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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말라야노을 Dec 03. 2023

삐삐는 툰베리를 낳고, 고군분투 유전자의 진화

1945년생 삐삐 롱스타킹의 고군분투


삐삐 롱스타킹(Pippi långstrump)은 스웨덴 동화작가 린드그렌(1907-2002)의 원작소설로 70개가 넘는 언어로 번역되어 출판되었으며, 지금까지도 전 세계 어린이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불멸의 명작이다.

스웨덴 20 크로나 지폐 속 린드그렌과 삐삐(이미지 출처: 나무위키)

스웨덴이 지금은 평등한 사회를 대표하는 나라로 종종 인식되고 있지만, 삐삐 롱스타킹이 첫 출간된 1945년 정도만 해도 지금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으며, 어른들에게 고분고분하지 않고 자유분방한 여자 어린이 이야기는 당시에 꽤나 파격적이었고, 어린이 정서에 좋지 않다는 비난도  많았다고 한다.


삐삐 롱스타킹은 9살 소녀의 똥꼬발랄 모험이야기를 다룬 타지 어린이 동화이기도 하지만, 사회적 변화를 갈망하는 린드그렌의 가치관이 녹아있는 사회풍자 어른이 동화이기도 하다. 얼굴은 주근깨로 덮여있고 말을 번쩍번쩍 들어 올릴 정도로 힘이 센 여주인공 캐릭터에서부터 이미 사회적 편견에 대한 저항이 느껴지며, 어린 삐삐를 함부로 대하거나 이용하려는 어른들을 시원하게 응징하는 스토리는 기성세대의 억압과 권위주의에 맞서는 사회적 약자의 유쾌복수극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사회적/시대적 문제를 고뇌하는 린드그렌의 모습은, 그녀가 2차 세계대전 중 6년간 적었던 일기에서도 느낄 수 있는데, 세상의 고통에 대해 한 개인으로서 느끼는 무력감과, 인권 및 평화를 갈망하는 그녀의 마음이 17권의 일기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다고 한다.

“끔찍한 무기력감이 모든 것들을 짓누르고 있다. 라디오는 온종일 뉴스를 쏟아내고, 남자들은 징집됐다. 신이시여, 광기에 사로잡힌 불쌍한 우리를 구원하소서"(린드그렌의 일기 중에서)


스웨덴 사람들이 린드그렌을 화폐에 담아 기억하고 있는 이유도, 단지 그녀가 남긴 작품들의 흥행성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사회적 스케일에서 지구적 스케일로 진화한 유전자, 2003년생 툰베리



2003년에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태어난 20살의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Greta Thunberg).


아버지의 영향으로 8살 정도부터 기후변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고, 2018년 폴란드에서 열린 기후변화 관련 국제회의(COP24)에 참가해 환경변화 대책에 미온적인 정치인들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며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으며, 트위터를 통해 푸틴, 트럼프 대통령과 설전을 벌이면서 더욱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16살이 되던 2019년에는 세계적인 기후 관련 동맹휴학 운동을 이끌면서 타임지 올해의 인물로 선정되었으며, 같은 해 노벨상 후보에까지 올랐었다.


출처: 나무위키

급격한 유명세를 타면서 툰베리에 대한 평가와 호불호도 극명하게 나뉘었다.


일부 언론에 의해 이용당하는 세상물정 모르고 철없는 부잣집 소녀로 툰베리를 바라보는 이들도 있고, 천박한 자본주의와 기성세대에 맞서 고군분투하는 난세의 영웅으로 평가하는 이들도 있다.


그녀의 행동방식에 대한 평가도 극과 극으로 갈라진다.


환경보호를 위해, 연료를 많이 소모해야 하는 비행기를 타지 않고, 기차를 타거나 길에서 히치하이킹을 하는 그녀의 행동을 쇼맨십으로 보거나, 민폐 유발자로 비판하는 사람들도 많다.  


반면, 툰베리를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은, 그녀가 세상 사람들에게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널리 알리는데 큰 역할을 해낸 것은 사실이며, 개인이나 단체의 여러 가지 환경보호 행동들을 실질적으로 이끌어 낸 공로를 인정해야 된다는 의견을 가지고 있다.





스웨덴의 라떼아빠들

스웨덴으로 가기 전에 뉴스기사나 SNS를 통해 스웨덴의 사회문화에 대해 나름 많이 알아보고 갔음에도, 직접 경험해 보는 "스웨덴의 평등"은 무척 많이 낯설었다.


스웨덴 도착 얼마 후, 학과장교수에게 면담을 요청하는 이메일을 보내놓고, 시간을 알려주는 대로 교수님 방으로 찾아갈 생각을 하고 있는데, 내가 편한 시간이 언제인지를 물으면서 내 사무실로 오겠다는 답장이 왔다.

스웨덴에서 지내는 동안 윗사람이 일방적으로 시간을 정해주고 자기 방으로 오라고 하는 대화를 들은 적이 없었다. 교수와 대학원생들이 모여 회의를 하는 도중에 회의가 너무 길어지거나 퇴근시간이 가까워오면, 빨래를 해야 될 시간을 이유로 먼저 자리를 뜨는 학생들도 쉽게 볼 수 있었다.  나에게 주어진 권리를 행사하는 데 있어서 직위나 나이가 전혀 장애물로 작동하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직위나 나이 사이의 차별만 없는 것이 아니다.


스웨덴 어린이들은 아주 어릴 적부터 인종차별에 대한 교육을 엄격하게 받고 자란다. 사용하면 안 되는 단어 하나까지도 구체적으로 교육을 받는데,  예를 들면,   "검은색 머리"처럼 오해의 소지가 있는 단어들은 사용이 금지되어 있다.

    

성평등을 제도화하여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는 해법으로 성공적으로 정착시키다.


스웨덴에서는 출산 후 90일은 부부 중 한 명이 의무적으로 휴직을 해야 하며, 약 1년 정도의 육아휴직 기간 동안에는 월급의 80~90%를 받도록 제도화되어 있다.

부부 중 누가 휴직을 하는 것이 수입에 유리한지를 고려하면서 아빠의 육아휴직률이 점점 높아졌다.

물론, 다양한 보육 지원정책 없이 월급혜택만으로 저출산 문제를 해결한 것은 아니지만,  적정 수준의 소득이 보장되고 경력단절에 대한 불이익이 없도록 제도화하면서, 부부의 육아분담률이 자연스럽게 높아졌고 사회문화적으로도 남자의 육아가 보편화될 수 있었다.


스웨덴에서는 한 손에 라떼컵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 유모차를 밀면서 공원으로 아침산책을 나온 남자들의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평등이 뿌리내린 스웨덴에 아직도 평등청과 평등장관이 있는 이유


성평등이 세계최고 수준이라고 평가받는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의 스칸디나비아반도 대학모임에서는 지금도 해마다 한 번씩 여성들의 사회적 평등을 점검하는 공동회의가 열리고 있다. 대학교에서의 여교수 비율이나 근무환경, 성차별 문제 등을 발표하면서 서로 정보를 교환하기도 하고 긴 토론의 시간을 갖기도 한다.


사회적 평등의식이 깊이 뿌리내리고 불평등을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스웨덴에는 여전히 평등청과 평등장관직이 있으며, 평등을 국가의 최고 어젠다 중의 하나로 끊임없이 관리하고 있다.


사회는 수많은 생각과 이해관계가 얽히고설켜있는 곳이다 보니, 전체가 어떤 하나의 방향으로 움직여 새로운 변화를 이루어내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더불어, 아무리 좋은 제도를 정착시킨다 해도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지 않고 방치한다면 본래의도가 변질되거나 한순간에 무너져 버릴 수도 있다.


삐삐 심은 데 툰베리 난다

동화 속 삐삐와 툰베리는 기성세대에 맞서 고군분투하는 점에서 서로 닮아있다.

린드그렌의 바람이 삐삐에 녹아든 후로, 동화 속 삐삐가 현실 속 툰베리로 이어지기까지 75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지만, 그래도 삐삐를 심었던 스웨덴이기에 툰베리를 낳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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