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촌 메가박스의 정문에는 ‘유치권 행사’가 적힌 현수막이 걸려 있다. 건물 안에서 현재 영업 중인 점포는 메가박스 뿐으로, 영화를 보러 온 관객들은 굳이 정문으로 들어가 빈 공간들을 상회하는 대신 승강기로 곧장 이어지는 입구를 통하여 메가박스까지 올라간다.
지난 달 이 공간에서 본 <아사코>는 벌써 얼마간 흐릿해졌다. 인명이나 지명으로부터 인물 간의 대화까지도. 남아 있는 것은 몇 편의 이미지와 일련의 대화뿐이다. 글을 쓰면서 왜 이것들만은 유난히 기억에 남는가 자문하고자 한다. 지나온 것들 중에서도 특히 강렬한 반사광으로 빛나는 몇 가지 파편-이것은 <아사코>가 다루는 주제 중 하나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에게 <아사코>는 아직까지도 영매의 이야기로 읽힌다. 영매란 물론 두 세계를 중계 혹은 중재하는 존재다. 직업이라기보다 소명 혹은 정체성에 가까운 호칭으로 보인다.
국내에 개봉한 <아사코>는 홍보를 위하여 ‘같은 얼굴을 가진 첫사랑과 편안한 연인 사이에서 고민하는 여자’ 식의 줄거리로 요약되고 있으나, 실상 이 영화가 흘러가는 방식은 왕왕 접해왔던 삼각관계 식의 로맨스(닮은 겉면과 전혀 다른 내면을 가진 두 남자, 그 사이에서 고민하는 여주인공)과는 사뭇 다르다. 도플갱어를 통해 관습적인 공포를 자극하는 내러티브들과도 상이한 태도를 취한다. 그러나 영화의 줄거리를 쉽게 요약하고자 시도해보면, <아사코>는 역시 상술한 태도를 좇아가는 로맨스-혹은 성장물로 오인되고 만다. 시도하자면 이렇다. : 첫사랑의 바쿠를 이유 없이 잃어버린 아사코는, 도쿄에 올라와 같은 얼굴의 료헤이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둘의 관계가 순조롭게 발전하듯 보이는 와중 바쿠가 나타난다. 아사코는 선택의 갈림길에 놓인다.
이토록 간단하게 압축되는 서사 속에서, 아사코의 태도는 낯선 질감으로 불거져 나온다. 아사코는 일방적인 헤어짐 이후에도, 바쿠와 료헤이라는 양가적인 존재들을 끊임없이 인지하며 괴로워한다. 끝내 같은 시간대에서 두 사람을 만나는 순간, 축적된 감정은 묵직한 공포로 드러난다.
아사코의 감정은 상대방이 하나의 세계로 치환되는 로맨스 안에서는 쉬이 볼 수 없는 종류의 무거움이다. 그가 고요하게 표출하는 감정들-때로는 감당하기 어렵도록 묵중한 고뇌는 하나의 세계에 버금가는 상대방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상대방을 통하여 들여다볼 수 있는 세계(사회) 자체에 대한 고민처럼 보인다. 상대와 마음을 통하여 관계라는 언약을 맺는다 한들 아사코의 불안은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애초 그의 고통이 연인에 대한 죄책감이나 의심에서 비롯된 것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두 사람 중 한 명만을 선택해야 한다는 초조함에 탓도 아니다. 애초 아사코에게 선택의 여지란 없기 때문이다.
아사코는 ‘선택할 수 없다’. 두 사람 중 한 명을 고르는 형태의 로맨스에서 갈등이 발생하려면, 주인공을 둘러싼 상대방들은 모두 같은 세계, 비록 방향은 다르더라도 동일한 구조의 회로 안에 속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아사코> 속에서 바쿠와 료헤이가 서 있는 세계는 각기 다르다. 마치 흑백영와 컬러영화의 인물들이 서로에게 중첩될 수 없는 것처럼 두 사람은 서로로부터 상이한 세계에 속해 있다. 조금 난폭한 이분법을 끌어온다면, 료헤이라는 현재와 바쿠라는 과거가 만나는 순간 영화는 뒤흔들린다.
물론 이 현재/과거의 이분법을 섣불리 생자/망자의 이분법에 대입할 수는 없다. 영화 초반부, 여러 차례 노골적으로 암시 혹은 환유되는 바쿠의 죽음을 염두에 둬도 마찬가지이다. 만일 바쿠-료헤이의 관계를 지나간 시간-다가온 시간으로 분류할 수 있다면, 이 시간성은 <햄릿>의 유령들로부터 파생된 것이다. 바쿠가 끝내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유령의 현전(선왕과 너무도 닮았으나 결코 선왕 그 자체라고는 말해질 수 없던)이라면, 료헤이는 그 유사성으로 인해 유령으로 인지되었다가 점차 자신의 삶으로 현존하게 되는 형상에 가깝다.
때문에 아사코가 극중에서 가장 받기 쉬운 오해-상냥한 료헤이를 버리고 ‘비현실적인’ 첫사랑 바쿠에게로 달려간다는 것-란 사실상 그에게 영 억울한 상황이다. 같은 얼굴을 가진 이 두 남자 앞에서, 아사코는 결코 합리적이거나 평등해질 수가 없다. 이 명제는 바쿠와 아사코의 만남을 그린 초반부에서부터 드러난다. 이후 유사한 상황에서 등장하는 료헤이와 대조해보면, 그러한 지점은 더욱 극명해진다.
영화의 시작점으로 돌아가보자. 전시에 간 아사코는 어느 쌍둥이의 사진을 들여다보던 중, 등뒤에서 나지막이 흥얼거리는 목소리를 듣는다. 이 때 아사코의 어깨 너머로 비치는 바쿠의 얼굴은 덥수룩한 머리카락에 반쯤 가려졌으며, 그마저도 부분적으로 잘린 이미지로 등장한다. 뒤돌아서 바쿠를 확인한 아사코는 곧 그의 측면과 뒷모습을 마주한다. 바쿠의 뒤를 좇아가던 아사코는 강변에서 노는 아이들이 폭죽을 터뜨리는 순간에야 그의 정면을 마주할 수 있다. 서로를 마주한 순간, 눈이 마주친 두 사람은 응당 그래야 하듯 사랑에 빠진다. 노부의 말처럼 “그런 만남이 어디 있냐” 싶지만, 아사코와 바쿠는 이 관계를 명확히 받아들인다. 그들이 서로를 알기 전부터, 주위의 사람들이 각자의 매듭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에도 마찬가지이다. 바쿠는 이러한 만남들을 “운명”이라고 이름 붙인다.
폭죽을 가로지른 만남, 클럽에서의 싸움, 오토바이 사고 이후의 키스 등. 둘의 연애는 서로의 어떤 망설임 없이 분연하게 진행된다. 이별의 과정 또한 마찬가지이다. 크림빵을 사러 간 바쿠는 밤이 샌 뒤에야 집으로 돌아온다. 아사코는 돌아온 바쿠를 꼭 껴안지만, 이미 그들 사이에는 선명한 틈새가 생겨 버렸다. 그렇기에 더 이상 보여줄 필요가 없다는 듯이, 아사코의 목소리는 얼마 뒤 신발을 사러 간 바쿠가 돌아오지 않았음을 ‘공지’한다. (아사코가 목도한 바쿠의 마지막 순간은 등장하지 않는다)
두 사람의 만남은 현대의 연애사라기보다 신화나 전설의 인연에 까깝다. 반면 아사코-료헤이의 관계는 다분히 현실의 층위에 놓여 있다. 아사코와 바쿠가 성큼성큼 뛰어넘은(듯 기억되고 있는) 과정들을 두 사람은 더듬더듬 밟아 나간다. 모든 사건이 운명처럼 들이닥쳤던 첫 번째와는 달리, 두 번째는 각자의 상황 판단과 협의, 그를 위한 노고가 필요하다.
영화 속 아사코-료헤이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가장 특징은, 료헤이 또한 화자로 기능하고 있다는 데 있다. 바쿠가 아사코의 신비롭고 아름다운 회상으로 그려진다면 (우리는 아사코가 없는 곳에서 바쿠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료헤이는 아사코가 부재한 공간에서도 별개로 존재한다. 그는 다양한 앵글로 말하고 행동한다. 바쿠와의 첫 만남 이전, 관객들은 아사코가 마주하는 오사카의 풍경을 먼저 본다. 반면 아사코-료헤이의 관계에서 우리가 먼저 보게 되는 쪽은 료헤이의 시점이다. 영화가 오사카에서 도쿄로 건너뛰는 순간, 우리는 테이블을 정리하는 료헤이를 먼저 만난다. 잠시 후 커피 주전자를 가지러 온 아사코가 료헤이와 마주친다. 측면이나 뒷모습을 훑기도 전에, 그들은 정면으로 맞닥뜨린다. 여기서 료헤이는 아사코의 처음을, 아사코는 두 번째 바쿠를 들여다본다.
만남 이후에도 아사코-료헤이는 첫인상의 간극을 뛰어넘기 위해 부단히 애써야 한다. 두 사람의 만남은 필연이나 운명의 형태와는 거리가 멀다. 료헤이는 아사코에게 다가가기 위해 그의 주변(마야)에 다가가고, 자신의 주변(쿠시하기)을 데려간다. 관계가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주변(하루요-노부)이 연결되어 있던 바쿠-아사코의 경우와는 사뭇 다르다. 그들은 만나기 위해 노력하고 움직여야 한다.
반면 그에게서 벗어나고자 하는 아사코의 모습은-“당신과 만날 수 없어요, 죄송합니다”-관객들에게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료헤이가 받는 문자와 전화로 아사코의 결심을 접할 뿐이다. 이후 영화는 역시 료헤이의 시점으로 아사코를 찾아 나선다. 료헤이는 함께 연극을 보기로 약속한 마야의 극장으로 찾아가지만, 아사코는 거기에 없다. 그가 대신 만나게 되는 것은 거대한 지진이다. 영화 속 극장이 어둠에 잠긴 채 대지진으로 흔들리는 동안, 극장의 어둠에 앉아 있는 관객들은 흔들림의 소리를 먼저 듣는다. 다음 순간 불이 켜지고 샹들리에가 떨어진다. 아직도 흔들린다는 증언들이 료헤이 주변을 통해 전해져온다. 료헤이가 극장을 나왔을 때, 세상은 한 번 뒤바뀌어 있다.
아사코-료헤이의 관계가 본격적으로 시작됨을 알리는 이 시퀀스에서, 흥미로운 것은 료헤이가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전하는 ‘반응’ 혹은 ‘대답’이다. 주위의 인파가 “지하철은 운행 중지”라고 외치는 관리자의 말을 무시하고 넘어가는 동안, 료헤이는 그의 말을 들은 뒤 전차가 모두 멈췄는지 되묻는다. 울고 있는 여인에게 반응하여 말을 건네고 대화를 주고받는다. 후술할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제외하면, 료헤이는 사실 언제나 비슷한 방식으로, 사건을 직접 일으킨다기보다 일어나고 만 사건에 반응 혹은 대답하는 존재로서 움직인다. 인파 속에 섞여 이동하던 중 다시 한 번 돌아온 아사코를 마주하는 순간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포옹으로 아사코의 귀환에 응답한다.
두 사람이 각자의 귀로를 통해 서로를 마주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다시 아사코의 시점을 만날 수 있다. 료헤이와의 관계를 시작한 아사코는 보다 적극적인 태도로 움직인다. 그는 고양이 진탄을 함께 키우고, 대지진으로 피해를 입은 재난민들을 돕기 위해 매주 센다이에 간다. 이후 그곳에 가는 이유를 묻는 친구들의 물음에, 아사코는 “잘못되지 않은 일”을 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대답한다.
하루요의 등장은 이러한 아사코의 변화에 갑작스럽게 벌어진 사고 같은 것이다. 과거와의 급작스런 연결고리. 하루요는 얼굴이 조금 변했으며 결혼을 했으나, 아사코와는 달리 여전히 과거의 고리를 쥐고 있다. (그 누구보다 바쿠의 행방을 찾아 헤맸을 아사코보다, 별다른 관계를 구축하지 않았던 듯 보이는 하루요가 바쿠의 현재를 알고 있음은 기이한 만큼 설득력을 갖는다)하루요를 만난 순간 아사코는 자신의 등 뒤에서 번득이는 전광판을 들여다본다. 거기에는 카메라 속 이미지와 목소리로 되돌아온 바쿠가 있다.
전광판의 광고라는 이미지 속 바쿠를 들여다보기 전에 ‘원본’이라는 단어를 우선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물론 그만큼 ‘복제’라는 단어의 위상도 주요해진다. <아사코>에서 원본이란 무수한 복제본의 원전을 뜻한다기보다, 각자의 삶에서 ‘가장 먼저 만난 것’이다. 어떤 삶에서나 찾아오는 수많은 첫 번째. 혹은 첫 번째들의 첫 번째. 이를 ‘전형’이라는 단어로 설명할 수도 있겠으나, 아사코가 처음 료헤이를 바쿠라는 인물에 덧댄 얇은 종이 위로 테두리를 베껴 그린 그림(트레이싱)처럼 대하며 불편해하던 시간을 기억하자면, <아사코>의 첫 순간들은 보다 형상적인 ‘원본’이라는 단어에 더 알맞다.
<아사코>의 영제는 <ASAKO∣&∥>(이 때 ‘원 앤 투’는 1과 2가 아닌 하나의 작대기로 표시되는 ∣와 그것이 마주보거나 나란히 선 ∥로 형성된다.)이며, 일본어 원제는 <자나깨나 아사코>이다. 영화의 시작점에서 아사코의 첫 번째이자 원본이며 ∣(어쩌면 ∥까지 모두 통틀어도)는 반드시 바쿠로 통한다. 아사코가 아침 여섯 시에 일어나 가장 먼저 찾는 존재는 바쿠이며, 사고 직후 먼저 손을 더듬어 확인하는 존재 또한 바쿠이다. “처음에는 바쿠와 같은 얼굴이라 관심을 가졌지만 이제는 그 자체로 좋아한다”는 료헤이는 결코 바쿠와 같은 출발선에 놓일 수 없다. 두 번 째가 태어난 순간부터 첫 번째를 따라잡을 수 없듯이. 선형적인 시간 속에서는 언제나 ‘먼저’ 만난 바쿠가 원본이며, 그와 동일한 얼굴의 료헤이는 복제 또는 트레이싱적인 존재로만 인지된다.
이는 아사코가 도무지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혹은 통속적인 “통제할 수 없는 사랑”에 매어 있기 때문이 아니다. 로맨스 속 ‘짝사랑을 할 때, 거리의 군중 속에서 상대방과 비슷한 얼굴을 열명쯤 찾아낼 수 있는’ 화법과도 다르다. 료헤이와 바쿠의 유사함은 아사코의 트라우마로부터 비롯된 게 아니다. 료헤이는 정말로 바쿠와 닮았다. 이것은 영화 내내 보여지는 분명한 사실 중 하나다. 갑자기 만난 하루요의 말문을 멎게 할 만큼, 직장 동료들로부터 몇 차례 얘기를 들을 만큼, 무엇보다도 그 스스로가 유사성을 인지할 만큼 서로 닮았다. 첫 번째와 닮은 두 번째인 그는 한없이 원본을 의식할 수밖에 없다.
바쿠의 경우는 전혀 다르다. 그는 두 번째를 의식하지 않는다. 그는 그 자체로 충분한 원본이면서도, 원본 특유의 광채로 여러 가지 복제(전광판의 광고와 CF)로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한다. 그는 보이지 않을 때도 자신의 휘광을 뻗는다. 료헤이의 얼굴에서, 아사코와 하루요의 기억에서, 무엇보다 아사코의 침묵을 인지하는 관객 속에서. 바쿠의 존재가 없었다면 아사코-료헤이의 만남조차 없다. 바쿠-아사코-료헤이가 상술한 삼각형의 관계에 대입될 수 없음도 이 때문이다. 굳이 그들 간의 관계 묘사해야 한다면 그것은 거의 족보나 호적처럼, 바쿠라는 인물로부터 파생된 아사코-료헤이라는 관계도로 그려져야 할 것이다.
돌아온 바쿠는 우선 카메라-미디어를 통한 이미지-유령으로 화면에 등장한다. 바쿠가 아직 이미지의 유령으로 남아 있는 동안, 아사코는 사뭇 담담히 그에게 대처한다. 료헤이에게 비밀을 털어놓고 사과를 구한다. 새로이 옮길 집을 결정한다. 하루요와 함께 바쿠를 만나러 간다. 바쿠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검은 차창에 손을 흔든다. 이 과정에서 바쿠는 순조로이 과거로써 아사코의 삶에 자리매김하는 듯 보인다. 분명 많은 것의 근간을 마련했으나 지금 와서는 자주 흐릿해지는 유년기의 기억들처럼.
그러나 바쿠는 아사코의 결심을 직접적으로 깨부순다. 두 사람의 첫만남 이후 바쿠는 다시 한 번 직접적인 발걸음을 내딛는다. 몇 해의 시간이 지났어도 아사코는 한 순간에 바쿠를 구별해낸다. 료헤이를 처음 만난 순간 몇 차례나 “바쿠?”하고 되묻던 모습과는 퍽 상반되는 순간이다. 첫 번째이자 원본, 그리하여 현재 사랑하는 두 번째들을 만들어낸 근간-바쿠가 손을 내민다. 이 순간 바쿠는 헤어진 연인보다는 망령에 더욱 가까운 존재로, 실체가 아니어서 무력하지만 그렇기에 더욱이 강렬한 힘으로 아사코를 잡아당긴다. 영매로써의 아사코는 그 손을 잡을 수밖에 없다.
죽었으나 부활한 것, 동시에 완전히 소생하지 못한 것. 돌아온 바쿠는 텅 비어 있다. 료헤이의 현재가 과거-미래로 이어지는 힘을 쥐고 있(는 듯 보여진)다면, 바쿠의 현재는 흐릿한 잔상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바로 그렇기에 아사코는 바쿠를 따라 나선다. 바쿠가 “나의 대체제는 얼마든지 있다”며 핸드폰을 버리는 순간, 아사코 또한 핸드폰을 저 뒤로 던져버린다. 료헤이에게 남기는 말이란 고양이 진탄을 잘 부탁한다는 한 마디 뿐이다.
생자와 망령 중에 후자를 택하는 연민은 어떤 것일까. 아사코는 바쿠의 옆자리에서 되뇌인다. 자신이 달라진 줄 알았으나 실은 변한 게 없으며, 그저 긴 꿈을 꾼 느낌이라고. 아사코는 마침내 첫 번째의 곁으로 되돌아왔다. 그는 유일무이한 원본이자, 자신의 ∣이자 ∥ 옆에서 살아갈 결심을 다진 듯하다. 그러나 우리가 엿볼 수 없는 아사코의 잠(관객조차 엿볼 수 없는 아사코의 가장 내밀한 순간) 이후 다시 한 번 상황이 뒤바뀐다. 어슴푸레한 새벽 속 그들은 센다이에 도착해 있다. 깨어난 아사코는 료헤이에게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이유를 묻는 바쿠에게 아사코는 답한다. “바쿠는 료헤이가 아니야.” 그 순간 원본과 복제, ∣와 ∥는 무너져 내린다.
이유는 명징하다. 상술했듯이 아사코에게 A와 B 중 하나를 고를 수 있다는 식의 선택 따위는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바쿠와 료헤이는 같은 출발선에 선 적이 없다. 료헤이에 대한 사랑이 바쿠에 대한 마음보다 더 커져서라거나, 료헤이가 첫 번째 또는 원본의 위치를 탈환했기 때문이 아니다. 두 사람을 하나의 집합으로 묶을 수 없음을 알아차렸을 뿐이다. 바쿠와 료헤이 모두 그들 자체, 고유의 집합이며, 서로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을 체감한 것이다. 바쿠와 료헤이 모두 아사코에게 있어서는 상이한 첫 번째일 수밖에 없다. 서로 닮지 않은 얼굴들을 마주할 때면 너무나 명료한 이 사실을, 아사코는 센다이의 새벽에서 깨닫는다.(이는 각자 다른 시기 아사코의 단짝이었던 하루요와 마야가 자연스럽게 세 사람으로 대화할 수 있는 순간과는 사뭇 대비된다. 아사코는 하루요와 마야를 원본-복제의 관계로 나누지 않는다) 바쿠는 바쿠로서의 첫 번째, 료헤이는 료헤이로서의 첫 번째이며, 아사코는 언제나 첫 번째인 현재를 살아가야 한다. 둘은 서로를 대체할 수 없으며 그것은 어떤 상황에도 불가능하다. 아사코는 달리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귀환 이후 아사코가 취하는 태도는 이전과 전혀 다른 성질이 된다. ∣과 ∥, 자거나 깬 순간 모두를 가지고 살아가기로 결심한 아사코는 사과로 한 순간을 마무리 짓지 않는다. 대신 그것을 지고 살아가기로 결정한다. 함께 살아간다는 허울 좋은 말 뒤로 나타날 온갖 누추함을 매 시 매 순간 지고 가겠다는 뜻이다. 료헤이가 처음으로 꺼낸 부정적인 말(“더러운 강이네”)에 대한 아사코의 응답(“그렇지만 아름다워”)는 그 용기의 또렷한 반영이다.
<아사코>의 많은 장면은 자주 비애로 가득하다. 나에게 특히 힘겨운 이미지들은 영화 후반부, 아사코가 노부의 집을 방문하는 과정에 모여 있다. 여기서 아사코는 오래 전 바쿠와 요란하게 춤을 추던 노부를 만난다. 그는 루게릭병으로 인해 눈꺼풀밖에 움직이지 못한다. 바쿠의 말을 듣고서야 고향으로 돌아간 아사코는, 비로소 현재의 노부를 마주하게 된다.
나는 <아사코>에 대한 현재의 노부를 “엄마와의 성공적인 분리에 실패한 그는 엄마와 잠시도 떨어질 수 없는 유아 상태로 퇴행”으로 묘사하는 기존의 비평에 동의할 수 없다. 낯선 질감과 분위기를 끊임없이 뿜어내는 이 영화중에서도, 노부의 질병은 가장 급작스럽게 나타나는 비극이다. 여기에는 어떤 개연성도 타당한 원인도 없어 보인다. 그러나 본디 재앙이란, 혹은 질병이란 그런 것이다. 자연적 또는 물리적인 인과 속에서 진행될 수야 있겠으나, 의미론적인 형태로는 선결을 맺지 않는다. 행여 픽션이 영화의 모든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는 형식이라 하더라도, <아사코>는 픽션의 의미들을 인과응보의 맥락으로 구분 짓는 작업이 아니다. 지진이 누군가의 잘못으로 생겨나지 않았으며, 아사코가 어떤 애정을 보여준다 해도 바쿠의 행방불명을 막을 수 없었듯이, 노부의 질병은 다른 인간사의 비극처럼 전조 없이 찾아온다. 아사코는 앞으로도 자신을 평생 신뢰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의 곁에서 삶을 보내며, 노부와 그의 어머니는 차차 늙어갈 것이다. 누구도 감히 이들의 삶에 대해 어떤 판단이나 확신을 가질 수 없다. 그렇기에 아사코는 과거에 작별인사를 고하거나 영영 분리하는 대신에 말한다. “(또) 다시 올게.”
영화가 끝나고 메가박스의 승강기에 올라타는 순간, 사면의 유리를 통해 덩어리진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아직 극장의 어둠에서 덜 빠져나온 터라 눈을 잠시 감고 있었다. 메가박스 앞은 황량하고, 날씨는 아주 맑았다. 극장 벤치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데 누군가가 뱉어놓은 침 자국이 보였다. 벤치 옆에서 연인 한 쌍이 큰 소리로 싸우고 있었다.
결코 서로의 우울과 불안을 짐작할 수 없다는 유의 말은 너무 쉽다. 동시에 우리는 알고 있다. 타인과 지내는 순간 찾아드는 그 수많은 하찮음 혹은 누추함(배설물과 악취, 내가 모르는 새 옮겨진 나의 사물 혹은 감정들, 무엇보다 셀 수 없이 반복될 권태)은 모두가 견뎌내야 할 짐이라는 말도. 우리는 여전히 서로에게 가 닿기 위한 힘이 필요하다. <아사코>의 가장 큰 힘은 비극이라고 뭉뚱그릴 수 있는 사건-행위들을 연결짓고 이해하려는 몸짓에 있다.
영매靈媒는 산 것과 죽은 것을 매개한다. 아사코는 두 개의 땅을 모두 다녀왔다. 앞으로 그의 ‘또’ 혹은 ‘다시’는 더 이상 첫 번째나 두 번째, 원본이나 복제로 치환될 수 없다. 아사코는 이제 매순간 각자의 얼굴로 나타나는 세계를 일일이 고유한 이름으로 부르며 살아가기로 결심했다. 이름들을 서로로 매개하면서, 왔던 길을 매번 다른 마음으로 되돌아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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