을 누른 작가님이 나의 구독자가 되어주시기도 하고. 지난 몇 년간 밖에 나가면 모두가 나를 멍청한 년이라고 손가락질 하는 것 같아서  학원에 출근하는 것 외에는 지인도 친구도 안 만나고 숨다시피 지냈는데, 얼굴도 모르는 수많은 글벗님들이 한번도 본 적 없는 나의 아픔에 공감한다며 ‘좋아요’를 누르고 다정한 댓글을 달아주었다.


연재한 글 중에 울며불며 가장 힘들게 쓴 최근 글을 아이의 수학 학원 원장님이자, 나의 인생 멘토이기도 한 분께 보여드렸다. 당신 역시 등단 수필가이기도 하신 그 분은 그 전까지 보여드린 글에는 별 말씀이 없으셨는데, 그날은 손수 전화를 주셨다. ‘글이 이전에 비해 단단해진 것 같네’라는 그분의 멘트에, 닮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글을 쓰는 작가님의 칭찬을 받았다 생각하니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근데 그렇게 기분 좋아하다가 문득, 생각해보니 어이가 없었다. 멍청하게 사람 잘못 만나 모든 것을 잃고 쫄딱 망한 이야기. 죽지도 못해 살기 위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기도하며 쓴 처절한 후회와 자책의 글이었다. 떠올리기만 해도 죽을 것같이 괴로운 기억을 헤집어가며 쓰느라 철철 울던 건 어디가고, 그저 ‘글이 단단해졌다.’잘썼다‘는 칭찬 한마디에 이리 마음이 설레고 기분이 좋다니.. 나란 인간 어디가 모지라도 단단히 모자란 것 아닌가 싶었다.


이런 맘을 그 분께 전했더니

“그게 글쟁이들의 매력이죠. 허당미”

라고 하신다. 그리고 덧붙이신 한마디.

“그 모든 일들. 지금은 괴롭겠지만,

아이고, 당신 아직 이도 안났소....”    

   

그러고보니 브런치에는 나처럼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으로 글쓰기를 선택한 작가님들이 참 많이 계셨다. 사랑하는 배우자의 투병을 지켜보며 결국 떠나보낸 이야기, 몸이 혹은 마음이 아픈 아이를 키우고 있는 작가님, 심지어 참척의 고통을 글로 담담하게 글로 풀어내신 분들도 꽤 여러분이었다. 박완서 선생님께서도 88올림픽 당시 서울이 가장 들떠 떠들썩했던 해에, 장성한 아드님을 어이없이 잃으시고 몇 년을 떠돌며 방황하시다가 결국 그걸 ’한 말씀만 하소서’ 라는 제목의 작품으로 써내시지 않았나. 그런 상실의 슬픔에 비하면, 사람 잃고, 돈 잃고 죽을 결심했다는, 후회와 원망 가득한 내 글은 한낮 자기 연민에 겨운 징징거림에 지나지 않는 것 같아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작가들은 자신의 상처에서 흘린 피를 자신의 머리털을 뽑아 만든 붓에 찍어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었다. 아프고 힘든 경험을 해야 인간으로서 성숙해지고 진짜 글도 나온다고 믿었다. 마치 자기 목을 스스로 깨물어 피를 빨아먹고 흡족한 듯 괴기스러운 미소를 짓는 흡혈귀의 모습이 연상되기도 한다. 망각의 샘에 가두었던 슬픈 기억을 굳이 길어 올리고, 상처의 피딱지를 기필코 뜯어내어 기어이 그 속에서 글감을 건져 올리는 잔혹한 가학주의 성향을 가진 이들이 작가들인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 상처를 건드려 스스로를 똑바로 바라보고 치유하는 과정이 너무 괴롭다는 것을 알기에 그럴 일이 아예 없기를 바랬던 듯도 하다. 우리 삶이 평탄하게만 흘러간다는게 가당치 않은 일임을 알면서도, 위험이 닥쳤을 때 머리만 모래에 묻고 궁둥이를 하늘을 향해 쳐들고 있는 어리석은 타조가 내 모습이었다.      

 

"나는 어느 틈에 내 이야기로 소설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토악질하듯이 괴롭게 몸부림을 치며, 토악질하듯이 시원해하며, 행복해하며.” -박완서,'부처님 근처(1973)


故 박완서 선생님의 1973년 작 ’부처님 근처‘의 한 부분이다. 6.25 전쟁 이후 아버지와 오빠를 사상과 이념 갈등으로 인해 연달아 잃은 후, 그 죽음을 마음껏 슬퍼도 할 수 없이 땅에 묻고 가슴에 묻은 선생은, 사십 평생 그걸 가슴에 체증처럼 얹고 살아가다가, 등단 이후 마침내 토악질처럼 글로 쏟아내셨다. 스스로 표현했듯, ’괴롭게 몸부림을 쳤지만 시원하고 행복하게.‘      


괴롭지만, 시원하고 행복하다...

여기에 답이 있었다.      


힘들지만 그 과정을 거치고 나면, 비로소 그 안에서 진짜 나를 오롯이 만날 수 있다는 것. 고난과 절망과 원망과 후회와 비난과 자책 속에 가리워져 보이지 않았던 나의 가장 순수한 알맹이를, 그 모든 것을 울며불며 거둬내고 난 후에야 비로소 찾을 수 있다는 것. 평생을 살면서 이렇게 순도 백프로의 온전한 나 자신을 조우하는 이가 세상에 몇 프로나 될까. 그것의 가치를 물질로, 돈으로 환산할 수 있을까. 물론, 글로써 풀어내도, 여전히 사랑하는 이는 이미 떠났고, 아이는 아직도 아프고, 잃은 돈은 돌아오지 않고, 인생은 여전히 괴로울 것이다. 그러나, ’토악질‘을 통해 정화된 감정으로 다시 채워진 ’나‘의 눈에 보이는 세상은 더 이상 이전과는 다를 것이다.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리라‘ 와 같은 개똥철학같은 담론없이도, 그냥, 가장 순수한 나라는 인간과 다시 마주하게 된다는 것, 세상의 어떤 사회적, 물질적 기준과 상관없이 나 스스로 ’온전한 나‘일 수 있다는 것. 이보다 더 완전한 행복이 있을까.

     

이제, 글 쓸 자격을 새롭게 생각해본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나에게 일어나지 못할 일은 세상에 없음을 받아들이고 삶을 그 자체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비록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예측할 수 없지만 이미 벌어진 일에 어떻게 반응하고, 그 다음의 삶을 어떻게 영위할지 스스로 선택하는 사람이라면,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고, 오롯이 받아들이고 반성은 하되, 너무 오래 자책은 하지 말고 다음을 기약하는 사람이라면,

삶을 바라보는 이런 시선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든 글을 쓸 자격이 있다.     

그러므로 ’글 쓸 자격‘이 있는 사람은, 그 자격이 있다는 것만으로 큰 축복이며 등단작가이건 아니건, 어떤 공모전의 수상자이건 아니건 모두 훌륭한 작가라고.

그렇게 달리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니,

내게도.

’글 쓸 자격‘이 생겨서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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