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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김 Jun 23. 2016

전화번호

사랑과 우정의 어느 기로에서


내게는

잊히지 않는 전화번호

두 개가 있다


하나는

나의 오래 벗이고

다른 하나는

나의 오랜 사랑이다


오랜 벗의 번호를 누를 때는

하고 싶은 이야기 한아름 안고

수화기 너머 속 음성을 기다린다


오랜 사랑의 번호를 누를 때는

혀 끝에 걸린 보고 싶다 네 글자

열렬한 그리움으로 음성을 기다린다


어느 날

오랜 벗은 자신의 사랑을 향해

떠나갔고 번호를 바꾸었다


그리고 어느 날

오랜 벗은 자신의 사랑을

홀로 보냈고

바뀌어 버린 번호로 연락을 해왔다


오랜 벗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없었다


다만 보고 싶다고


나의 오랜 사랑은

아무 말이 없었다


사랑한다고, 보고 싶었다고 수없이 말하고 싶었어.



 어떻게 생각하면 우리는 참 단순한 관계였다. 아니면 적어도 내 입장에서는 그렇다. 내게 있어서 너는 오랜 벗이었고, 오랜 사랑이었다. 힘들 때 가장 기대고 싶었던 사람이 너였고 네가 힘들 때는 꼭 안아주고 싶었다. 사랑이 줄 수 없는 부분을 너에게서 얻었고 우정이 줄 수 없는 부분을 너에게 바랬다. 너는 내게 꼭 사랑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아마 네가 분명한 사랑이었다면 나는 너에 대해 잘 몰랐을 것이다. 신비로울 것이고 항상 환상이 내 시야를 가렸을 것이다. 우리의 일부분은 친구로서 교감했기에 나는 너를 진실되게 볼 수 있었다.

 어느 날, 너는 사랑을 찾아 떠난다고 했다. 평소 조심스럽고 익숙함에 가장 큰 편안함을 느끼는 네가 사랑을 찾아 떠난다고 했을 때 나는 놀랐다. 괜히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또 네가 내게 그 말을 한다는 것은 친구로서 응원을 부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너의 바람대로 나는 너를 응원했다. 그것도 가급적 진심으로. 말했듯이 너는 내게 친구이기도 하니까.


사랑을 향해 가는 동안 많이 아플 수도 있어. 그래도 도망치지 마. 아프더라도 걸음을 멈추지 마. 그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건 너의 눈으로 확인해봐. 그리고 이해가 되고 인정이 되면 되돌아와. 돌아와서 너의 이야기를 들려줘.

 나의 응원을 마지막으로 우리의 대화는 한동안 단절이었다. 너는 번호를 바꿨다. 너의 용기 있는 선택에서 나타난 행동의 변화였다. 10년 넘게 한 번호만 사용하던 네가 번호를 바꾸다니. 전화기 안에 수없이 저장된 번호를 뒤로하고 너는 너와 그 사람만을 생각한 것이다. 혹시나 상대방이 상처를 받지는 않을까 늘 눈치를 살피며 전전긍긍했는데 이렇게까지 당돌하게 행동하다니 한편으로 기특하고 한편으로는 서운했다. 전화번호를 바꾸고 나서 전에 네가 한 얘기가 떠올랐다.


나는 늘 정열적인 사랑을 꿈꿔. 지금의 내 삶이 많이 권태롭고 단조로운 거 알아. 지금의 상황을 구원해줄 수 있는 건 정열적인 사랑밖에 없다고 생각해. 한 번쯤은 많은 것을 잃는다 해도 무모하게 도전해 보고 싶어.

 그래. 사실 너는 나의 응원을 필요 없었다. 내게 사랑을 찾아 떠난다고 말했을 때 나의 응원을 바란 것은 아닐 것이다. 너는 이미 결정했으니까. 단지, 내게 사랑을 찾아 떠난다고 말한 것은 내가 놀라지 않기를 바라는 너의 배려심이겠지. 아무 말도 없이 떠난다면 나는 분명 너를 걱정할 거니까. 나를 아는 너의 작은 배려심이겠지.


 3년이 지났을까. 친구들 중 한 놈씩 결혼하는 사람이 생기고, 이제는 어엿한 직장인으로서 사회 푸념을 늘어놓는 놈이 생기기도 하고, 노는 것도 조금씩 지쳐가던 어느 날, 전화기에 모르는 번호가 나타났다. 모르는 번호지만 한 번에 알 수 있는 번호. 너와 그 사람의 생일이 조합된 번호 뒷자리. 언젠가 분명히 전화가 올 거라 생각했다. 그것이 내일이든, 한 달이든, 일 년이든, 십 년이든. 그런 너는 3년이 조금 지난 어느 날 내게 전화를 했다. 나는 태연하게 전화를 받았다. 태연한 척한 것이 아니라, 정말로 태연했다. 예정되어 있던 일이 일어난 것이니까. 3년 만에 듣는 너의 목소리는 조금 깊어졌다. 대화 중간 사이 있는 침묵은 그동안 네가 지내온 3년이란 시간이 어땠는지 조금은 알 수 있었다. 약간의 침묵도 못 견뎌하고 발을 동동 거렸었는데. 3년이면 긴 시간인데 별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없었다. 그 시간 동안 어떤 궁금증이 쌓이지 않았나 보다. 그래, 우리가 만날 것을 알았기에 네가 지내온 그 시간들은 너의 가슴속에 고이 묻어두면 되는 것이다. 너의 과거는 너만 알면 되는 것이다. 다만 나는 네가 보고 싶다.


보고 싶다


 이 말을 했을 때 네가 어떤 표정을 했을지 상상이 간다.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보조개가 살짝 들어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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