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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 han a Sep 23. 2024

'내 방'이 생겨서 다행이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컴퓨터 자판에 손을 올립니다. 한참동안 빈 화면을 노려보다가 머릿속에 떠다니는 문장들을 잡아 이리저리 하얀 벽 위에 놓았습니다. 그러나 곧, 내 손가락으로 입력한 글자가 빈 벽에 나타나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몸이 떨려, 차마 바로 보지 못하고 화면을 외면했습니다.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고 실눈을 뜨고 화면을 보다가 급기야는 노트북을 덮어버리기를 여러번.      


그만두자.      


일어서서 방안을 서성이다가 다시 앉아 노트북을 조심스럽게 열어봅니다. 가볍디 가볍다고 광고하는 노트북 뚜껑의 무게가 천근만근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만두면 영영 내 머릿속 생각에 짓눌려 옴짝달싹 못하고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아닌 채 멈춰만 있을 것 같았습니다. 다시 여기저기 칼날이 박힌 기억 속을 휘젓고 들어가 겨우겨우 보잘 것 없는 문장을 건져옵니다. 아픈 기억에서 나온 문장들은 태생이 그래 그런 듯, 한없이 초라하고 볼품이 없어 그만, 글조차 밉습니다.      


자판을 두드리다 보면 어느새, 내 몸은 여기 있는데 내 영혼은 그때 그 자리 그 시간으로 날아가 그때의 일을 고스란히 겪고 있습니다. 여기 앉은 나는 새삼 분노가 치밀어 미치광이 피아니스트처럼 애꿎은 노트북 자판을 쾅 내리치며 소리를 지릅니다. 눈물 콧물 줄줄 흘리며 쓰다가 가슴을 쥐어뜯는 대성통곡으로 이어져 주저앉아 꺼이꺼이 울기도 여러번.     


그 일... 이후 4년여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기억은 안나는데 손가락으로 헤어보니 어느새 4년이 지났더라구요. ‘죽을 결심’이 슬그머니 사라진 자리에 이상하게도 ‘글 쓸 결심’이 들어왔습니다. 브런치에 작가 신청을 하고 내 글방이 생기고... 1회 프롤로그를 쓰기까지 4년 정도의 시간이 걸렸네요. 도저히 그 다음 회는 못쓸 줄 알았는데 어찌어찌 한편을 올리고, 다음 주는 진짜 힘들어서 그만둬야겠다 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생각을 정리하고 메모를 하고, 주말이 다가올수록 은근히 신경이 쓰이는 거예요.    


무디기 짝이 없어 두부모나 간신히 자를까 싶은 뭉툭한 칼날같은 시간관념을 가진 제가, 출근시간도 약속시간도 늘 맡아놓고 지각생이고 심지어 주일 미사에도 늦어 십자가의 예수님과 신부님 눈치를 보며 까치발로 기도를 하는 제가, 누가 시킨 것도 감시하는 것도 아닌데 월요일로 정해놓은 브런치 글은 심지어 늦을까봐 일요일 저녁에 미리 올리고 있더라구요. 쓰다가 떠올리는 기억에 북받쳐 소리를 지르고 가슴을 쥐어뜯으면서도 그 기억을 쓴 글을 본 어떤 분이 잘 썼다 한마디 해주면 잘 썼다는 그 칭찬에 기분이 좋아 헤벌쭉하는 걸 보면 스스로도 어이가 없어서 속으로 '좋냐? 쯧쯧..' 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 전까지, 헤집을 때마다 나를 찌르던 그 기억의 파편들이 내 안에 콕콕 박혀서 영영 사라지지 않을 것만 같더니, 하나하나 화면으로 옮겨 앉으며 날 선 모서리들이 조금씩 둥글어지고 있습니다. 얼마전까지, 구더기,곰팡이 가득한 방바닥 위에 새 장판을 덮어 그 위에 깔고 앉은 듯 외면했다면, 지금은 더러운 방은 거기 그냥 두고, 새 방으로 옮겨 갈 용기가 생긴 듯 합니다. 얼마 전까지, 나는 그런 방에 살았던 적이 없다고 거짓으로 믿으려 했다면, 지금은 그것도 내 방이었어. 그러나, 이젠 깨끗한 방에서 다시 시작해보자 방문을 열고 기어나오는 중입니다.      


그렇게 문을 열고 들어온 곳이 브런치의 ‘내 글방‘ 입니다. 브런치에서는 ’내 서랍‘이라고 표현하지만, 저는 폐쇠공포증이 있어서 독서실 칸막이에서 공부하는 것도 힘겨웠었기에, ’내 서랍’ 말고 ‘내 방’ 이라고 부르려 합니다.^^     


‘그 일’을 글로 풀어내는 일이 참 쉽지 않습니다. 쓰다보면 같은 소리 반복하고 있고, 더 힘든 분들도 계신데 나 힘들어요 징징거리는 것 같고, 멍청하다고, 바보같다고 동네방네 광고하는 것만 같고, 개인적인 이야기를 이런 공개된 공간에 자물쇠도 없이 풀어놓는 것 같아서 민망하고 그렇습니다. 그러나 자물쇠가 없는 것은 기꺼이 마음을 나누고 생각을 나누고, 나의 공감과 당신의 공감을 자유롭게 오가게 하겠다는 뜻일 뿐, 어떻든 여기는 ‘내 방’ 이니, 그냥 나 하고 싶은대로 실컷 징징거리고 버둥거리고 울고불고 때로는 게실게실, 가끔은 헤벌쭉... 좋아라 실실거리기로 했습니다. 그러고 나니 또 한결 맘이 편해졌습니다. 방문 열어보고 싫은 분은 안 들어오시겠지요 뭐 ^^.     


브런치에 방이 생긴지 2달여가 되어갑니다.

처음에는 낯설기만 하던 방이 조금씩 익숙해지고, 조금씩 진짜 ‘내 방’ 같은 마음이 듭니다. 꼭꼭 숨어있던 제가 조심스럽게 창문도 내어보고, 커튼 살짝 열고 밖을 내다보기도 합니다. 창문을 활짝 열고 눈부신 햇살을. 바람을 고스란히 방으로 들이기엔 아직은 심장이 두근대지만, 이 방에서 울고불고 웃으며 시간을 좀 더 지내다보면,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열린 창으로 심호흡을 크게 하고 마침내 창문이 아닌 방문을 열고 뚜벅뚜벅 세상밖으로 다시 나가지리라.. 기대해봅니다.      


낯설고 보잘 것 없는 방문 빼꼼 열어보고, 그 안에 웅크린 이상한 여자에게 따뜻한 위로와 댓글 달아주시는 모든 옆방 글벗님들께 뜬금없지만 진심어린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지난 몇 년간 사나운 바람 부는 허허벌판에 알몸으로 혼자 선 느낌이었는데, 어찌어찌 찾아들어온 ‘내 방’에서 꽁꽁 얼어붙었던 몸이,새파래진 마음이 살살 녹아갑니다.     


‘그 일’이 아니었다면,

문열어볼 생각조차 안했을 방입니다,

브런치에 ‘내 방’이 생겨서 참 다행입니다.                



표지일러스트출처 : [클래스101] 공간에 포근한 분위기를 불어넣.. : 네이버블로그 (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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