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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um Mar 29. 2021

동생의 사고

한국 음식의 끝판왕을 보여주겠다고 팔을 걷어붙였다

“선, 미야가 다쳤어!”

“얼마나? 어디서? 지금은 어때?”


지금은 나의 제부이지만 그때는 동생의 남자 친구였다. 동생과 제부는 방학 때 독일의 여러 대학에서 진행하고 있는 Meisterkurs에서 음악적 공감과 교감으로 이성간의 호감을 느끼고 얼마 뒤 데이트를 한다고 한 여름 수영장에 가서 놀고 있었다. 거기서 큰 미끄럼틀을 타다가 사고가 나서 동생이 다친 것이다. 동생과 같이 타자던 제부는 동생이 무섭다고 먼저 타라고 해서 먼저 내려왔고 동생은 무서워서 움찔하다 뒤에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타고 내려왔는데 무서우니 속도를 줄이고 중간쯤에 잠시 주춤하고 있는데 위에서 동생이 안보이자 사람이 출발했고 동생이 있는 중간 지점에서 뒤엉켜서 밑으로 같이 내려왔는데 동생만 쇄골이 부러진 것이다. 너무 아파하는 동생을 보고 제부는 바로 엠블런스에 동생과 함께 실려 병원에 가게 되었고 제부의 전화로 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다행히 척추에는 이상이 없었고 병원에서 수술을 한다고 하지만 동생이 피아니스트라서 피아노를 못 칠까 봐 아주 신중하게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했다. 난 피아노가 문제겠냐며 수술을 해서 건강 회복이 우선이라고 생각이 들어 얼른 수술하라고 재촉을 하였다.

그런데 머뭇거리는 동생의 입에서 어이가 없는 말이 나왔다. 보험이 없다는 것이다.

이제까지 잘 내고 있었는데 무슨 보험이 없다는 거냐며 반문했지만 힘들어하는 동생은 보험이 없다고 했다.

학교를 다닐 때는 120유로만 내면 되는 공보험이라 부담이 없었다가 졸업하고 두배로 내야 하는 240유로는 생각보다 부담이라 해지를 하고 조금 싼 사보험을 알아보려는 중에 사고를 당한 것이다. 10년간 보험을 한 번도 안 빠지고 내다가 해지 한 지 두 달 만에 이런 큰 사고를 당한 것이다. 동생은 본인이 아픈 것도 문제지만 수술비를 걱정하고 있었다.

나도 학생이라 아르바이트로 연명하는 나의 형편도 빠듯해서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수술비가 얼마냐니까 꾸준한 치료까지 500-천만 원 정도였다.

순간 나도 깜짝 놀라서 아픈 애한테 왜 보험을 바로 바꾸지 않았냐고 다그쳤지만 지금 제일 속상한 건 동생이지 싶어 일단 알겠다며 걱정말고 건강만 신경쓰라고 하고 엄마와 얘기를 해야 할 것 같아 한국에 알렸다. 일단 동생이 있는 뮌헨에 한걸음에 가서 보니 동생 모습이 말이 아니었다. 깁스에 움직이지를 못하니 내가 사는 곳으로 데려오고 싶어도 오지를 못하였다. 남자 친구네 가족은 자기들이 동생을 보살펴 주겠다고 하면서 걱정은 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렇게 동생은 결혼도 하기 전에 제부의 집에 머물게 되었다.

동생이 씻을 때는 지금 동생의 시어머니께서 다 도와주시고 속옷까지 다 갈아입혀 주시는 걸 보니 마음이 한결 놓였다. 여기서 내가 도와줄 방법은 정말 하나도 없었다.

급한 응급처치와 통증치료를 병원을 오가며 병행하면서 제부네 집에서 미야는 혼자서 집에서 있는 날이 많았다.

동생이 피아노를 못 쳐서 힘들어하는 걸 보고 제부는 동생이 고양이를 좋아하니 굿즈에 고양이를 넣어서 선물하기도 하고 언제나 동생의 안위를 살펴주었다. 그런 모습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제부와 제부 누나, 그의 부모님은 참 따듯하신 분이다.


“의사가 수술을 하면 잘못될 수도 있으니 약물치료도 권장했고 약물치료는 시간이 아주 오래 걸린다고 오랜 휴식을 해야 한다고 해.”

동생은 피아노를 못 칠까 봐 손가락이 굳으면 안 되니 수술과 약물 치료 둘 중에 고민하던 중 수술보다는 약물치료를 선택하였다. 이게 동생의 두 번째 사고다.


예전 동생은 학교 다닌 지 얼마 안돼서 교회에서 반주를 하다가 옆으로 쓰러져 예배드리던 어떤 간호사 권사님이 본인 차로 바로 응급실로 데리고 가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적이 있었다. 엄마와 새아버지는 동생이 있는 독일에 놀러 갔는데 예배가 시작하기 전 엄마가 먹고 있던 바나나 우유 반을 동생한테 먹으라고 주고 동생은 받아먹고 몇십 분이 지난 후 알레르기 반응으로 쓰러져 기도가 막혀 의식을 잃고 며칠 뒤 깨어난 사건이 있었다. 그때는 응급처치와 입원비 등 많이 나왔지만 공보험이 다 해결해주었기 때문에 가족들은 동생의 안위만 걱정하고 기도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은 문제들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사고와 병원비, 그리고 비자 문제와 그리고 동생의 불찰로 폭탄세금을 내야 하는 것까지 동시다발로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현지 독일인이라도 이 많은 문제는 한꺼번에 해결 못하는데 외국인인 동생이 감당하기엔 스케일이 너무 컸다. 더군다나 사고를 당해 아프기까지 하니 말이다.

문제는 모두 파악했지만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었다. 너무 슬펐다.

독일인도 법적인 문제는 까다로워서 전문인한테 맡긴다고 하는데 동생 인생의 총체적 난국이었다. 난 답답하기만 하니 도와주시는 제부 가족들을 위해 뭐라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한국에서는 잡채나 김밥, 닭볶음탕 등을 곧잘 해서 친구들을 초대해서 나의 음식 솜씨가 나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받았던 터라 음식을 해서 초대하기로 했다.

내가 사는 학교 친구들에게 간간이 파전을 해주었는데 너무 맛있다고 해서 파전을 시작으로 잡채, 닭볶음탕, 김밥, 호떡 이렇게 정하고 하루 종일 걸릴 요리 시간을 위해 미리 한인마트에서 먼저 장을 보고 모자라는 재료들은 근처 슈퍼에서 시장을 보고 8인분의 음식을 위해 팔을 걷어 부쳤다.

역시 내리사랑은 위대하다.

그 많은걸 썰고 자르고 재고 뚝딱뚝딱 바닥에 밀가루 날려가며 완성을 하였다. 너무 힘들었지만 뿌듯하였다.

제부의 누나가 자꾸 도와주겠다고 하지만 독일어로 설명하는 것이 더 시간이 걸려 괜찮다고 안 해줘도 된다고 하고 혼자 한 것이다. 밥 할 동안 김밥 할 재료들을 보기 좋게 썰면서 비린내를 잡아야 하니 우유에다가 닭들을 담가 재어놓고 닭볶음탕과 잡채에 들어갈 야채들도 함께 썰면서 당면 넣을 물을 끓이고 하는 주방에 전형적인 한국 음식을 처음 하는 독일 여자한테 가르쳐 주면서 해 줄 자신이 없어서 4시간 만에 얼른 해서 저녁을 먹어야 하니 혼자 하는 게 좋을 듯하다며 다음에 같이 요리하자고 하였다.

역시 음식들은 그럴싸하게 만들어졌다.

독일 사람들은 파전을 너무 좋아하는 게 이해가 안 갔다. 내가 사는 곳에서도 파전이 유독 인기가 많았었기 때문이다.

그냥 소금 간으로 한 밀가루 반죽에 기름 두른 프라이팬에 반죽을 얇게 펴주고 대파를 뿌리를 자르고 세로로 통으로 3-4개 얹어서 만든 너무 단순한 파전이었는데 신기하기만 하였다. 소스는 간장과 설탕 식초 조금의 고춧가루가 다였다. 독일은 맛있는 음식이 없어서 그럴수도 있다 여겼지만 한국의 음식 하나하나가 이렇게 반응이 좋을 줄 몰랐다.

잡채는 사돈어른들이 좋아했고 김밥은 젊은 사람들이 좋아했다. 닭볶음탕은 메인이라 모두 다 잘 먹어주었다. 김밥은 Vegetarian이 있어서 종류를 두 개를 만들어야 해서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리고 대망의 호떡은 아이들 입맛 제부가 정말 너무 좋아했다. 또 해달라고 하는데 반죽만 해주고 튀겨먹으라고 할 정도였다.

모두가 모인 저녁 한국인과 독일인이 먹는 한국음식 파티는 끝났지만 그때부터 제부의 입맛은 한국인처럼 변하게 되었다. 동생을 위해서는 반가운 일이었다.

동생집에 가면 반찬을 해주고 오는데 20유로짜리 2봉을 사서 멸치를 견과류와 함께 볶아놓고 2주일은 밥에다가 맛있게 먹으라고 해놓으면 제부가 새로운 음식이 맛있었는지 과자 같다며 다 먹었다고 동생이 못 먹었다고 아쉬워하곤 했다.


그렇게 일 년 정도 동생은 피아노를 연습할 시간을 자신의 건강 관리에 양보하고 피아노 치는 시간을 그리워하면서 너무 속상해하면서 정신이 우울하려고 할 즈음 피나는 재활 치료와 함께 조금씩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고 손가락과 팔 힘이 필요한 웅장한 2시간짜리 라흐마니노프의 음악 연주를 못하는걸 안타까워 하였다.

후에 동생 집에 갈 때면 언제나 동생은 사고 후유증으로 팔이 안 올라가서 속상해하는 것이 안타까웠지만 난 감사해하고 있다.

그때의 사고는 척추 사고의 각이었기 때문이다. 자칫 잘못했다면 평생 누워서만 지내야만 했던 그런 지금도 생각만 해도 아찔했던 그런 사고였다. 그 정도 사고가 너무 감사한 일이다. 그리고 몇 달간 제부의 가족들은 동생의 비자 문제 세금 문제까지 다 해결해 주었다.

동생의 배우자는 가족들까지 참 따뜻한 사람이라는 것이 다행이고 감사하다.

동생은 행운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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