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불법체류자 아니에요
2004년 동생의 독일행을 위해 난 서울에서 밥도 못하는 미야를 위해 가자마자 먹을 수 있는 여러 인스턴트 음식과 옷가지들을 챙겨서 준비하는 것을 도와주기로 한다. 헝가리가 그래도 생활비가 싸다고 선택한 동생의 안위를 걱정했던지라 새아버지는 음악을 위해서는 위험한 헝가리보다 독일이 나을 것이라 권면하였고 동생은 독일에 유학 가기 위해 독일어 공부를 한국서 6개월 정도를 하면서 대학을 졸업한 다음해 준비를 하였다.
난 무엇보다 동생이 타국에 가서 밥 같은걸 잘해 먹을 수 있을까 걱정이 되니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생활용품들과 식재료들을 사기 시작했다.
그때 난 독일이 어디에 위치해 있는 줄도 모르고 동생은 어떻게 저런 용기가 있는지 신기해하면서 동생의 독일행에 인천공항에서 배웅해주고 집에 오는 차 안에서 꺼이꺼이 울고 있었다.
차가 없어서 나와 동생을 위해 공항까지 배웅해준 나와의 왕래가 잦은 사촌오빠는 우는 날 달래주었고 하늘을 날아가고 있는 동생의 안위가 걱정되어서 도착했다는 전화 연락만 기다리고 있었다.
동생의 도착 소식을 듣고 난 나대로 한국생활을 하면서 동생이 독일에 간지 4개월이 지난가을 회사에서 10일간의 휴가를 받고 가족 대표로 동생한테 가보고 싶어서 독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동생을 위해 빨아도 별 탈 없는 그런 면 종류의 옷과 독일은 공산품이 비싸다고 하니 학용품을 최대한 많이 사 가지고 트렁크에는 먹을 양념들인 고추장 된장들로 나의 물건은 없이 동생들의 옷가지로 트렁크에 꽉꽉 채워가서 독일행에 긴장과 설렘으로 출발하였다. 처음 타본 국제선 비행기는 모든 스튜어디스가 싱그러워 보였고 따뜻한 말투는 나의 마음을 기분 좋게 하였다.
나의 첫 번째 국제 여행의 도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베를린에 도착하고 배웅 나온 동생과 얼싸안고 동생네 기숙사를 방문하였다. 유학원을 통해 얻은 집이라서 그랜드 피아노가 중앙에 있고 한켠에 침대와 욕실과 주방이 딸린 방은 그 건물 전체가 음악 하는 학생들을 위한 그런 기숙사였다. 음식을 전혀 못하는 동생에 지금까지 어떻게 밥을 해먹었는지 궁금해서 물어봤더니 동생은 독일 도착하자마자 내가 싸준 ABC 초코렛으로 이틀을 버티다가 너무 배가 고파서 기숙사 옆방의 친구 도움으로 된장찌게 끓이는 법을 배웠고 그 뒤로부터는 하나씩 배워서 음식을 해먹으면서 살았다고 했다. 역시 사람은 당하면 다 하는구나를 느꼈다.
그나이에 밥 하나를 못하게 하고 못한 자기탓도 있었으니 귀중한 경험했네 하고 쿨하게 넘기고 싸가지고 온 여러가지 식재료들을 냉장고에 넣어놨다.
동생은 입시생이라 나와 돌아다닐 시간이 없어서인지 난 동생이 연습하러 간 사이 혼자서 놀아야 했다.
혼자만의 시간에 영어나 독일어가 능숙하지 못하는 난 동생이 연습하고 나간 방을 지키며 독일의 풍경을 창밖으로만 보고 있었다. 슈퍼를 얼른 알아서 시장보기를 하고 근처 공원에서 사람들이 말을 걸까 겁을 내면서 배회하면서 베를린을 구경하였다. 주말에 동생은 나와 같이 베를린 유명한 유적지를 돌아다녔고 난 최대한 동생의 루틴에 방해가 되지 말자고 하면서 혼자만의 시간으로 베를린을 돌아다녔다. 얼마 전 베를린 음대를 떨어졌다며 자기가 제일가고 싶은 대학이라며 계속 눈물을 흘리면서 자기가 나이가 많아서 떨어졌나 라고 반문하기도 하였다.
기회는 또 있을 거라고 밑에 있는 남부 쪽에 원서들을 넣고 계속 연습과 레슨을 반복하고 있었다. 집에서 주는 생활비 100만원으로 월세에 렛슨비에 생활비로 알뜰하게 생활하고 있었다.
그러다 교회에서 목사님의 권유로 언니가 한국에서 놀러 왔는데 집에만 있는 것이 안쓰러웠는지 가까운 프라하라도 다녀오는게 어떠냐며 동생과 나를 위해 프라하에 있는 목사님 댁을 소개해 주었다. 이틀을 놀다 오라는 얘기를 듣고 프라하가 기차 타면 두 시간 정도 거리에 있는 줄을 그때 알고 동생과 난 신이 나서 내가 정성스럽게 싸온 김밥을 가지고 프라하행 기차를 타고 가기 시작하였다.
베를린에서 프라하로 가기 위해서는 두 번의 기차를 갈아타야 해서 국경선 근처 도시에서 프라하행 체코 기차를 갈아타고 한참을 가면서 김밥을 나눠먹고 창밖의 풍경도 보고 동생과의 여행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다 표를 검사하는 빨간 모자 쓴 검문원이 다가왔고 여권을 제시하라는 말을 동생이 알아듣고 여권을 달라는 동생말에 난 여권을 안 가져왔다고 없다고 하였다.
헐!! 동생은 황당한 표정에 곧 검문원한테 사실을 알렸고 검문원은 다음 역에 내리라는 말로 우리의 물건들을 챙기라고 하였다.
여권은 잊어버릴까 봐 집에다 두고 왔다는 말에 너무 황당해서 동생도 아무 말도 못 하고 집에 두고 왔다고만 검문원한테 얘기를 하지만 다음 역에 내려서 검문소에 가게 되었다.
참! 프라하는 독일과 다른 나라였지.. 유럽은 기차만 타면 아무 나라를 갈 수 있지만 엄연히 다른 나라이기 때문에 국경선에 표를 검사하는 사람한테 여권을 제출해야 한다는 사전 정보를 몰랐던 것에 창피해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국제 여행 한 경험이 없으니 비행기를 타면 여권을 들고 다녀야 한다는 생각만 가지고 기차를 타고 여행을 한다고 김밥만 열심히 싸고 있었던 것이다.
검문소에 무서운 사람들은 말을 못 하는 나를 노려보고 독일어 말을 더듬더듬하는 동생한테 속사포처럼 무슨 말을 하면서 동생의 여권으로 불법 체류자인지 범죄자인지를 조사하는 시간이 한 시간을 끌고 가서야 우리를 보내주었다. 이미 너무 늦은 시간이라 우리는 집에 가는 길에 독일행 기차를 겨우 타고 와서는 국경선 근처 돈을 아끼고자 남녀 숙박업소인 호스텔을 얼른 알아보고 거기서 하루를 지내기로 하였다.
처음으로 가본 호스텔은 8명이 들어가서 자는 방이었는데 4개의 이층 침대가 있었다. 같은 하나의 침대가 비워있는 자리가 없으니 동생은 남아있는 2층 자리 침대 하나에 자게 하게 하고 난 문 근처 1층에 있는 침대자리에 자기로 하였다. 공용 욕실은 밖에 있어서 씻는 것은 피곤하기도 하고 우리가 시끄럽게 하면 남들에게 피해를 줄까 봐 양치만 하고 다음날 베를린 집에 가서 씻자고 했다.
그러다 늦은 새벽 술을 먹고 들어오는 사람들이 자기 잠자리 자리를 찾으려고 불을 켜고 끄는 것 등을 불편한 채로 참고 다시 잠을 자고 알람을 맞춘 나의 핸디가 아침에 울리면서 일어나라고 동생을 깨웠다.
불을 켜야 하니 어쩔 수 없이 불을 켰는데 동생이 자고 있던 침대 1층은 190cm 정도 되어 보이는 백인 남자가 상의를 훌러덩 벗고 잠을 잦고 있었고 나머지 자리에 이리저리 잠을 자고 있는 사람들이 남녀가 섞여 있었다. 신기해하면서 얼른 우리 물건들을 챙기고 베를린을 가기 위해 나왔다.
난 프라하에 다시 가자고 동생한테 제안을 했고 너무 아쉬워하는 내가 안타까웠는지 다시 체코행 기차를 다시 끊고 계획을 잡았다.
그렇게 베를린 집에서 예쁘게 모셔놓은 여권을 챙기고 여행에 김밥은 빠질 수 없으니 열심히 또 준비해서 제대로 된 여행을 즐기자며 완벽하다며 어제와 똑같은 루트로 기차여행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어제 만난 검문원이 여권을 보여달라고 했고 난 당당하게 어제 내가 불법체류자가 아님을 여권으로 보여줬고 이제 되었다 생각이 들면서 저녁에 보면 이쁘다는 카를교를 걸어 다닐 것을 상상하면서 싸가지 온 김밥을 먹기 시작하였다.
도착하기 30분 정도를 남겨두고 나의 몸상태가 이상함을 느꼈다.
온몸은 힘이 빠지고 식은땀이 나기 시작하더니 나의 머리는 깨질 듯이 아프기 시작한 것이다. 무슨 증상인지는 모르겠지만 응급상황이라는 것을 직감하고 동생에게 알리고 얼굴이 하얗게 변한 나를 동생은 어떻게 하지를 못하고 기차가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 정신을 부여잡고 도착을 하지만 나의 몸은 벌써 바닥을 기어 다니고 있었다. 얼마 뒤 동생의 부축임으로 기차에서 겨우 내렸지만 나의 의식은 점점 희미해져가기만 하였다.
어렴풋이 한국인 남자와 사람들이 마중 나왔다는 걸 보고 난 또다시 주저앉았다. 그들은 나를 양쪽에서 팔을 잡고 부축하고 차에 태워 집으로 데려갔다.
그리고는 바로 침대에 나를 누이고 나의 손을 따야 한다며 침통을 가져오는 것이었다. 누군가가 나의 손을 따는데 무섭다며 못 딴다고만 하는 분에게 난 꽉 찌르라고만 하는데 그 여자분은 안절부절못했다.
나의 마지막 에너지를 다하자고 난 나의 몸을 일으켜 세워 나의 손가락 하나하나를 꾹꾹 찔러야 했다.
검은색 같은 피가 콸콸 나오는 걸 보고서야 난 희미해진 나의 의식을 놓고 힘이 완전히 빠져 버린 나의 몸을 침대에 누이고 잠을 잘 수가 있었다.
다음날 아침의 분주한 소리에 일어나 시간은 아침 10시 정도였다.
지인들이 차려놓은 브런치로 아침밥을 먹고 괜찮냐는 지인들에게 정말 덕분에 괜찮아졌음을 알리고 동생과 나는 저녁에 못 본 카를교를 보러 가자고 하였다.
그래도 여기까지 와서 아프다고 아무것도 못하고 갈 수는 없을 듯해서 그렇게 동생과 난 유명한 카를교를 배회하였고 다행히 나의 급체 증상은 깔끔히 없어졌다. 우리가 걱정이 되었던지 몇 번을 나의 건강을 물어봐주시고 난 목사님의 처신으로 처음으로 하는 여행의 동생과의 이쁜 추억을 남길 수가 있었다.
비록 나의 흑역사이긴 하나 10일간의 처음 간 여행에 베를린만 머물 수 없기에 프라하를 강행하고 후회 없음을 강조하지만 나의 일기장에는 기차 여행할 때는 김밥을 먹지 말라는 내용과 가방 안에는 여권을 들고 다니라는 여권의 소중함만 잔뜩 적혀있었다.
그러고 몇 달 뒤 동생의 몇 개의 음대 합격 소식이 전해졌고 나의 여권에 도장이 꽝 찍힌 면을 볼 때마다 그때 생각에 웃음이 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