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장 등록 1일 차의 기억(feat. 초보 운전자)
그날은 아침부터 분주했다. 미리 챙겨둔 수영 가방을 굳이 다시 열어서 확인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작은 방수 파우치를 열어 수영복과 수모, 수경을 확인한 뒤 굳이 손으로 OK사인을 만들어 본 다음 수영 가방에 넣었다. 목욕 바구니 준비 OK. 화장품 파우치도 준비 OK. 아차차, 어제저녁에 쓰고 넣는다는 것을 까맣게 잊어버린 다이슨 드라이어를 화장대에서 낚아채 수영 가방에 욱여넣었다. 더 이상 빈 공간 없이 두둑해진 수영 가방을 힘차게 들고, 떨리는 손으로 차키를 집어 들었다. 수영 가방은 힘차게 들고, 차키는 왜 떨리는 손으로 집어 들었을까? 수영은 설레지만, 운전은 떨리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나는 장롱면허 탈출을 위해 엊그제 운전 연수를 마친 초보 운전자였다.
집에서 수영장 주차장까지는 차로 10분 거리였다. 사실 강습날 전 주말에 남편과 아이를 태우고 집 주차장에서 수영장 주차장까지 연습 삼아 다녀와 보기도 했었다. 그런데 그날은 마트와 함께 사용하는 지하주차장과 지상주차장 중에 지상주차장만 들어가 한 바퀴 돌고 나왔었기 때문에 지하주차장 경험은 없었다. 그래서 강습 첫 날도 지상주차장만 생각하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지상주차장 입구까지 어찌어찌 도착했다. 그런데 지상주차장 입구를 막아둔 것이 아닌가. 작업복과 안전모를 쓴 한 남성분이 차로 다가와 한 달 동안 지상주차장 공사를 할 예정이니 그동안은 지하주차장을 이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져 차를 버리고 도망가고 싶었다. 차를 버리고 도망을 갔다면 무척 민폐이긴 하겠지만, 참 재미있는 이야기를 쓸 수 있었을 텐데 차마 그러진 못했다. 대신 울듯한 표정과 목소리로 "선생님, 제가 초보 운전이라서요. 지상주차장은 올라가 봤는데 여기 지하주차장은 어떻게 가야 할까요?" 내가 초보 운전이란다. 나는 초보 운전이 아니라, 초보 운전자다. 다행히 내가 인복(이라고 말해도 될까?)이 있어서인지 친절한 작업자분을 만나 그분의 안내에 따라 지하주차장에 안전히 입성했다.
적당한 자리에 주차를 무사히 마치고, 브레이크를 밟은 상태로 기어를 N에 놓고, P버튼을 누르고 시동을 껐다. 와, 대박.
드디어 수영장 안내 데스크 앞에 섰다.
"안녕하세요. 저 오늘 첫 강습날인데요."
쭈뼛거리는 손으로 등록 카드를 내보였더니, 직원분이 카드를 낚아채 바코드를 태깅했다. 카드를 다시 받으려고 내민 손에는 꼬불꼬불 빨간 어묵 같은 줄에 열쇠가 달린 팔찌가 놓여있었다.
"탈의실에 들어가서 이 번호 사물함을 쓰시면 돼요. 꼭 비누 샤워 후에 수영복 착용하시고 수영장에 입장해 주세요."
여긴 해수욕장이 아니다. 워터파크도 아니다. 실내 수영장이다.
해수욕장에 샤워하고 입수하는 사람은 없을 것. 워터프루프 마스카라와 립틴트까지 바르고 사진 찍기가 필수인 워터파크가 아닌, 이곳 실내 수영장은 입수 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완벽 샤워 후 입장할 수 있다. 그런데 사전 지식이 없는 초심자들은 워터파크에 갈 때처럼 집에서부터 수영복을 착용하고 온다던지, 샤워는 스킵하고 물기 없는 뽀송뽀송한 상태로 수영장에 입장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나는 사전에 인터넷 수영 카페를 통해 '수영장에서 지켜야 할 에티켓'을 정독한 모범 초심자이다. 전날에 머릿속으로 그려본 루트대로 하나씩 퀘스트를 수행한 후 샤워실과 연결된 통로로 수영장에 입성했다.
풍덩. 찰싹찰싹. 습한 공기와 웅웅 울리는 말소리와 숨소리.
낯선 공간이 주는 설렘과 긴장감 즐기며 자유 수영 레인에 발을 슬쩍 담갔다가 미끄러지듯 쑥 들어가 보았다. 차갑다. 손으로 물을 살랑살랑 저어 보는데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꽤 좋았던 것 같다. 초급 레인은 수영장 입구에서 가장 안쪽이라는 것도 등록할 때 들었기에 내 눈은 계속 초급 레인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오늘 처음이세요?", "아, 저도 처음 왔어요."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아닌가. 그래서 냉큼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려 최대한 무해한 얼굴로 웃으며,
"저, 저도 처음이에요. 안녕하세요."
그렇게 30대, 40대, 50대인 우리 셋은 수영장 초급반 동기가 되어 1년이 지난 지금까지 수영 친구로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11시. 초급반 레인으로 옮겨가 강사님의 구령에 맞춰 스트레칭을 했다. 나와 수영 동기 두 명은 스트레칭이 끝나는 대로 처음 왔다고 강사님께 소개해야지 하는 마음을 다잡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다들 뒤를 돌아 우르르 몰려오는 것 아닌가. 이게 무슨 일이지? 영문을 몰라 어리바리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 같은 반 선배님이 체조 후에는 수영장 레인을 한 바퀴 도는 것이라고 했다.
물에서 걷는 것이 이렇게 힘든 일이었나? 다른 사람들은 웃으며, 대화하며, 점프도 뛰면서 물살을 헤치고 잘만 나아가는 데 말이다.
'오오, 역시 선배님들 한낱 미물인 저도 조만간 선배님들처럼 자유롭게 물살을 가르는 날이 오겠죠?'
한 바퀴 다 돌고 오니, 강사님께서 오늘 처음인 사람들은 앞으로 나오라고 했다.
'드디어 나도 수영을 배우는구나!'
첫 수업을 요약하자면 세 가지 순서로 진행되었다.
1. 수영장 벽면 타일에 걸터앉아 발차기
2. 벽 잡고 물속으로 잠수하기(=물속에 얼굴 넣어 보기)
3. 벽 잡고 다리를 뒤로 쭉 뻗어 엎드려 발차기
하루에 세 가지나 배우다니! 강습 첫날은 입수하지 않는 곳도 있다고 하던데 벌써 물속에서 발차기를 하다니! 나 이러다가 한 달 만에 자유형 할 수 있는 것 아니야? 응, 아니다. 그 후로 킥판을 놓고 자유형 발차기를 하기까지 무려 세 달이 걸렸다.
11시 50분. 약속된 50분이 지나자 강사님 주위로 둥글게 모두 모였다. 스무 명 가까이 되는 초급반 회원들이 수영복만 입은 헐벗은 몸으로 촘촘히 포개졌다. 강사님을 필두로 모두 손을 모아 파이팅을 외치고 샤워실로 후다닥 뛰어 들어갔다.
샤워를 마친 가벼운 몸과는 다르게 마음 한편이 무거워진다. 나는 주차장에 가야 한다. 차를 버리고 갈 순 없으니까. 그런데 뭔지 모를 자신감이 미약하게나마 느껴졌다. 올 때도 잘 왔으니까 갈 때도 잘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수영도 배우는 사람인 걸? 물속에 얼굴을 넣고 발차기도 했다고!
시작이 반이라고 했던가? 아니다. 시작이 전부다. 왜냐하면 끝이 없으니까.
자유형을 할 줄 알면 끝일까? 아니다. 배영, 평영, 접영이 기다리고 있다. 접배평자를 할 줄 알면 끝일까? 아니다. 다양한 드릴(영법 개선을 위한 동작 훈련)을 통해 조금 더 바람직한 자세를 만들어 간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말에 더 힘을 싣고 싶었다. 시작하지 않고, 언제든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 속에 있지 말고 시작해 보라고 말하고 싶다. 시작만 하면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하게 된다. 그러니 나는 나를 믿기만 하면 된다.
시작을 하고 나를 믿어 보았더니,
"운전할 줄 알아요."
"수영이 취미예요."
이런 말을 서슴없이 할 수 있게 되었다. 운전도 시작했으니 이제 할 줄 아는 사람이고, 수영도 시작을 했으니 취미가 된 것이다. 운전을 잘하지 못해도, 남들보다 수영 실력이 빠르게 늘지 않는다 해도 말이다.
그리고 지금은 글쓰기를 시작했다.
시작은 했고, 이제부터는 나를 믿어볼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