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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um Mar 07. 2021

엄마의 페르소나

02_  상처는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외할아버지는 막내인 엄마의 탯줄을 끊고 다시 전쟁터로 나가고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였다. 그렇게 외할아버지 얼굴도 모른 채 피난 중에 4살인 엄마는 전쟁의 심각성을 모르고 또래 친구와 놀다가 날아오는 총알에 친구만 죽고 살아남았다. 홀로 외할머니는 자식들을 키우지만 막내인 엄마를 장녀인 큰 이모한테 맡기고 돈을 벌러 다른 지방으로 가서 살았다고 한다. 엄마는 중학교 때부터 큰 이모집에서 살았는데 모든 집안일을 도맡아 하면서 식모 생활을 했다고 한다. 엄마는 늦둥이로 큰 이모와는 20살이나 차이가 났다. 중학교 사춘기 시절을 그것도 부모가 아닌 큰언니한테 상처를 받고 그분이 나이 들어 독거노인이 되어도 도와주기보다는 87세 돌아가시기 전 막내 이모랑 방문을 해서 살아갈 날이 며칠이 안 남은 누워계시는 큰 이모한테 물어봤다고 한다.

“언니. 그때 왜 그랬어? 난 중학교밖에 안되었었잖아.”

큰 이모한테는 아무답도 듣지를 못하고 그다음 날 부고 소식만 전해 들었다.

 큰 이모의 자녀들은 엄마랑 나이 차이가 안 나지만 엄연한 이모인데 조카들은 엄마의 하는 행동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큰 이모의 뿌린 씨앗은 당신의 자녀들도 돌아보지 않게 하고 돌아가시기 전 잠시 들르기만 하였다.


상처는 또 다른 상처를 채운다

그냥 덮고 지나온 엄마는 상처를 없애기 위해 본인이 어떤 노력을 해야만 해야 했을까. 당신의 어머니로 인한 가난이 너무 싫어서 선택을 했던 것이 돈이었던 것이다. 돈이 자신을 지켜주고 행복을 준다고 믿어 엄마의 삶의 기준이기도 하다. 아버지의 부재로 사는 홀 어머니의 가난한 생활은 장녀인 큰 이모의 억 척스럼으로 살아갔으리라 유추를 해보지만 자기 막내 동생인 나의 엄마를 식모로 부릴 만큼 피폐한 마음이었을까 생각을 해보았다. 나의 엄마는 그렇게 공부를 할 기회를 많이 놓치고 야간 고등학교를 큰삼촌의 도움으로 겨우 들어가게 되었다. 그것도 가정이 넉넉지 않았던 삼촌네 가정에서 보내주지를 못해 못 들어갈 뻔했다.

지금도 열등감이 있다고 하는 것이 그것 때문인 것 같은데 70대 중반이시지만 여전히 영어공부를 하고 계신다.  난 그런 엄마를 어릴 적은 훌륭하게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안타깝지만 지금은 아니다.

관계에서의 정서적 공감대나 인과관계의 순리에 따르는 사리판단을 하는 것을 언제나 그르치기 때문이다. 영어공부가 열등감을 없애준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음공부를 하였다면 지금의 엄마 인생은 새아버지가 떠나갈까 봐 불안하지 않고 마음이 풍요로워서 자식들과 행복해하셨을텐데 말이다. 가치관의 기본인 시시비비를 따지는 과정을 왜 살면서 대화로 만들어가지 못하였을까..

본인의 가치관을 다른 가족들이 맞춰가기를 원하면서 어린 자식들이나 성인이 된 자식들의 생각이나 의견은 항상 무시하고 결정하고 본인의 생각을 주도하면서 상대방에게 당신의 허물을 부끄러워하시는 분이다.


사랑으로 허다한 허물을 덮어야함을 왜 아직도 모르시느냔 말이다


지식은 인간의 무지를 해결해 줄 수는 있어도 풍요롭게 해 주는 건 아니다.

엄마의 가치관은 경제적 가치관이 제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랑 싸웠던 이유가 이것이었고 당신 어릴 적 외할머니의 무능력함으로 가난한 삶으로 고통을 당했다고 생각해서 상대적으로 부자가 되자고 입을 악물고 삶을 사셨다. 항상 입버릇처럼 말을 한다. 가난이 싫다고 가난은 죄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엄마의 삶에서 자수성가로 자리 잡은 경험이 당신의 가치관으로 자리 잡았는데 자식들에게 본인의 역사를 정말 다분히도 자랑을 했었다.

반면 당신의 지난 과거의 남편에 대한 복이 없었음을 무게를 실어 우리들에게 원망과 증오로 언제나 토해내었다.


엄마가 새 남편과의 삶을 선택하고 난 서울에 갔고 20대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신앙생활을 시작으로 찾은 나의 광명과 같은 인생이 귀하고 또 애틋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인간의 존엄성을 깨닫게 되고 나의 가족들의 고통들이 가슴으로 느껴지게 되었다. 내가 가장 먼저 어그러진 관계를 바꾸고자 개선시키려 다가갔던 사람은 나의 엄마이다.


나의 어릴 적 육체나 정신적인 자양분으로 만족해야 했던 것이 커서 보니 반쪽짜리 인간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어른 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대면해야 하는 것이 결핍과 온통 감당해야 하는 부조리들의 씨앗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를 위한 연민의 시간이 쌓여 시간이 지나 난 나를 측은해해야 하는 시간이 사치스럽다고 여겼다. 왜냐하면 내가 받은 여러 어그러져 있던 형태들의 상실감과 이질감 등 감당할 수 없는 쓰나미 같은 파동들은 내가 다른 모습으로 된다면 없어지는 형체가 없는 존재들이라서 그것들에 나의 귀한 눈물들로 에너지를 허비하기 싫어서였다. 내가 미성년에 채워져야 하는 당연한 것들을 못 받았다고 하소연하는 그런 시간들을 다른 시간들로 채워보기로 한 것이다. 가족관의 관계로 인한 행복이 없었던 나의 인생에 단절된 아버지와의 관계의 자리를 엄마가 채워줄꺼라

기대를 했던것이다.

진정한 마음 독립을 하게 되는 과정에는 혼란의 연속이었지만 그것을 유유히 받아들이고 하나씩 나 자신을 들여다보며 벗겨내서 연고를 발라줘야 하는 것들 먼저 살펴보기로 한다.

모든 상황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라는 진리를 받아들이고 나에게 닥치고 있는 모든 상황들에 유연해지기로 한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표면적인 자아를 페르소나라고 했다. 페르소나는 가면이라는 뜻인데 말 그대로 페르소나는 우리의 본질적인 자아가 아니라 외적인 형태일 뿐이고 시시때때로 달라지는 것이다. 이 페르소나를 진정한 나 자신으로 착각하지 않는다면 사람들 사이에서 오는 스트레스들에서 좀 더 자유로워질 수 있다. by 칼 융


난 나의 지금까지의 모습이 페르소나로 인해 혼란과 괴로움으로 나의 눈을 가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의 내면의 본질적인 모습을 되찾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한 문제라 엄마와 떨어져 있는 나만의 공간과 생활에서 나를 위해 살아가면서 20대 먼저 나와의 관계를 개선해보았다. 성인이라고 어느 정도의 나에게 허락된 자유의지와 밀려오는 경이감에 선뜻 제대로 누리지도 못하는 그런 사람이라는 걸 난 서울에서 새로 사귄 친구들한테 들키기가 싫었었다. 여전히 난 감추고 살아가는 나 자신에 실망을 느끼고 나 자신의 본질을 찾아서 죽자고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죽어버린 나의 자아를 찾아서 난 처절하게 상심하였고 처절하게 아파하였다. 가족들에게 감추는걸 당연한 거라 가르치는 엄마의 페르소나가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독일에 가고 얼마후 엄마가 60살이 되던 해 더 이상의 경제활동을 중단하고 아버지와의 여행으로 살기 시작했다.

한 번도 해보지 못한 해외여행이 꿈이었다며 독일에 있는 우리들에게 오셨고 올 때마다 동생집에서 3개월을 머물면서 유럽을 돌아다니며 여유로움을 느끼며 이제껏 느껴보지 못했던 경험으로 당신의 삶에 여행의 흔적들을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얼굴에는 이젠 그늘보다 웃음이 일고 원망보다 감사함을 고백하고 여유롭고 유머러스한 새아버지의 여자로서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다.

그래서 상처를 잊어버리고 건강을 지켜가며 그들만의 노년을 본인들의 마인드대로 풍요롭게 만들어가고 있었다. 

사람에게서 받는 여유로움은 사실 오래 못 간다.

엄마는 금방 찾은 여유로움이 정말 본인의 것인 줄 알고 지나온 과거들을 비틀기 시작한다.




“너희 성을 바꾸어서 얘기해도 되잖아. 아님 너희 이름을 얘기하지 마. 여기 사람들은 내 남편이고 너네들이 우리 친딸인 줄 아는데.”

“어머. 독일에서 유학 중이고 그때 얘기했던 이 권사님 따님이세요? 너무 예쁘시네요? 너무 닮았어요.”

“이 권사님, 어떻게 힘들게 두 분이나 독일 유학을 보냈어요? 너무 대단하시네요.”

오랫만에 한국에 와서 엄마 교회를 가기전 태어나 가진 이름을 같이 살고 있는 남편과의 서류도 정리되지 않은 채 살고 있는 새아버지와 엄마의 자존심을 위해 가지고 있는 성을 다르게 말하라는 것이다. 순간의 상황은 모면할 수 있지만 꼭 그렇게 해야만 할까요? 라고 되물어보지만 본인의 페르소나가 들킬까 봐 겁을 먹고 있었다.

이상했다.

독일에 올 때마다 3달 동안의 동생 교회나 나의 교회에서의 한국인과의 만남과 인사들이 너무 태연했기 때문이다. 한번 보고 말 사이의 사람들에게의 본인의 모습이라 나와 동생 친분관계에 있는 사람들은 개의치 않은 듯하다. 독일에서 6년 반만의 한국으로의 오랜만의 한 달간의 휴가 때 엄마 교회를 한두 번 가다가 도저히 안 되겠기에 난 멀리 있는 다른 교회로 참석하게 되었다. 새아버지는 혹시 사람들이 말을 걸까 봐 상황에서 피해 혼자서 어디론가 피해있었다.


엄마의 머릿속 가상세계에서는 당신의 희생과 하염없는 풍성한 사랑으로 우리들을 독일까지 유학시킨 그런 엄마로 사람들 사이에는 만들어 놓고 있었다.


독일에 오셨을 때도 내가 다니는 교회나 일하는 곳의 사장과 사람들은 항상 물어봤다.

“선, 너네 아빠 맞아? 안 닮았는데...”

“저희 엄마랑 같이 사시는 새아버지예요.”

난 나의 홈그라운드의 바운드 라인에서의 친분을 가지는 사람들에게는 당당하게 말을 했다. 내가 당당해야지 그분들도 당당해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나의 이런 행동에 엄마나 아버지는 불편했겠지만 곧 적응하고 본인들의 여행에서 좀 더 나은 기쁨을 찾아 시간을 보내셨다.

한국이나 독일이나 나이가 드신 분들은 그렇게 남의 가정사를 궁금해하시고 대답을 안 하면 온갖 추측으로 불편한 나의 심기 안에 진실이 나올 때까지 집요하게 물어보시는 사람이 있었다.

“선아. 너네 부모님 맞아? 넌 자는 시간 말고 그렇게 힘들게 일하고 공부하는데.. 그때 아파서 휴학까지 했잖아.. 너네 부모님이 좀 안 도와주시니?”

“....”

난 아무런 대답을 못한다. 왜냐하면 다른 유학생들 부모님들은 당신 자식들이 힘들게 일하며 공부하는 게 안쓰러워 독일에 단 한 번도 온 적이 없는 주위 친구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난 부모님의 여행에 물어보는 사람들과 더 이상의 말은 하기 싫어했다.

과거를 왜곡시켜 현실을 만들어 불안으로 오지도 않는 미래를 만들어갈까?

피에로처럼 가면을 쓰면 그것이 연극 같은 무대일 터인데 무대 뒤의 진짜 얼굴을 마주 대하는 것을 두려워 하는걸까?

그렇게 하면서까지 과거의 당신의 현실을 부정하기를 원하는 전형적인 인간의 양면성이다.

노년의 풍요로움은 그렇게 물질이 가면을 만들어줬듯이 가면 속 얼굴까지 바꿀 수 있을 거라 착각한다.




“미야, 선이가 어릴 적 훈이한테 당했다는데 정말 그게 사실이니?”

“선이 언니, 엄마가 언니가 어릴 적 사촌오빠에게 성희롱당했던 것을 다시 나에게 물어보더라. 너무 어이가 없어서 그걸 꼭 확인해야만 믿겠냐고 했어.

한 번은 사촌 오빠가 독일에 있는 나에게 SNS로 친구 신청을 했길래 동생한테도 했나 해서 물어보니 되어있었다. 기겁을 하고 얼른 친구 끊기 하고 연락 오면 받지 말라고 이르고 엄마한테 물어봤더니 돈이 필요하다고 돈을 빌리려고 전화가 왔다고 했다. 난 어릴 적 내가 당한 것을 조심스럽게 알리고 사촌오빠와의 관계를 끊어달라고 하고 엄마의 반응을 살폈다.

“선아, 정말이니? 정말 그런 일이 있었니? 훈이를 믿었지. 그때는 엄마가 미안해,”

난 초등학교 2학년 한방에 자고 있던 중학교 사촌오빠와의 불미스러운 상황을 마주 대하고 다음날 없어진 사촌오빠의 행방을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다. 엄마는 앞으로 발생될 아이들이 받을 상처나 정체성에 대한 사리분별력이 부족하니 그나마 똑똑한 아빠가 사촌 오빠를 나가게 한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엄마는 사촌오빠에게 직접 물어봤고 발뺌하는 오빠의 말에 나를 의심해서 동생한테 한 번 더 물어봤던 것이다.

거짓과 같은 가면 페르소나의 삶은 자식의 아픔의 고백까지 의심해 생각보다 더 당신 자신을 피폐하게 만들어가고 있었다.




“선아, 장례 화장비 500만 원 들었어.”

나의 친아버지이자 엄마의 전 남편 화장을 내가 독일에 있었던 때 돌아가신 아버지를 화장해주시고 대신해주고는 한국에 와서 물었던 나에게 100만 원이라는 돈을 5배로 얘기했다.

변명과 거짓말이 일상인 페르소나들의 삶에 “왜 그랬어요”라는 나의 질문은 언제나 더 큰 목소리로 자신을 변명하기 바빴다.

“원래 변명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거야.”



“미야가 제일 잘 났으니 도와준 거잖아. 그리고 지방 4년대 나와서 어떻게 사회생활을 하냐. 그래서 유학까지 보내줬어.”

새 아버지와 엄마는 절규하는 나의 얼굴에 말하였다.


동생만 거두기를 원했던 당신들의 선택을 받아들이면서 난 서울에서 상실감에 죽을 고비를 넘기고 끝까지 버텨가면서 조금이라도 바뀔 줄만 알았던 인간의 습성을 기대했던 것이 나의 에너지 낭비였다.

그럼 전문대 나온 언니와 나의 인생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전문대 나온 것이 잘못된 것이라 필요하지 않으면 버림받아 세상에서만 받아도 너무 버겁고 괴로운데 울타리가 되어줘야 하는 집안에서까지 당하니 나의 에너지는 언제나 바닥이었다.

자랑스럽게 여기지는 않았어도 건강히 잘 커줬다며 마음의 여유를 되찾았을때 가족이라는 울타리로 묶여있다고 위로 한마디 해주는 넉살도 없으면서 왜 이제야 나이 들었다고 효도와 세상의 잣대를 들이밀면서 자식에 대한 도리를 요구하는 것에 이제는 의연하게 그런 말들을 지나쳐 버린 게 된다.



“진이는 4년제 나왔잖아.”

“진이 언니도 전문대 나왔어요. 나와서 우리는 바로 돈을 벌었고 동생을 위해 학원비에 엄마와 같이 생계비를 책임졌어요.”

엄마는 언니까지 4년제 나온 사람으로 같이 살고 있는 남편에게 거짓말을 하고 제일 미덥지 않은 나는 제일 못났으니 미워해도 된다고 악담과 당신의 변명과 거짓말을 그렇게도 합리화시켰다. 엄마는 그런 거짓말이 언제 들통날까 봐 새아버지에게 말을하지 말라고 언제나 입단속을 시켰었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라는 말은 모든 부모에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거짓말은 타인의 아픔까지는 이해하지 못한다. 언제나 나한테 선의의 거짓말은 나쁜 게 아니라는 엄마에게 소리쳤다.

“미야를 뒷바라지했던 이유는 엄마의 희생과 사랑이 아니라 엄마가 미야와 결혼할 배우자를 선택해서 남들한테 으시대려는 마음에서 미야한테 그렇게 투자를 하셨냐고요. 다른 자식들이 받아야 하는 박탈감과 우리들이 느끼는 엄마와의 괴리감이 눈에 안 보여요?”

“선아. 너희들을 버리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해. 너희 엄마는 나 아니었으면 벌써 죽었을 거야. 처음 만났을 때 불쌍해서 너희 엄마랑 살기로 결심했어.”

“새아버지... 미야나 진이 언니한테는 그런 얘기 하지 마요. 상처 받으니깐.”

단 한 번도 결혼하지 않았던 자식이 없던 새아버지는 본인의 엄마에 대한 그리고 미야를 거둔 것에 인정이라도 받고 싶어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엄마랑 살고 있는 아버지는 인생을 당신 스스로 선택했으니 책임도 지셔야 함에 혼란이 생겨버리셨는지 엄마와는 다른 여자 사람에게 눈을 돌릴 때쯤 난 당신들의 인생을 관여치 않기로 했다.

새아버지는 그렇게 뒷바라지했던 미야가 독일에서 결혼해서 나름 만족하면서 잘 살고 있지만 엄마와의 관계의 단절로 1년에 몇 번 필요에 의한 소식 말고는 없게 된 것에 본인의 희생이 회의감이 들었던 것이다. 엄마는 자식 때문에 결혼을 한 번도 안 한 남편을 만난 것에 언제나 죄인 아닌 죄인이라고 피해자처럼 살고 계시며 열등감에 예전의 전 남편보다 나으니 살고 있다고 말하였다. 예전 50살의 엄마는 두 번째 남자의 여자가 되기 위해 아이를 바라보지만 엄마의 자궁의 생명은 이미 끝난 상태에 괴로워하면서 새아버지의 회의감은 자기 자식이 없어서 그런거라고 잊지도 않는 상황과 생길수 없는 일들을 상념하였다.


난 그때 20대 언저리 남자로 인한 씻을 수 없는 상처로 위로보다는 엄마의 단죄함으로 나의 존재는 부정당하였다.

어떻게 해서든 벗어나기 위해 그래도 20대라 젊어서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에너지로 서울로 가기로 한다.


엄마는 동생을 소유물로 여겨 인생 주도권을 뺏으려 하는 도구가 돈이었기 때문에 난 서울과 독일에서의 삶부터 철저하게 경제적 독립과 마음 독립을 철저하게 실천해 나가기로 한다.

회사에서 잘리고 꼬꾸라져 허덕일 때 엄마는 당신의 엄마에 대한 도리라면서 다음에 갚으라고 돈을 준다. 난 그것을 갚으면서 살다가 바보 같다는 생각에 나도 폭발을 한다. (26장의 편지 이야기는 곧 적을 생각입니다.)



여유로움이 생긴 60대 막바지를 살고있는 엄마는 엄마로서의 인생보다 여자로서의 인생이 더 중요해 선택한 삶에 자식들의 효도를 요구한다.

꾸역꾸역 상처 눌러가며 살아왔던 나의 진심으로 공경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효도는 안된다는것을 고백했다. 단절된 관계가 대화로 안되는 것에 더 이상의 에너지를 낭비할 수는 없었다. 엄마의 옆자리는 새아버지가 있으니 같이 산 날에 정이라도 있으니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리라 생각해본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살고 계시니 말이다.

예전 돌아가신 아버지를 엄마에게 잊게 해 주셨으니 감사하다는 말은 다음에 하기로 한다. 엄마의 페르소나의 성향은 상대방의 약함에 그 강도가 더 세짐을 느끼고 진심에 담긴 나의 마음을 줄여야 함을 느낀 것이다.


엄마가 외출한 어느 날 난 새아버지에게 미야의 선택에 대해서 이해해달라며 어릴 적 얘기를 해주었다.

“선아, 너희 엄마한테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어.”

나의 말 때문에 상황이 변하거나 감정이 바뀌는 것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70대를 바라보는 길녁의 삶을 두분이 다시 한번 돌아보는 기회를 드리는 마음에 난 우리 가족의 총체적 난국에 나의 삶의 주도권을 지키기 위해 나의 입을 떼기로 한다.


2014년 난 독일에서 6년 반 만에 오랜만에 엄마 집에 왔지만 독일 집을 그리워하며 휴가를 보내고 있다. 둥지가 없는 한국이 불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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