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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um Mar 05. 2021

동생은 관계를 단절하는 용기를 가졌다

이젠 꽃길만 걸어갔으면

나의 동생은 마음 독립을 열심히 하면서 자기의 자리에서 꿈도 이루고 귀한 재능으로 사람들과 언제나 공감과 인정을 받으며 피아니스트로 독일에서 살고 있다.


미야는 나와는 6살 터울인 관계이고 하나뿐인 동생인지라 난 어릴적 외로울까봐 항상 언니보다는 친구로 동생을 바라보며 아꼈다. 어릴적부터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아 피아노 학원을 다녔고 여느 클라식을 전공하려는 학생들과 같은 정규코스를 차근차근 밟아가며 유학길에 올랐고 지금은 자리잡아 독일 남자와 결혼도 해서 만족하면서 독일에서 살고 있다. 어릴적부터 말수가 항상 없었던지라 무슨 생각을 하면서 학교를 다니는지 알수가 없던 적이 참 많았다. 내가 중학교엔 동생 혼자 피아노 학원을 다녀야 하는게 안쓰러워 일하는 엄마 대신 항상 다리 아플까 업고 학원에 데려다 주고 데릴러 가곤 하였다. 엄마는 동생의 콩쿨이나 연주회가 있으면 항상 화려한 드레스를 빌려서 음악회에 참가시켰고 난 가족이라 가야한다며 화장을 한 화려한 옷을 입은 동생옆 우중충한 옷으로 사진속 구석을 자리하고 있었다. 너무 귀엽고 사랑스런 얼굴이 너무 이뻐서 난 항상 동생을 닳도록 보고 싶고 아껴서 동생이 힘들다고 하는건 언제나 나의 몫이었다. 정확하게는 엄마의 강요가 너무 많았지만 말이다.

대학때도 집에 오면 항상 라면을 끓여줘야 했던 아이였다.

“선아, 미야 밥 먹어야 하니 라면 좀 끓여줘라.”


동생이 초등학교 2학년인가 얼굴에 상처가 있길래 이상하다고 생각했고 물어봐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때부터 이상하게 말수가 없는 아이는 더 말수가 없어져 갔고 표정은 항상 힘들어 보였다. 엄마는 가정에 관심이 없는 아빠와 언제나 싸우고 우리들을 먹여살려야 하니 생계형 엄마로서 돈버느라 하루하루가 고단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시장을 가야되면 씩씩한 중학생인 나를 데리고 짐꾼노릇을 시켰다. 난 그저 이상하다고만 생각하고 어려워진 학교 공부 따라가고 친구들 사귀느라 동생한테 신경쓸 틈이 없었다.

미야는 그렇게 모든걸 혼자서 집에 오면 고양이를 친구삼아 아무일도 없는것처럼 살아가고 있었다.


아빠와의 잦은 불협화음으로 미야 중학교때 우리는 살던 집에서 나와야했다. 그렇게 나와서 달동네에서 동생은 예중 예고를 다녔다. 엄마는 돈이 없으니 백화점에서 하루종일 일을 하고 밤에는 닭껍질을 벗기는 일을 하면서 우리집의 가장 노릇을 꿋꿋히 하였다. 난 전문대 다니며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모든걸 스스로 해결해야만 했다. 그러고 졸업하고 바로 취업을 하고 월급의 반을 동생의 피아노 학원비를 보태야만 했다. 가장의 몫을 나누면서 첫째인 언니도 전문대를 나와 취업한 미술학원에서 번돈은 달동네 방 보증금으로 쓰고 자기는 빨리 결혼하는데 생활비 줄인다며 서둘러 사귀던 남자와 몇백만원으로 결혼했다. 난 동생의 대학 뒷바라지를 20대 초반에 회사를 다니며 그렇게 했었다. 그땐 동생이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이렇게 모든 가족이 해야만 하는것이 당연한 줄만 알았다. 아빠는 모든 돈을 가지고 있지만 자식들한테도 십원 한장 내놓지를 않으니 어쩔수가 없다고만 생각하고 엄마는 동생의 뒷바라지와 가족의 생계에 모든 가족의 도움을 요구하였다. 그러고는 엄마는 엄마의 두번째 남자인 지금의 남편을 만나고 우린 꾸역꾸역 가족노릇을 하러 달동네에서 벗어나 아파트로 이사를 하였다.


우리 가족들은 작은 실수로 잘못해서 넘어지면 쨍끄랑 깨질수 밖에 없는 유리그릇처럼 살아가고 있었다.


미야는 재수를 하고 난후 부산에 있는 4년제 대학을 가고 엄마는 말 잘듣는 동생의 사생활까지도 서슴없이 관여를 하였다. 사귀는 남자들마다 따로 만나서 헤어지라고 하고 더 좋은 남자를 만나라고 동생을 항상 설득하였다. 엄마의 성에 차지 않으면 동생의 남자를 따로 불러 무릎꿇리기까지 하였다.

왜 그랬을까.. 자식이 소유물이라 여기는 분이라하기엔 우리들의 연애엔 관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동생에 대한 행동은 그냥 엄마의 과한 사랑이라고 생각했었다. 엄마는 언제나 막내에겐 과하다 싶을 정도로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애정을 쏟아부었다. 다 큰 성인인데도 입에다 음식까지 떠먹여주는것까지 봤었다.

동생은 연년생인 언니와 나와 터울이 있던지라 엄마는 항상 막내는 엄마 당신이랑 같이 살날이 우리들보다 적었다며 모든 애정과 수고를 그렇게 쏟았던것에 합리화하였다.


그렇게 동생은 우리집 서열 1위였다. 미야는 졸업할때 쯤 유학을 보내달라고 하면서 선언을 하고 독일로 떠났다. 같이 살고 있던 엄마의 남편은 동생의 뒷바라지에 승낙을 하고 동생은 그렇게 학교가 마칠때까지 경제적 도움을 받으며 독일 유학생활을 했다. 2년만 공부하고 한국에 오라는 엄마의 말을 번번히 묵살하고 결국 2년이 5년 10년 3년만 있으면 동생이 독일에서 산지 20년이다. 이제 독일에서 한국 올 일은 없겠지만 동생은 독일 삶이 항상 만족하는 것같았다. 언제나 연주회로 바쁘고 Probe 한다고 항상 연습중이었다.




난 20대 중반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30대초반 뒤늦은 유학으로 베를린에서 어학비자로 살고 있었다. 내가 대학을 들어가기전 2009년 동생은 프랑스에서 연주회 갔다가 독일로 오는 야간 기차에서  엄마 카드와 현금을 분실하였다. 바로 한국 카드사에 연락을 했지만 목돈을 돌려받지를 못해서 나도 한국서 가지고 온 돈이 바닥이 되었고 생활비가 없으니 본이아니게 동생과의 동거를 하게되었다. 새 아버지와 엄마는 동생에게 항상 매달 100만원씩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에 난 동생에게 주는 돈으로 독일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동생하고의 같이 산 날이 어릴적 말고는 없던지라 독일에서의 1년간의 동생하고의 동거는 마냥 좋은것만은 아니었다. 분명 모든 집안일이며 음식은 한국처럼 내가 다할꺼라는 생각이 들어서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멀고도 먼 독일에서의 난 동생에게 엄마의 역할을 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정확하게는 우리 가족들의 아픔이 나의 눈과 마음에는 다 보였다. 단지 감추고 속에서 곪고 있을꺼라고 항상 생각했던 것이다. 내가 그랬으니 나와 같은 환경에서 자라난 자매들도 예외는 아닐꺼라 생각하면서 서로의 마음속을 난 들여다보기로 했다.




한 집에서 산지 얼마 안되 미야가 참 이상했다.

거짓말이 잦아 한번은 나도 내 감정에 못이겨 폭발을 해 싸움으로 번졌다. 왜 거짓말을 하냐고, 그렇게 살면 안된다며 다그치기 시작했고 미야가 코너에 몰릴때쯤 이런 말을 했다.


“왕따를 당했고 같은 아이한테 초등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당했는데 폭력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폭력까지 당했어. 어릴적 난 학교도 전쟁터였는데 집도 전쟁터였어. 엄마한테 말하고 싶었는데 매일 아빠랑 싸우니 너무 무서워서 말도 못했고 친구들이 선이 언니한테 말하면 죽는다며 협박을 해 언니한테는 말하지 못한거야.”

“그리고 6개월뒤에 Examen시험이라서 집중해서 멘탈관리해야해. 왜 자꾸 들들 뽂아!”


이건 무슨 상황이지???

거짓말 하지 말라는데 미야는 상관 없는 말을 하고 있지만 엄청난 본인의 상처를 토해내는 동생의 말에 그 중요한 졸업 시험이 너무 중요하다는건 알지만 조심스레 나의 잣대보다 상처받은 동생의 마음이 먼저라고 생각하고 경청하고 그때부터 물어보기 시작했다.

예전 내가 이뻐하고 귀여워하던 동생의 친구들이 뒤에서는 동생을 괴롭히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도 생각나는 얼굴들과 이름들이다.


마음을 가다듬고 난

“미야, 지금은 괜찮아? 아프지 않아?

“... 이렇게 건강하게 커줘서 고맙고 그때 언니가 알아채지 못해서 너무 미안해.”

난 주체할수 없는 눈물과 괴로움에 단숨에 한국의 엄마와 언니에게 그 아이들의 행방을 추적해달라고 했고 추적끝에 한명은 미국에 바이올린으로 유학중이고 한명은 서울에서 피아노 강사로 일하고 있다고 한다. 난 그들의 사과와 용서를 받아야만 했다. 언니와 엄마는 너무 놀라고 화가 나서 내가 하라는대로 서울의 그 아이의 폰 번호까지 예전 다녔던 교회를 통해 알아냈다.


나의 사랑스런 동생은 학폭의 피해자이며 엄마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말 잘듣는 착한딸이어야 하는
자신을 위해 사랑할수 없는 가혹한 현실을 살아왔었다.  


“엄마. 걔한테 전화해서 만나자고 하세요.”

“선아 못만난고 하더라. 용서해 달라고. 그러면서 본인도 독일 유학을 꿈꿨는데 2년을 독일에 입시생으로 있었지만 항상 불합격해서 다시 한국에 돌아왔다며 미야 소식은 다 듣고 있었는데 아마도 자기는 벌을 받았다며 용서를 구한다고 했어”

“엄마, 엄마한테 말고 미야한테 본인한테 해야죠. 그게 사람의 도리이죠. 예전 미야 초등학교때 얼굴에 심하게 긁힌 자국이 폭행을 당한거라구요. 그 아이가 같은 아이를 12년간 같은 사람을 괴롭힌거라구요. 그런 사람은 가만 두면 안되요.”


난 동생한테 너무 미안했었다. 동생이 그 아이들 앞에서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무릎이 꿇어지고 둘러싸여 맞았다고 생각을 하니 피가 꺼꾸로 솟았다.

그리고 그런 학교에서의 전쟁터 같은 세계가 집안에서도 똑같이 가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잘못한것도 없어도 언니로서 눈치를 못 채었던것이 불쌍하고 안쓰러워서 아무말도 할 수가 없었다.


지금도 난 가해자의 이름들을 똑똑히 기억한다.

그런 사람들은 절대로 잘 되면 안된다고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지금 가장 중요한건 미야의 마음상태다.

“미야, 그런 사람들을 평생 죄책감으로 살아갈꺼야. 어릴적 그런 아이들이 커서 제대로 된 어른이 될수가 없어. 사람들은 그들의 성향을 곧 알게될꺼야. 미야, 지금이 너무 중요해. 참지말고 울어봐. 그리고 소리쳐야해. 참는건 오히려 독이 될 수 있어.”

미야는 항상 나에게 말하였다.

자기는 한국에서의 어릴적 삶은 전쟁터였다고. 난 동생이 측은해 미칠정도로 안쓰러웠다. 너무나도 이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언제나 얘기한다. 뒷바라라지를 그렇게 했는데 연락도 없고 결혼도 열살이나 어린 대학 안나온 사람이랑 하고 챙피해서 어디 얼굴을 들고 다니겠냐며. 나의 엄마는 그렇게 자식들을 멀리 떠나가게 하였다.


<참조> 엄마의 페르소나


“언니, 난 몸은 30대이지만 속나이는 이제 겨우 10살 넘었어. 아이는 낳아 키울 자신이 없어. 온전한 부모가 될 자신이 없어. 내가 아이한테 사랑을 주지 못해서 혹여 상처 받으면 안되니.”

“그래, 미야 우리같은 어그러진 가정에서 자라온 자식들은 다 겪는 그런 몸살같은 거야. 하지만 우리는 건강하고 지금 잘 컸어. 사고친 적도 없고 꿈을 쫓아 여기까지 왔고 지금도 그 길을 걷고 있잖아.”


우린 그런 어그러진 가정에서 엇나가지 않은 서로를 위로하고 눈물을 흘렸다.

“언니야 난 한국에 안가고 독일에서 독일 남자와 결혼해 엄마가 내 가족들하고 말이 안통해서 너무 다행이야.”

“오늘 난 독일의 난민들이 있는 단체나 음악을 들을 수 없는 병원 봉사를 하고왔어. 소외된 사람들의 내가 연주하는 음악으로 인한 힐링이 오히려 나에게 전해져서 나도 힐링이 되고 보람을 느껴.“

“그래, 미야 너무 귀한 일을 하고 있는거야. 그리고 넌 성인이야. 너의 행복을 위해 너가 선택하고 결정해야해.“


너무 씁쓸하지만 동생의 엄마와의 관계의 단절은 오히려 용기였을수도 있다.

미야의 거짓말은 자기를 감추기 위한 도구로 선택했었을꺼라 생각하고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고 타이른다.

사랑이 많은 그런 좋은 사람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그래야 신뢰가 쌓이고 믿음과 사랑으로 살아갈 수 있는거라고.

휴.. 그래도 난 동생의 속에 곪아 있는 상처를 끄집어 낸것에 안도감이 들었다.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으나 동생은 잘 이겨내었고 너무나도 잘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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