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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ni Mar 16. 2020

<로맨틱 머신>(2019)을 보고


 지난주 금요일 종로구 인디스페이스에서 이소정의 <로맨틱 머신>을 보았다. 이 작품은 한국예술종합학교 방송영상과의 졸업 상영회의 한 회차로 진행되었는데, 당일 GV에서 들은 바로는 극장의 음향 시설이 열악하여 충분한 오디오가 지원되지 않았다고 한다. 

(영화의 배경음악은 밴드 유기농맥주의 멤버 '고우'가 맡았다)


 <로맨틱 머신> 속 쇼트와 쇼트를 묶는 가장 고리는 물론 빛인데, 카메라가 녹화하는 광학의 영역 그 자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영화의 압도적인 첫 장면-물결에 반사되어 흔들리는 빛이 점점 거대해져 마침내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은 이 연결고리에 대한 선언이다. <로맨틱 머신>의 빛은 영상의 어둠에서 관객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지표가 되었다가, 영상의 시공간을 압도하는 움직임으로 머무르고, 곧이어 스크린 자체로 변화한다. 내러티브에 기반을 두고 말하자면 빛 자체가 인물이며 사건이고 곧 배경인 셈이다. <로맨틱 머신>에서 빛이 서사의 대항-대안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명암의 대비를 극대화한 이미지의 유사성-'국경 없음'의 세계에 가까워 보이는 바다에서 벌어지는 온갖 빛의 움직임을 엔진 삼아 나아갈 뿐이다. 그럼에도 빛이 인물이나 사건 혹은 배경으로 느껴지는 것은, 이 영화가 영상 매체의 내외에서 다뤄지는 빛의 독보적인 성질에 탐닉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로맨틱 머신>은 "영상 매체에서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자 바탕인을 빛"이라는 주장 아래 세계를 전개한다. 빛은 영화 속에서 어둠이고 그림자이며 형태이자 시각 그 자체, 빛은 보여지는 자체인 동시에 객체가 보여지도록(드러나도록) 하는 근원이기도 하다. <로맨틱 머신> 안에서의 '어둠'은 빛의 반대어가 아니다. 영화에서 '빛'이 존재하지 않는 순간은 영화가 시작되지 않은 바로 그 때다. 텅 빈 스크린이 극장의 어둠 속으로 일순 감춰지고, 영사기가 돌아가며 최초의 빛이 스크린을 되살려낸다. 이 지점에서 스크린은 공간을 채우는 새하얀 막에서 생물적인 행태로 진화한다.

 일찍이 인상파의 화가들이 증명했듯이, 어떠한 명도도 절대적인 기준점은 될 수 없다. 사물을 응시하는 짧은 순간에도 우리는 포착할 수 없이 빠르게 변화하는 빛의 질감을 마주친다. 대중 문화의 미디어에서 드러나는 사물들이란 물론 (뭉뚱그려 말하자면) 낮의 빛 속에서 드러나는 형태를 보다 분명한 본질로서 등장하는데, 이 때 어둠 속의 사물이란 빛에 의해 드러나기 전 준비 단계 정도가 된다. 속내가 밝혀지기 전의 미스터리로 취급되는 것이다. '정도'로서의 색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빛 속에서 모든 게 확실해진 세계” 역시 마찬가지이다. 매 시간 달라지는 빛 속에서 혹은 각자 조건이 다른 시야 속에서 형태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러나 이미지가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유통되는 시대에서 선호되는 빛 혹은 어둠은 분명히 존재한다. 예컨대 내가 가장 자주 사용하는 카메라들은 같은 시공간에서 완전히 다른 질감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데, 그들 내부에서 세계는 제각기 다른 명도로 읽힌다. 파나소닉 캠코더는 태양이 잘 뜬 낮에서는 훨씬 입체적으로 세계를 인식하고, 볕이 거의 들지 않는 실내 혹은 밤에는 자잘한 픽셀들의 흐름을 거칠게 찍어낸다. 여행 사진 촬영을 위해 구매한 니콘 쿨픽스 카메라의 경우에는 야간 촬영 모드가 아닌 이상, 어두운 공간에서 찍은 사진들은 짙은 자주색과 밤색이 섞인 덩어리처럼 나타난다.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를 사용한 이후 내 눈은 꾸준히 나빠져서 해질 무렵 세계를 흐리고 납작한 형태로 인식한다. 멀리 적힌 글자를 읽지 못하는 건 물론이고 가까이 있는 빛 덩어리는 십자 형태로 굴곡진다. 영화를 볼 때도 마찬가지여서 요새는 극장의 앞자리를 좀 더 선호한다.

 <로맨틱 머신>은 바로 광학 그 자체에 집중한 덕에, 이처럼 스크린 속의 형태가 어떤 빛의 질감으로 나타나는가에 대한 의심을 (물리적으로) 대폭 줄인다.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관객이 보게 되는 형태는 몇 가지로 압축된다. 해변의 바위, 정자亭子, 수산시장 입구, 창문과 그 너머의 그림자 등이다. 거기에 등대가 있다. 등대는 우리가 흔히 보게 되는 방식, 즉 수평선 너머의 불빛이나 하나의 건물이 아닌 그 내부의 기계적 설계로 나타난다. 고우의 노이즈와 함께 돌아가는 톱니바퀴나 렌즈의 움직임은 빛들의 다양한 움직임 사이로 불현듯 나타나 작동한다. 기계가 돌아가는 순간을 확인할 때마다 관객은 이제껏 보아온 수많은 빛들이 바로 저 등대로부터 나온 것이며, 우리는 그 기록을 본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해변에서 밤낚시를 하는 사람들의 숏은 이 사실을 단면적으로 보여준다. 헤드랜턴-빛을 이고 다니는 사람들은 바위와 바다가 거의 구분되지 않게 캄캄한 공간을 누비고 비춘다. 그 순간 비춘다는 뜻은 상대적일 뿐만 아니라 절대적이다. 카메라 너머에 있었을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지점을 보기 위해 머리를 돌려야 했을 것이고, 그들의 이마에 달린 랜턴은 목표점을 비추며 원하는 형태로서의 세계를 빛으로 들어낸다. 드러내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들어서 내보인다. 기록된 영상을 보는 관객들은 그 순간 두 개의 빛을 본다. 하나는 인물의 머리에서 발현하는 광원이고, 다른 하나는 거기서 뻗어나간 빛이 대상과 맞닥뜨려 흐트러지는 움직임이다. 랜턴이 내쉬는 빛은 대상의 형태에 따라 굴곡을 그린다. 빛 또한 대상과 맞닥뜨리는 순간 변화하는 것이다. <로맨틱 머신>의 빛은 물질을 비추는 절대적 손짓이 아닌, 외부와 만나면서 일그러지는 생물성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어둠, 즉 ‘빛-없음’으로 정의되는 상태 또한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저 사물들의 세상 속에서 충분히 일렁이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내가 영화의 ‘빛’을 인물과 사건 또 배경으로도 읽고자 한 바는 그 생물성에 있다.


 빛과 물질이 만나고 그들이 서로를 변화시키는 과정은 종래에 스크린을 가시화하는 과정으로 연결된다. 관객은 처음 스크린에 나타난 밤의 형태가 물결로 찰랑이다가 빛의 덩어리에서 스크린으로 환하게 밝혀지는 장면을 본다. 이후에 따르는 빛의 움직임과 등대의 구조가 오프닝 시퀀스의 과정을 증명한다. (갑작스러운 형상과 색이 드러나는 수산시장의 LED 장면이 부담스러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장면에서 세계는 빛과 물질이 만나서 사물로 드러나는 과정을 너무 빠르게, 이전과는 다른 리듬으로 나타난다.) 물이나 바위 또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수많은 사물들을 가로지르던 빛은 마침내 하나의 형식으로 스크린에 도착한다. 화면이 일순 환해지는 순간 관객들은 눈을 가늘게 뜨고 얼굴에 쏟아지는 빛을 맞는다. 이소정 감독의 말처럼 “스크린이 등대이자 광원이 되는 순간”이자 영화가 꾸준히 주장하던 논리가 관객의 신체로 직접 출현하는 방식이다.

 영화는 등대의 안팎을 넘나들고 목적의 경로를 따라 나아간다. 그 과정에서 카메라는 관객에게 등대를 전달하는 또 다른 머신인 동시에, 빛과 맞닿는 사물이다. 동시에 모든 영화가 그렇듯이 이 영화 또한 카메라로 들어오고 변화한 빛의 기록이다. <로맨틱 머신>은 그 과정을 적극적으로 인지하기 위해 빛의 기본적인 성질을 긴 시간 움직임으로 담아내며 스스로를 구분 짓는다. 이 구분점으로 인하여, 나는 영화를 만든 사람들이 밤의 해변에서 시시각각 변화하는 빛을 잡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과정을 상상할 수 있다. 그 순간에도 등대로부터의 빛은 그들의 신체와 부딪쳐 또 다른 형태로 바뀌고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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