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나를 알아차리는 기술
Chapter 11. 가끔은 도망쳐도 괜찮다
: 멈춤과 회복의 용기
“에라, 나도 모르겠다.”
입 밖에 내는 순간, 어깨에 걸려 있던 보이지 않던 무게가 조금은 내려앉는다.
무언가를 계속 해내야만 할 것 같은 긴장,
계획대로 살지 않으면 도태될까 두려운 마음,
결과로 스스로를 증명해야만 안심되는 시대에서
이 문장은 때로 회피가 아니라 용기일지도 모른다.
도망은 무너지는 게 아니다. 무너지지 않기 위해 택하는 회복의 방식이 될 수 있다.
‘모르겠다’고 말할 용기
심리학자 수잔 데이비드(Susan David)는 감정 회피가 장기적으로 우리를 더 취약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그녀는 '정서적 민첩성(Emotional Agility)'이라는 개념을 통해, 감정을 억지로 없애려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인식할 것을 제안한다.
지금 내가 느끼는 혼란과 지침, 회의감도 부정하지 말고 바라봐야 비로소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다.
때로는 '해야만 하는 일'보다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었는지 잊은 채 살아간다.
그렇게 나를 잃어가는 와중에, 잠깐 멈추고 돌아가는 선택이 ‘도망’이라 불리는 것뿐이다.
하지만 정말 그게 도망이기만 할까?
내비게이션이 빼앗은 길 찾기의 감각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내비게이션이라는 기기에 의존하게 되었다.
목적지와 도착 시간은 알지만, 경로를 스스로 탐색하는 과정은 사라졌다.
중간에 어떤 길을 지나왔는지, 어느 풍경을 스쳤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빠르고 효율적인 길을 택하느라 방향 감각조차 기계에 넘겨준 셈이다.
어쩌면 우리 삶도 마찬가지다.
정답이 정해진 진로, 보장된 루트, 안정적인 선택만을 좇다 보면
진짜 내가 원하던 방향은 어느 틈에 잊힌다.
잠시 길을 잃는 순간조차 불안해지기 쉬운 이유다.
그러나 방향을 잃는다고 해서 실패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인간이다. 길을 잃기도 하고, 돌아가기도 하고, 멈춰 서기도 한다.
그런 과정 안에서만 진짜 나만의 길을 ‘감각’하며 다시 설정할 수 있다.
진화적 관점: 생존을 위한 '도망'의 유효성
진화심리학에서는 ‘회피’ 또한 생존 전략이었다고 본다.
위협을 감지하면 도망치는 것은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살기 위한 반응이었다.
가만히 맞서는 것보다 때로는 멀어지고, 숨고, 거리 두는 것이 훨씬 더 지혜로운 방식이었다.
지금 우리가 느끼는 번아웃과 과잉 몰입도, 뇌는 ‘위기’로 받아들인다.
정신의학자 존 레이티(John Ratey)는 과도한 스트레스는 뇌의 전두엽 기능을 떨어뜨리고, 사고력과 감정조절력을 동시에 저하시킨다고 말한다.
이때 회피는 감정적 붕괴를 막아주는 임시 차단 장치가 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도망은 단순한 무책임이 아니라 뇌와 마음이 보내는 회복 요청이다.
철학은 말한다, “인간은 길을 잃을 수밖에 없다”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인간은 세계 안에서 던져진 존재”라고 했다.
내가 선택한 것처럼 보이는 삶조차도, 많은 우연과 상황 속에서 이뤄진다.
길을 잃고, 주저앉고, 다시 생각하는 것이 이상한 게 아니라
그 자체가 인간이라는 존재의 본질이다.
우리는 항상 도중에 있고, 항상 헤매고, 그래서 다시 출발할 수 있다.
도망이 아니었다. 방향을 회복한 시간이었다.
정말 힘들었던 시기를 ‘에라 모르겠다’는 말로 멈춰냈던 한 사람의 고백이 있다.
그 시간은 그에게 무엇을 향해 가야 할지 새로 생각해 보는 기회였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고 달리는 대신,
잠시 멈춰 자신의 속도와 방향을 되짚는 시간이었다.
결국 그는 무너진 것이 아니었다.
무너지지 않기 위해 잘 쉬어낸 것이었다.
한 줄 마무리
가끔은 도망쳐도 괜찮다.
지금 잠시 멈춘 그 자리가,
다시 걷기 위한 첫걸음일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