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가와 생애
요한 슈트라우스 1세(1804~1849)는 오스트리아 빈 출신으로, 본래 가난한 직공의 아들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잃고 어렵게 살아갔지만, 음악적 재능을 스스로 갈고닦아 바이올린과 작곡을 익혔습니다. 그는 특히 왈츠와 폴카, 행진곡으로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빈의 무도회 문화를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지요.
슈트라우스는 귀족들의 화려한 궁정무도회뿐 아니라 평민들이 즐기는 민속적 흥취를 음악으로 엮어내, 누구나 함께 즐길 수 있는 리듬을 만들어냈습니다. 그 덕분에 당시 “무도회의 왕”이라 불리며 명성을 떨쳤습니다.
라데츠키 행진곡의 탄생
1848년 유럽은 혁명의 불길에 휩싸였고, 오스트리아 제국 역시 혼란스러웠습니다. 슈트라우스는 오스트리아 군대와 황실을 지지하는 입장이었는데, 그가 헌정한 작품이 바로 라데츠키 행진곡입니다.
이 곡은 오스트리아의 장군 요제프 라데츠키가 이끄는 군대가 이탈리아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해 작곡되었지요.
흥겨운 박수와 함께 연주되는 이 곡은 본래 군사적 색채를 띠었지만, 점차 오스트리아 국민과 빈 시민들에게 축제의 상징이 되었고, 오늘날에는 매년 1월 1일 빈 필하모닉 신년음악회의 마지막 곡으로 연주되며 전 세계인의 새해 인사처럼 자리 잡았습니다.
사랑과 결혼
슈트라우스의 삶은 음악처럼 늘 밝지만은 않았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 사랑했던 아내 안나와 결혼했지만, 가정은 불행했습니다. 특히 아들인 요한 슈트라우스 2세가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음악가의 길을 걷자, 부자간의 갈등이 깊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버지가 반대한 아들은 “왈츠의 황제”가 되어 더 큰 명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이를 끝내 받아들이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지요.
노후와 죽음
슈트라우스 1세는 1849년 빈에서 돌연 콜레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겨우 45세의 짧은 생애였지만, 그의 음악은 빈을 춤추게 만들었고, 후대 슈트라우스 가문의 토대를 놓았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장례식에서는 아들이 아닌 경쟁자 같은 존재였던 요제프 란너의 지휘로 추모 음악이 연주되었습니다.
시대적 배경과 평가
슈트라우스의 음악은 19세기 중엽, 오스트리아 제국의 영광과 민중의 흥겨움을 동시에 담고 있었습니다. 라데츠키 행진곡은 제국주의 군사 찬가로 태어났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전쟁의 상징이 아닌 희망과 축제의 노래로 변모했습니다.
오늘날 이 곡은 군가가 아니라 “모두가 함께 즐기는 박수의 음악”으로 세계인의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오늘의 시
마지막으로, 슈트라우스와 그의 라데츠키 행진곡을 기리며 작은 시 한 편을 드립니다.
라데츠키의 박수 소리
빈의 겨울, 황금빛 홀에서
북소리처럼 울리는 심장의 박자
전쟁의 피로 쓴 악보였으나
세월은 그것을 축제의 웃음으로 바꾸었다
슈트라우스의 바이올린은 울고 있었지만
사람들의 발걸음은 춤추고 있었다
삶은 때로 고통 속에서 노래를 낳고
죽음조차 그 리듬을 멈추게 하지 못한다
오늘도 우리는 새해의 문턱에서
라데츠키의 행진에 맞춰
희망을 박수친다
추천 감상 링크
https://youtu.be/0rQTe4Nu0nI?si=WtS6w2x_C-5hNDR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