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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um Feb 12. 2021

선아, 아빠 돌아가셨어

곧 갈게요

“선아.... 선. 아.. 아빠 돌아가셨어”

“엄마, 언제요?”

“좀 전에.. “

‘아빠가 돌아가셨다. 잘 가시고 계신 걸까? 길을 잃지는 않을까..’


“선아, 아빠 얘기 나한테는 하지 말아 줘. 가슴이 아파서 그래. 일도 해야 하는데 아빠까지 생각하면 병이 도질 것 같아 그래.”

“그래. 언니. 마음 추슬러”


“언니, 저랑 같이 장례예배드려요.”

“고마워.”

친한 동생과 친구 배려로 친구집에서 함께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기도드리고 장례예배로 마음을 추슬렀다.

그렇게 난 독일에서 아버지를 보내드렸다.




나의 아버지는 80세 독거노인였다. 나의 아버지는 동국대 법대를 나온 총명한 양반가문의 장손으로 태어나 귀하게 자라났지만 몸이 안 좋아 대학 때 심장병으로 쓰러진 적이 있었다. 그때 죽을고비를 넘기고 군대를 면제받고 사회에 나갔지만 군대를 다녀오지 않아 적응하지 못하고 살다 뒤늦게 결혼했다. 저장강박증이라는 병을 가지고 모든 가족이 그걸 모른 채 잦은 불협화음으로 아빠와 우리 가족들은 오래전 헤어져 살았고 평생을 아버지의 불뚝 성질과 가부장적인 유교적 사고방식을 고수하시며 살으셨다.


나의 가족은 엄마 나 언니 동생이다. 우리 가족은 아버지로 인해 많이 어그러져 있는 형태이다. 우리는 많이 지쳐있었으며 거짓말과 의심과 경계와 불신과 미움이 항상 난무했다. 우리들은 그래서 항상 불행했다. 아빠를 이해하고자 아빠 가족들을 만나 어릴 적 환경을 알아보려 했다. 막내 고모를 만나 친할머니와 삼촌댁에 갔는데 내가 모르는 삼촌이 계셨는데 두 분 다 한집에 같이 살고 계셨다. 인사를 드리는데 할머니와 삼촌은 나를 반기지를 않으셨다. 정확히 말해 그분들도 아프다는 걸 알았다. 집안이 아빠 집보다 다소 깨끗하긴 하지만 비슷한 강박증인지 집안이 정리가 안되어있고 엉망이었다. 강박증이 유전이라는 걸 그때 알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한량이라 평생을 밖에서 살다가 늙어서 집에 들어오셨다고 한다. 그 속이 말이 아니라 할머니는 큰아들인 아버지를 남편 겸 의지했다고 했다. 똑똑하니 다른 자식들이 못 간 대학을 보내기 위해 고모들과 삼촌은 아버지 대학 등록금 때문 돈벌이도 했다고 한다. 그렇게 아버지 집안의 어그러짐을 알게 되고 그래도 아버지를 이해 못하지만 조금은 벗어날 수는 있었다.


우리는 우리 안의 에고의 특성인 부정적 결과를 맞이하면 과거의 결과를 수정하지 않고 자기 합리화를 하며 계속 부정적인 결과만 나오는 길을 고집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을 몰입 상승효과 부른다.
by 베레스토


에고를 다루기에 지혜가 필요하고 무심한 듯 스쳐 지나가기로 했다.



우리 가족들은 그렇게 각자의 자리에서 짐을 스스로 짊어져가고 있었다. 난 21살이었지만 동생은 중학교라 어릴 때 아버지와 헤어진 동생이 기억하는 아버지는 자기를 아끼고 사랑 표현을 많이 해준걸 기억하는 걸 듣고 쓰레기 같은 아버지 집의 문제를 말할 수 없었다. 내가 겪은 괴로움을 동생이 겪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난 살면서 엄마도 많이도 원망했다.

‘왜 진작에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정신 병원 치료를 했어야 했던 사람을 방치한 엄마였기에..’

엄마는 결혼해서 모든 경제활동과 집안일을 다했는데 아버지가 경제권을 쥐고 생활비 2만원만 엄마에게 주고 다섯 식구 생활비로 일주일을 살라고 했다. 차가 없으니 시장에서 무거운 짐을 아빠한테 들어달라고 하면 여자가 다 하는거라며 엄마는 그나마 씩씩한 나를 데리고 시장을 다녔다. 모성애의 힘으로. 신발, 악세사리 등 장사하다 커피가게를 운영하다 직원들 월급을 줘야 하는데 기원에서 내려오지를 않고 거래처 사람들은 항상 돈을 달라 엄마를 독촉하고 자식들은 교무실에 등록금 안내서 교무실로 불려 나가기 일쑤였다. 엄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부동산 사기를 당해 그 많은 재산을 날려버려 항상 집은 엄마와 아버지와의 싸움이 끝이 없었다. 엄마는 본인이 항상 피해자라고 말하지만 두 분이 만든 어그러진 가정환경에서 자란 자식들이 더 큰 상처를 받은 것을 공감 못하였다.

강박증이라는 병은 그렇게 주위 사람들을 병들게 했다. 그래서 가족들도 병들고 자신의 심연에 빠져버렸지만 치료도 없이 아무렇지 않은 채로 아니 않은 척 살아가고 있었다. 당뇨, 심근경색 등 원래 지병이 있었는데 당신 몸을 돌보는건 소홀하지는 않으셨다.

                                                                                                                                                                 



오늘 요양병원을 가야 되서인가 나의 마음은 무겁기만 하다. 헤어지고 왕래가 너무 없었던 부녀간의 사이가 어색하고 불편했다.

독일에 있는 언니나 동생이 아빠 소식을 거부하니 난 어쩔 수 없이 무거운 마음으로 병원에 방문했다.


”왔냐? 여기 앉아라.“

처음에는 나를 못 알아보시더니 자주 얼굴 보니 알아보시곤 했다.

”아빠, 누군지 아세요? “

“누구냐”

“아빠 큰딸이랑 손녀예요. 여긴 막내딸이랑 아빠 사위예요. 미야는 독일 사람하고 결혼했어요.”

”...”

“나랑 막내는 독일에서 공부 마치고 막내는 피아니스트예요. 전 미대 졸업했어요. “

“..... 집에 가고 싶어”

“아빠, 아파서 집에 못 가세요. 다 나으시면 집에 갈 수 있어요. “




난 아버지와의 마지막 시간을 그나마 보냈는데 언니와 동생의 천륜을 그냥 보낸 그들의 마음들이 안타까웠다. 살아계실 때 전화도 안 받고 영상통화도 거부하였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병들어 있던 것이라 믿고 난 자식으로서 해야 할 일에 집중했다. 너무 많은 감정 소모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아빠의 마지막 길을 동행하고 난 후 얼마 지나고 나의 가슴속 응어리가 조금씩 없어져가고 있었다. 다른 가족들도 이러겠지 여겼다.

유골을 뿌리고 오는 길..

인생이 허무하고 무상하다는 진리에 난 숙연해진다.


아버지의 수많은 일기장엔 강박증을 암시하는 시간분을 쪼개어서 쫓기는 일상이 그대로 적혀있었다. 우리 가족에 대한 이름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빈 여백 끝에 적어진 문구는


기준아 넌 어찌
먹고사는데 그리도 급급하냐?
망치로 내 머리를 내리치는 소리가 뭘까...



상실감이 너무 커 독일에서 아버지를 위해 매일을 울며 기도했던

2011년 하나님이 아버지께 찾아가 말해준 걸까?


20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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