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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um Mar 16. 2021

동생집 이삿짐을 옮겨주시는 고마운 북한 사람

독일의 이사비용이 너무 비싸요

오랫동안 살았던 도시를 떠나 결혼한 집으로 이사를 하기 위해 차를 대절하면 독일은 너무 비싸기 때문에 난 동생의 집에 있는 집을 정리해주기 위해 카를수루헤로 아침부터 채비해서 기차를 타고 갔다. 어마어마한 짐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손길이 절실히 필요했던 터라 한국서 이사를 몇 번 해본 솜씨로 상자에 싸야겠다 생각했다. 동생집에 도착하고 상자들을 구하고 하나하나 채워서 문 앞에 놓다 보니 쌓이는 게 보이고 일하고 돌아오는 동생과 동행하는 남자 두 명이 올라오고 있었다.

"어머! 안녕하세요. 시간 내서 여기까지 도와주시러 와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말투가 북한 말투인 듯해서 조용히 물어봤다.

"저기... 북한분이신가요?"

"네, 전 1년 전에 왔고 저 친구는 한 달 되었시오."

외할머니 말고 만나는 북한 분들이라 깜짝 놀라기는 했다. 예전 외할머니가 생각이 났다.

"선아! 머리 묶어야 하니 날래 날래 앉으라우."

워낙 뛰어놀기 좋아하는 내가 마당에서 머리를 삼발로 돌아다니자 외할머니의 호출이 있었다. 어릴 적 외할머니가 당신 막내인 우리 엄마가 힘들게 일하고 하니 우리 집 와서 동생을 키워주시기 위해 우리 집에서 2년 정도 사신 적이 있었던 할머니를 잠시 생각했다.




"이것들 옮기면 되죠?"

"네, 하나씩 천천히 옮기시면 됩니다."

A씨인 1년 정도 생활하신 분은 한국문화를 빠르게 습득하신 듯 금방 나에게 누나라고 하면서 친근감을 보여줬다. 반면 B씨인 한 달밖에 안된 분은 아직도 적응이 안된 지 눈치를 보면서 일만 하고 계셨다.

"상자는 무거우니 하나씩만 드세요. 두 개씩 드시면 허리 다치세요.“

"아닙니다. 세 박스도 들 수 있습니다. 또 할 것 없습니까?"

엘리베이터도 없는 건물 5층에서 아래로 땀을 뻘뻘 흘리며 일만 하시는 B씨에게 말을 걸었다.

"식사 안 하셨으면 저희랑 식사하러 나가요."

북한 분들의 탈출기를 조심히 물어 보기로 했다. A씨는 힘들게 탈출해서 독일에 정착을 하는데 비자를 주는 관공서에서는 비자를 주는데 감시원을 부치면서 24시간을 감시를 당하고 있다고 했다. 마음대로 일을 못하니 독일에서도 북한 사람을 보호할 수 있는 최대한의 규정이라고 했다. 국가에서 보조금이라고 나오기는 하는데 턱없이 부족하고 와이프가 임신을 해서 살아야 하니 이렇게 일하면서 살고 있다고 했다. B씨는 말수가 적었다. 탈출하는 과정이 혹독한 탓인지 얼굴 표정은 아직도 힘들어 보였고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게 안쓰러웠다. 많아야 20대 중반 정도밖에 안보였기에 더 그런 마음이 들었다.

카를수루헤의 한인 교회에서 탈출한 북한 분들을 도와주는 사역을 하시는 목사님이 계셨기 때문에 동생도 다니는 교회에서 만났는데 한국인들의 도움으로 살고 계셨다.


2015년만 하더라도 북한 사람을 만나면 신고해야 한다는 말이 있었다.

한 사례로 어떤 연주하는 한국 남학생이 생활비가 너무 없으니 일자리를 구하다가 대사관에서 초청을 받아 연주를 하러 간 곳이 북한 대사관이었다. 그 남학생은 학교를 다니며 방학에 한국에 왔는데 다시 독일에 들어가려고 하자 출입국 관리소에 잡힌 사건이 있었다. 이유는 북한 사람을 만났다는 이유로 일 년간 아무 이유 없이 개강이 되었는데 독일에 못 가고 한국에서 조사를 받았다고 해서 삽시간에 소문이 나서 북한 사람을 만나는 것을 조심하라는 한국인들이 얘기하곤 하였다.


난 그분들의 북한에서의 삶을 물어볼 수는 없었다. 분명히 힘드니깐 가족을 뒤로하고 탈출을 했었다는 것을 짐작했기에 아픈 기억을 떠올리게 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두 분이 씩씩하게 여기서 헤쳐나가고 있는 모습을 보니 한국 사람으로서 응원을 하고 싶었다.

동생은 보통 기존의 페이보다 더 많이 주라는 나의 부탁을 흔쾌히 받아들이고 봉투에 담아서 드리고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헤어졌다. 연락은 할 수 없지만 B씨도 A씨처럼 가정도 만들고 적응도 잘하시리라 믿어본다.


같은 말을 쓰는 지구 상의 마지막 분단국가의 비극이 아닐 수 없지만 통일을 염원하는 사람들과 보이지 않는 이런 손길들이 있으니 다행인 듯했다. 어서 통일이 되었으면 좋겠다.

때마침 뮌헨에서 차를 가지고 온 제부의 도착 소식을 듣고 하나씩 상자를 차에 싣고 며칠을 왔다 갔다 오가며 힘겨운 이사 작업을 하였다고 한다.

왜?

독일의 이사 비용은 너무 비싸기 때문에

카를수루헤야 안녕!!!    

동생아 이제 뮌헨에서 보자꾸나!

수고하는 제부한테 고맙다는 말을 하고 다음날 일도 해야 하고 수업이 있는지라 난 다시 나의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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