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uum Mar 06. 2021

나의 아빠는 저장강박증이다

01_ ego는 지나치기로 한다

집단주의 가치관을 지향하는 한국인으로 익숙한 문화와 개인주의의 가치관을 지향하는 독일의 문화와의 간극은 언제나 나를 긴장하게 한다. 하지만 가치관을 배우려 변화된 삶을 지향하려는 나의 의지는 스펀지처럼 흡수를 하고 균형을 이루며 배워보려 한다. 수업시간은 언제나 토론으로 진지하여진다. 구체적인 본인의 생각을 중시하는 그런 토론 문화는 개인주의 문화에서 야기된 귀중한 가치체계이자 문화이다. 한국과는 사뭇다른 그런 독일 문화에 지퍼가 채워져 있던 나의 입은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1분동안의 발언을 하는것도 제대로 못해서 나의 생각이 전달될 것인지가 못미덥고 자신이 없으니 아예 1시간30분을 칠판만 뚫어져라 보기만 한다. 전형적인 주입식 교육의 병폐의 현상이다.

히틀러가 과거 독일의 주입식교육의 희생자라고 생각해 전쟁후 독일이 제일먼저 바꾼 제도적 정책이 교육적인 분야다. 창조적 교육이 인간과 사회를 풍요롭게 해준다는 그들의 용기와 결단은 교육현장에서 개개인의 잠재력을 끌어내준다. 한번 상처입은 개인주의 가치관이 창조적 교육을 낳은것이다.




우리집의 가장인 돌아가신 아버지는 법을 전공하면서 학교에서도 인정을 받은 수재였다고 한다. 머리가 좋아 집안에서도 장남인 아빠를 위해 고모들과 삼촌은 친할머니의 강요로 원하지도 않는 돈벌이를 하면서 아버지는 혼자만 그 시대에 대학을 나오고 동생들의 박탈감을 무시된채로 살았다. 대학때 그 시대 독재체제에 맞서 가방안에는 책보다는 돌맹이로 꽉 채워져 데모를 하며 민주주의를 위해 정의 구현을 위해 싸웠다. 그렇게 정의감으로 살고 있던 어느날 길을 지나가다 심장병으로 쓰러져 죽을고비를 넘기고 겨우 졸업한 졸업장이지만 건강상의 이유로 군대를 면제받고 적응 할줄 알았던 회사에서 밀려나 힘들었다. 집단주의 사회적 제도에서 세상에 아빠는 버림을 받았고 엄마는 허우적대는 아버지를 위해 서울에서 부산으로 이사를 와서 어린 두 아이를 데리고 스스로 기반을 잡기로 한다.

고학력을 가진 사람들이 쓰임받는 사람으로서 사회나 타인에게 유익한 영향력을 주는 삶은 그렇게 쉽지는 않다.


성공을 하기 위한 발판이 학력이고 스펙이듯이 교육이 인간을 만들어 준다고 믿게끔 하는 제도의 방식이 주입식 교육의 단면일 것이다. 머리가 좋으면 사회에서는 그 사람을 추켜세우고 가정에서도 추켜세우고 그것이 자기의 모습이라 착각하고 자신이 제일 잘났다는 생각에 겸손보다는 교만함으로 인해 영향력보다는 자기안의 꿈틀거리는 미련함과 추악함을 마주대할수도 있다는 것이다.


과거 우리 아버지는 법대를 나오셨으니 학교에서 내준 숙제를 몰라 가져가 물으면 대답이 거침이 없으셨다. 하지만 지식을 삶에 적용시킨것이 아니라 거기에만 머물러 책속에서만 당신의 자아를 유지시키기에 가정이 단절된 위기도 아랑곳 하지 않으셨다. 가족의 울타리는 가장인 아버지 책임이 크다는 것을 보기좋게 반박하시면서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그 어떤 울타리 만드는것을 거부하셨던 사회적 가치관이라고는 일도 없으셨던 분이셨다.

예전 나의 언니는 맏딸로서 처음으로 아빠에게 대든적이 있었다. 20살이 되던해 아버지의 가치관에 반기를 들었다. 세상에는 세상에 맞는 이치가 있는법인데 이치에 맞는 행동을 해야한다는 것을 아버지를 상대로 얘기를 했고 아버지는 충격을 받으셨는지 장문의 편지를 언니에게 적었었다.

“진아 너의 행동이 너무나 충격적이구나. 대학생이니 이제 너의 가치관을 가져야한단다. 너의 생각을 존중하지만 변하지 않는것은 부모에 대한 효도다. 부모에게 효도해야한다. 효도, 효도, 효도..


반복적인 효도라는 글들은 그 의미가 무색할 정도로 많이 적혀져 있었다.

내가 지키려는 가치관안에도 효도는 아주 중요하다. 하지만 아버지가 보여줬던 삶에는 어디에도 효도는 없었다. 친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아버지는 그자리에 가지 않았다. 장례식에 가보라고 엄마에 의해 등떠밀려 갔지만 정작 방황만 하다가 그 자리에는 참석하지 않았던 것이다. 고모의 다급한 전화에 엄마는 오빠 벌써 출발했고 도착할 시간이 훨씬 넘었다고 했지만 아빠는 당신의 아버지의 마지막 가시는 길을 기여코 참석하지 않으셨다.

본인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안좋아 자식인 우리한테도 단 한번도 친할아버지에 대하여 말을 하지 않으셨다. 한량으로 세상을 떠돌아다니면서 가정을 돌보지 않고 나이들어 장남 집에 왔지만 엄마는 반가워 하지 않았다. 친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상속절차에서 친할아버지의 집은 장남인 아버지를 제외하고 몰래 다른 동생들이 나눠가졌지만 아빠는 아무런 말도 못하고 경제적인 수입은 엄마에게만 의지하는 양반집 도련님 행사를 품위를 지키려하시며 살으셨다. 치매와 정신강박증을 앓고 계시는 친할머니는 난 살면서 아빠에게 단 한번도 들은적도 없고 가족이라 소개받은 적도 없다.

본인의 저장강박증을 숨기려는 것이었을까?


<참조> 선아, 아빠 돌아가셨어


돈 한푼이 아쉬운 그런때라 엄마는 노발대발 하였고 왜 상속분이 하나도 없냐며 그때부터 고모와의 잦은 싸움과 삐거덕 거림이 아빠와의 싸움으로까지 번지기 일쑤였다. 그렇게 나의 아빠는 무능력하고 외골수에 어른으로서 대처해야만 하는 사리분별력이 제로인체로 삶을 살았었다.


집단주의 가치관으로 우리들에게 이론만 가르치려는 것이었을까..

아님 당신이 아버지의 역할을 잘하고 있다고 존경받아야 하는 그런 어른이니깐 그런 말을 하신걸까.

아님 우리를 위해 단지 부모라는 이유만으로 돌보지 않은채 자식의 노여움과 아내의 괴로움을 뒤돌아보지도 않으면서 제도상의 이유로 그런 말을 하신 걸까.

우리 사회의 예의범절이니 결혼을 해서 시부모님들에게 효도를 해야하는 걱정으로 그런 말을 하신 걸까.

부모가 자식에게 끼치는 영향은 말로 되는것이 아님을 똑똑한 아빠는 정말 모르고 그런 말을 하신 것일까

자식은 부모의 등을 보고 자란다는 것을 무시하고 말로만 하면 된다는 것을 기대했던 것일까..

젊은 시절 국가와 사회의 정의를 구현하려 시시비비를 따져 가치관으로 싸웠던 본인의 그 패기와 용기는 어디 있느냐 말이다.


시대의 관습에 얽매여 고질적인 병폐를 수정도 안하고 변하지 않는 아빠는 그것이 옳다고 여기고 지키기로 한 모양이다. 시대가 바뀜에 유연해져야하는 것을 난 아빠로부터 배워야 했다.


독일에서 난 한국에서 가지고 온 인터넷 전화로 두세달에 한번은 아빠에게 전화를 해서 안부를 확인했다. 잘 살고 계시냐고. 통화는 길지 않았다.

한번이라도 전화를 하게되면 나의 에너지는 바닥을 치고 그 어떤 대화도 되지 않고 자식들의 안부보다 본인의 삶을 한탄해하면서 엄마를 원망하고 언제나 비관적이었다. 엄마처럼 새 삶을 살수도 없는 의지박약인 삶을 고수하시는 아빠가 참으로 안타까웠다. 우리 가족은 이미 깨졌고 돌아갈수 없는것을 정말 모르고 무엇을 그렇게 기다리며 쓰레기만 모으는것인지..


“아빠 미야 결혼해요“

“아빠 진이 언니가 암에 걸려서 수술했어요.“

“아빠 저도 독일에 공부하러 왔어요.“

“....“


모든 돈을 움켜쥐고 사시면서 혹여 돈 얘기를 할까봐 아빠는 항상 대답 대신 침묵이었다. 예전에 언니가 몸이 안좋아 결핵을 앓았을때도 당신의 유전자를 닮아서 미안하다고만 말뿐인 그런 가장이다.


“여보 합의 이혼을 해요. 세금으로 3000만원을 내야하는데 당신이 합의를 해주면 이 돈으로 독일에 있는 자식들 생활비라도 쓰게 해줍시다. 어떻게 자식들한테 돈을 한푼도 안써요?”

“.....”

결국은 엄마는 내지 않아도 되는 세금을 냈고 아빠는 당신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3000만원짜리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으셨다. 그러면서 하는 말은 끝까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선이까지 독일에 보냈기 때문에 이혼서류 도장찍어 주는거야.”

아빠는 우리가 집을 떠나고 당신돈 십원도 쓰신적이 없다. 잘못된 가치관이 그것이 사랑이라고 착각하고 살아갔던 한 사람의 인생을 난 자식으로서 이해가 안되니 관조하면서 다르게 판단내리기로 한다. 내가 본 서울에서의 아버지 가족들의 삶과 현재의 아버지의 삶을 관찰하면서 정신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을 가정하고 유추하고 판단해 어떤 증상인 강박증을 공부했다. 우연히 심리학과를 전공하는 어떤 사람과의 대화끝에 서로의 아버지 상태가 너무 닮아있다는 것을 알고 난 아버지의 저장강박증을 의심해보기로 한다.


아빠가 저장강박증이라면 이런행동들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언제나 아빠를 원망하는 엄마에게 아빠를 이해를 하려고 하지 않아야 함을 강조하였다. 아버지는 전형적인 저장강박증 환자였다. 가족들이 함께 살고 있을때도 지나치게 절약하려는 정신이 고스란히 생활속에 우리들을 교육시키고 있었다. 화장실에서 휴지를 재사용하라는 것, 화장실 물을 내리지 말라는 것등 악취로 인한 비위생적인 교육이 절약이라고 가르치며 급기야는 밖에서 쓸만한 물건들을 가지고 오기 시작했다. 떨어져 살면서 가끔 집에 가면 발 디딜틈이 없었고 악취가 진동을 하는데 세척을 안해 누가 봐도 더러운 그릇에 먹을것을 내오시는걸 보면서 가슴이 찢어진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안되겠다고 버릴려고 하면 고래고래 소리치시며 화를 내시는 아버지의 집안 물건은 그렇게 쌓여만 갔다. 어느날 초등학교에서 경비원으로 일하신다고 하길래 집에 가는것보다 낫겠다싶어 학교로 간적이 있었다. 경비원이니 방 하나를 사용하고 계셨는데 그 공간도 쓰레게 더미였고 그릇들은 죄 더러웠으며 집이랑 다를게 없었다.




엄마의 생활력으로 벌어놓은 돈은 다 가지고 있었지만 본인의 저장 강박증인 물건에 대한 애착이 돈에도 적용되어서 일주일에 생활비 2만원을 주면서 5인 가족이 살라고 모든 집안일과 바깥일을 엄마에게 다 시키고 본인은 기원에서 바둑만 두시면서 경제권을 가지고 권위를 부리는 아빠와 언제나 엄마와의 싸움으로 집안을 전쟁터로 만들었다.

집안에 혼자 있는 동생이 5살무렵 엄마 아빠의 싸움에 엄마의 스트레스 폭발로 화장실 변기를 무거운 물건으로 내리치는 행동을 보고 동생의 트라우마가 생겼고 아빠의 모든 물건에 대한 집착은 가족의 힘듦을 언제나 외면하였고 무공감증은 가족들을 병들게 하였다. 그때 엄마도 아빠와의 불통으로 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엄마는 자신을 아빠의 노예였다고 표현하였다.

어렸지만 권위적이고 그 어떤 대화도 없었던 비정상적인 아빠보다 엄마가 정상적이라고 생각해서 난 아빠에 대한 적개심이 있었다.

돈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다 보니 엄마의 만류에도 아랑곳 않고 사기를 당해 재산의 반 이상을 날리고도 당당한 분이셨다. 1989년 5천만원이라는 돈은 아주 큰 돈이었기 때문이었다.

자식들이 커가면서 나가는 돈이 있는데 가족을 위해 돈을 악착같이 벌었던 엄마는 돈을 쓰지도 못하게 하는 아빠에 대한 분노와 증오로 인한 우울증으로 속병이 들고 있었다.

우리들은 학창시절 친구들이 자주 가는 매점 갈 돈으로 받는 용돈을 받지를 못하다가 결국 엄마와의 싸움끝에 아빠는 일주일에 천원을 주기로 결심을 하고는 온갖 생색을 내시곤 하였다. 그 돈으로 저금도 해야한다는 것이었다. 친구들과 맛있는것을 사먹고 싶은 자식들의 삶을 이해를 못하는 것이었다. 생활비로 엄마에게 2만원만 주고 있으니 자식들의 용돈은 그 정도로 충분하다고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등록금을 안내고 버티다가 교무실에 언제나 불려가야했고 자존감은 바닥이라 공부를 해야하는 학창시절은 암울하게만 흘러갔다. 돈이 없는것도 아닌데 아빠는 자신의 세계를 좀 더 짙게 가려고 하다 엄마와의 마찰이 아주 크게 있을 무렵 손지검으로 엄마를 폭행하기 시작했고 말리던 나까지 폭행하는 것이 반복될 무렵 우리 가족은 야반 도주로 집을 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아빠의 저장강박증과 그로 인한 인격 장애와 가부장적인 사고방식의 존재감이 너무 커서일까 우리들의 사춘기라는 것은 언제 지나갔는지 몰랐다.


아빠의 저장강박증으로 인한 파생된 인격장애로 번진것일까 아님 인격장애를 먼저 앓고 있다가 저장강박증을 앓게 된것인지는 정확히 알수는 없지만 아버지의 가족들인 남동생과 어머니와 같은 증상을 보고는 아주 무서운 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저장 강박증이 유전이라는 보고서는 없으니 자식인 나의 입장에서는 답답하고 두렵기만 하였다. 난 무엇인지 모를 나를 살릴 수 있는것에 갈증이 났고 목말라하고 있었다. 곧 그것이 나의 가족이 살 길이라고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우리 안의 에고의 특성인 부정적 결과를 맞이하면 과거의 결과를 수정하지 않고 자기 합리화를 하며 계속 부정적인 결과만 나오는 길을 고집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을 몰입 상승효과 부른다.


아빠의 부재는 일상이 되었고 가족이 없는 당신의 선택으로 그런 고독함을 택하신 것이다. 가장은 있지만 가장의 울타리 부재로 인한 가족들이 받을 적대적인 적막함을 무시하기로 한것이다.

아빠의 에너지는 가족들의 에너지를 갉아먹는 칼로 변하기 일쑤이고 거기서 벗어나 무소식으로 살아가도 되는 우리는 그런 가족이었다.

 



난 독일의 창의적인 사고방식을 배우면서 내 삶을 수정해야 한다고 그래야 살아갈 수 있다고

나의 존재는 아빠의 씨가 아닌 그 씨를 만든 주체자에 의해 태어났다고

그래서 단지 엄마의 모태를 빌려 태어났다고


순리에 거스르는 책임을 회피한 선택으로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인간은 그저 우주의 존재를 있게한 완전한 자의 피조물에 지나지 않음을 인정해야하는 불완전한 존재임을


나에게 백만번도 넘게 내가 배운 주입식 교육으로 주입시켜본다. 그러면서 믿게되었다.

그러면서 피폐해진 나의 영혼의 안식처로 인한 평안으로 아빠의 영혼도 나와 같이 왔으며 앞으로 가야하는 길을 위해 하염없이 기도를 한다.

작가의 이전글 동생은 관계를 단절하는 용기를 가졌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