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건드릴테니 돈 내놔
2002년 여름, 땀을 뻘뻘 흘려가며 고른 집!
둔촌동 옥탑방이 나의 서울 일대기 시작이다. 고시원 방처럼 정말 손바닥만 한 방이다. ‘너무 좁아 친구는 절대 못 데려오겠구나.‘라고 생각하고 엄마와 방을 꼼꼼히 살펴보고 주인과의 짧은 인사와 1000/25만 원 계약을 마쳤다. 유리로 된 현관문은 도둑들 염려에 나도 모르게 움츠려들지만 혼자 살 수 있다는 생각과 긴장감과 안도감이 오묘하게 섞어 설레었다. 가끔 윗 속옷만 입고 옥상을 다니는 아래층 주인이 옥상에 올라오는 것 말고는 안정적이다 믿으며 서울생활을 꾸려나간다. 중고가구 가게에 들러 필요한 가구와 브라운관 TV, 서랍장 등을 샀다. 방안이 꽉 찼다. 근처 슈퍼와 대중교통 물색을 한 후 난 내 방에서 시간 보내기를 처음 시도해보았다. 겨우 서울 직장을 구하고 학연, 지연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내가 굳이 안 져도 될 짐을 내려놓기 위해 난 나 자신에게 오로지 집중하기로 한다. 더 이상 상처 받지 못하게, 나를 세상과 타인으로 하여금...
난 산업디자인을 전공할 때 한국에 들어온 애플 컴퓨터에 있는 그래픽 프로그램으로 포스터를 작업해본 경험으로 졸업하고 들어간 회사에서 사내지 편집과 POP, 유통업 지점들의 모든 간판 등 실내 오픈하면 필요한 디자인 적 물건 같은 것을 제작하는 유통업체에서 일을 했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브로슈어나 카타록 책이나 잡지 만드는 일을 하면서 서울의 있는 작은 회사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있었다.
편집 디자이너의 직업 특성상 밤을 새우는 일이 많은데 일요일을 제외하고 일을 하는 4대 보험도 안 되는 작은 회사에서만 나의 이력서를 받아줬기 때문 두세 명이 하는 일을 난 혼자서 감당하는 서울 생활에 홀로서기를 하고 있었다. 맥 컴퓨터로 인쇄물들을 작업하는 책을 만드는 일이라 표지 디자인이며 삽지들의 글자들의 포인트 크기와 페이지들의 레이아웃 디자인과 글자들 교정까지 외장 가지고 인쇄소를 왔다 갔다 하며 필름 교정까지 하다 보니 언제나 몸은 천근만근이었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활력은 나를 그냥 버티기만 하게 해 주었다.
서울에서의 생활은 부산과는 다르게 사람을 보는 시선이나 대하는 매너들이 확실히 달랐다. 간결하고 세련되고 주어 목적어를 확실히 써서 이해관계에 오해가 없었고 무엇보다 다정하고 부드러운 말로 나의 말 한마디 한마디의 느낌과 기분까지 살펴주는 것이었다. 서울 사람들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섬세할 줄은 몰랐다. 우리 부모님들도 서울분이지만 전혀 아니었으니깐 말이다.
일 년이 되어도 안 고쳐지는 나의 사투리는 거래처의 사장님의 놀림으로 고치게 되었고 아무렇지 않은 듯 표준어를 구사하기로 했다. 갑자기 바뀐 말투로 연락 온 엄마에게 표준어로 구사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듯 넘어갔었다. 나의 가정은 나 빼고 표준어를 집에서도 쓰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나의 말투가 그들 입장에서는 편하게 다가왔는지도 몰랐다.
서울사람들이 이끄는 문화에서 그들만의 느낌을 거침없이 표현하는 무리들의 공간이 나의 어그러진 정서도 잊게 해 주는 듯하고 그들의 실없는 개그들에도 속없이 웃는 날들이 많아졌다. 그래서 서울 생활에서의 새로운 사람들과 나의 아픔을 잊어야 한다며 덮어두고 아무렇지 않은 듯 살아가고 있었다. 부산에서의 사람들의 거친 말투와 남자들의 허세나 무뚝뚝함이 이렇지 않은 성향의 사람들에게 눈이 가게 되고 말이 통하는 그런 사람들과의 대화로 나의 성인 안에 있는 아이의 자아를 성장시켜나가고 있었다.
지역 간의 감정 경계를 조장하는 건 아니지만 정서적 경계선은 있는 건 사실이다.
언제나 매너 있게 나의 의견을 다정하게 물어보는 말투는 예전에는 들어보지 못했고 서로의 기쁨을 존중해주고 배려해주는 사람들과의 상호관계는 존중받는 느낌을 받는다.
회사 동료들과의 술을 먹는 자리에서도 그들만의 매너에서 실수나 인사불성은 전혀 없어서 술로 인해 센티해져 자신들의 이야기들의 공유 꺼림들로 풍성하여지는 분위기가 신기하기만 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희망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세상의 이치와 책임감을 동반한 나의 선택으로 인한 영향력이 선함과 악함까지도 꿰뚫어 볼 수 있는 안목까지도 서서히 배우게 되었다.
난 나로 바로 서기 위해서 이렇게 가고 있구나
난 나를 내려놓는 방법을 알아야 했고 그래야 살 수 있다는 진리를 유연하게 담대하게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때론 나의 자아를 양도해야만 성장할 수 있는 고통에 감사해야 하는 아이러니를 바라보게 하고 나의 성향과 상관없이 거슬러 순종해야만 하는 순수한 의지도 바라보게 하였다.
마음 독립과 경제적인 독립을 해야 하는 것이 나의 가장 급선책이라는 것을 알고 앞으로의 나의 미래를 찬찬히 알아보기 위해서 난 나를 알아야 하기에 나에게 수많은 질문을 하였다.
넌 무엇을 하면서 살고 싶은가?
넌 무엇을 할 때 가장 행복하니?
넌 어떻게 하며 살고 싶니?
나를 위한 울타리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 헤맸고 나를 위한 단단한 울타리를 위해 성장의 태고를 힘주어 매일매일을 잡아당기면서 살고 있었다. 월세나 보험금 청약저축 등 고정지출을 제외하고도 70만 원씩을 저축을 하면서 나의 현실을 야무지게 꾸려나가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친구랑 맥주를 하고 집에 오는 길 어떤 사람의 계속되는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왜 날 따라오는 거지?’
음산함을 느끼고 모퉁이 돌아가면 집이니 얼른 집에 들어가려고 하자
“(탁탁탁) 안 건드릴테니 지갑 내놔”
‘강도다.. 정신 차리자.
뉴스에서 묻지마 살인 때문 밤길 조심하라는 말이 너무 많았는데 내가 당하는구나 생각하고 난 조심스럽게 가방 안을 뒤적이며 지갑을 건네었다. 그러다 내가 쓰고 있던 모자가 땅에 떨어졌다. 그러자 강도는 모자를 주워주었다.
‘휴.. 죽지는 않겠구나.’
생각하고 이 시간이 지나가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강도는 위협만 하고 그의 목적을 달성 후 잽싸게 달아났다. 다행히 현금 5-6만 원이 지갑 안에 있었다. 단순 좀도둑이라 생각하려 생각을 정리하려는데 잘 안된다. 경찰에 신고해야 하는데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하다 혹시 다시 그놈이 올까 봐 후들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옥탑방으로 올라갔다. 방에 들어왔지만 불안감이 가시지를 않았다. ‘여기까지 쫓아오면 어떡하지?’ 생각보다 많이 무서웠다.
‘내일부터 회사에서 늦게 오면 어떻게 다니지?‘
“초범이네. 아가씨. 그런 애들이 근방에 너무 많아 잡지 못합니다. 늦게 다니지 말고 다녀요. “
„네.. 그럼 안녕히 계세요. 경찰 아저씨. “
별 도움이 안 되었다. 휴.. 그때부터 난 밤늦게 돌아다닌 걸 자제하고 날이 조금이라도 늦으면 무조건 밝은데로 다니고 혹시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면 흠칫 놀라며 돌아보는 습관이 생겼다. 여기서 산지 3년째 되는 해다. 비싸더라도 안전한 경비실 있는 데로 가고 싶다. 서울 생활은 역시 만만치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