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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Apr 04. 2024

길 찾기 미션

나의 길치력을 상승시켜주는 제주식 길안내

나는 소문난 길치다. GPS와 네비게이션의 도움 없이 어떻게 길을 찾아갈까 싶을 정도의 방향치. 갔던 길을 기억 못 하는 것은 기본이요, 이 지역이 대충 어느 쪽에 해당하는지 그런 건 염두에 두지 않는 성격이다. 나보다 더 스마트한 핸드폰에 의지해서 처음 가야 하는 장소는 어찌저찌 찾아갈 수 있겠으나 폰을 뺏어버리고 다시 한번 찾아가 보라고 한다면 글쎄? 난 아마 발 밑이 꺼지는 허망한 기분을 느끼며 주인 잃은 강아지처럼 여기저기 정처 없이 헤매고 있을 테다.


3년 넘게 같은 장소로 출근하면서 매일 차량 네비게이션에 최근 목적지 검색을 누르는 내게 회사 동료는 ‘세상 똑똑하게 생긴 아이가 진짜 희한한데서 바보처럼 군다.’고 말했다. 그 점이 바로 인간적인 면모라고 스스로를 포장하고 매력포인트로 삼고 있기는 하지만 숨길 수 없는 단점이기는 하다.

 

그런데 주소로 이야기해 줘도, 큰 건물 위주로 설명해줘도 주변을 둘레둘레 돌아 겨우 찾아갈만한 이런 내가 제주에 와서 살게 되었다. 제주도는 도로명이 없냐고? 번지수가 없냐고? 물론 있다. 스마트폰이 있으면 어찌저찌 기술의 도움을 받아 찾아갈 수는 있다. 정작 문제는 대중교통을 탈 때, 그리고 제주 지인을 만날 때 발생한다.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제주에 도착한 첫 날, 회사에서 마련해준 사택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초행길이라 겁이 무척 났던 나는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숙소의 이름을 기사님께 말씀드렸다.

“안녕하세요? 기사님, *홍*리안 아파트로 가주세요.”

“아 예. 그 문화칼라사거리 지나서 마씀?”

“네? 아, 제가 처음 가보는데라서요~.”

“거기 신제주 맞지예?”

“네? 신제주요?”

“거 해태동산 지나서 왜 그 문화칼라 사거리, 거기서 우회전 해서 말하는거 아니우꽈? 앞에 그**스 호텔 있고.”

“저 진짜 하나도 몰라요. 기사님.”

그때 이 몸이 얼마나 무서웠는지 그대들은 모를 것이다. 지명을 이야기하시니 아는 척 해야 하나? 모른다고 하면 멀리멀리 빙빙 돌아서 엄청난 택시 요금 바가지를 씌우시려나? 아무것도 모른다고 어디 멀리 아닌 곳에 내려주시면 어쩌지? 머리 속에서는 엄청난 상상이 제멋대로 활개를 치고 돌아다녔다. 다행히 이것 저것 물어보시던 기사님은 이내 포기하셨는지 정확한 주소명을 불러달라고 하시곤 네비게이션에 입력하셨고, 덕분에 무사히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중에 그 사거리가 문화칼라 사거리라는 걸 알게된 나는 무척 의아했다. 어떤 장소가 해당 구역의 랜드마크여서 그 일대에 이름을 붙이는 것은 이해한다. 서울에는 양재에 뱅뱅사거리가 있기도 하니까. 하지만 적어도 뱅뱅사거리는 버스 정류장 명에서도 뱅뱅사거리라고 써있다. 왜 뱅뱅사거리인지는 알 수 없는 사람이라도 그냥 정류장 명이 뱅뱅사거리니까. 여기 오면 뱅뱅 도나? 하는 의심을 가지면서도 다 여기가 거기인지 아는 것이다. 그런데 문화칼라 사거리는 아니었다. 어디에도 문화칼라 사거리라고 쓰여있지 않았다. 문화칼라 사진관을 발견하기는 했다. 그런데 그 사거리의 랜드마크라고 하기에는 뭔가 턱없이 부족하게 느껴졌던 것이었다. 회사 제주 분들에게 여쭤보니 옛날에 그 곳에 아주 크게 문화칼라 사진관이 있었다고 했다. 필름 카메라 사용률이 낮아진 오늘날에는 아주 작은 사진관으로 변해버렸지만 말이다.

 

문제는 문화칼라 사거리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회사 셔틀을 타야 하는데 정류장을 기록해 놓는 명칭 중에 ‘코스모스 사거리 앞’이라는 곳이 있었다. 모든 것이 낯설었던 나는 네*버니 카*오맵이니 이곳 저곳 코스모스 사거리를 검색해 댔다. 그 어느곳에도 코스모스 사거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혼자 왕따가 된 기분이었다. 여기 아주아주 유명한 코스모스 밭이 있는 것일까? 제주 사람들은 다 알지만 나는 모르는 코스모스 사거리? 불행해진 나는 기어가는 목소리로 회사 선배에게 여쭤볼 수 밖에 없었다. “선배님, 죄송한데 코스모스 사거리는 어디에요? 코스모스가 예쁘게 피는 곳이 어디에요?” 내 말을 들은 선배는 얘는 뭔가... 싶은 의뭉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금새 박장대소를 하며 말했다.

“아 거기는 옛날 코스모스 호텔이 있던 자리야. 코스모스는 한 송이도 안피어 있어. 그러니까 거기가 지도에서 어디냐면...”

 

너무하지 않는가? 후배에게 물어보니 93년생인 그녀, 자신도 코스모스 호텔을 본적이 없다고 했다. 태어나기도 전에 없어진 곳인데 이미 태어난 이후 그곳은 모두가 코스모스 사거리라고 불렀다고 한다. 제주에는 이렇게 아직도 옛날 지명을 가지고 길을 안내하거나 약속장소를 정한다. 만약 내가 극극극극 내향형인 사람이었다면, 물어볼 용기도 없는 아이였다면, 나는 결국 코스모스 들판을 찾지 못해 택시를 잡아타고 회사에 갔을 거다.

 

그 밖에도 제주인들의 특이한 길 안내 방식에는 한라산 방향과 바다 방향이 있다. 약속 장소를 찾아가려는데 어디인지 몰라서 전화를 걸면 오리지널 도민들은 흔히 이렇게 이야기 한다. “거기서 보이는 건물이 뭐야? 아파트는 뭐있는데? 아 그럼 거기서 한라산 방향으로 쭉 걸어와. 그러다가 ** 건물 보이면 서쪽으로 꺾으면 될켜.” “아 너무 올라갔다. 바다방향으로 쭉 내려오다 보면 동쪽에 **마트 보여. 거기서 다시 전화하라.”

 

선생님들... 한라산 방향이요? 바다 방향이요? 서쪽, 동쪽 이라니요? 레벨 1도 안되는 저에게 도대체 무슨 미션을 주시는 겁니까? 저런 주문 아닌 주문을 들을 때마다 나는 길 바보인걸 들키는 것 같아 마음이 덜컹거린다. 기실 바보인 것은 팩트니까 그렇다 쳐도, 오늘 안에 그 곳에 도달할 수는 있을까 걱정에 눈 밑엔 현무암보다 더 진한 그늘이 생겨버리는 것을!

 

제발 도민들이여... 차라리 주소를 찍어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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