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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루츠캔디 Dec 28. 2023

내 안의 동자, 동녀 키우는 일

#캐나다이민, #육아, #심리, #부모, #결혼, #출산

육아를 하는 것이 내 안의 잠들어있던,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내 안의 놓쳐버린 시절을 되새기며, 재조합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분명하지만, 쉽지 않음 또한 밝힌다.

엄마와 아빠와의 관계에서 받은 상처, 애써 잠재워둔 나의 무의식이 낮은 정도의 감정수준안에서 곱게 해석되고, 곱게 재조합될 수 있는 환경인지 여부가 또 다른 변수이다.

일단 먹고 살기 바빠 죽겠는데, 자꾸 마음속에서 애써 묻어놓고 잘만 살아가고 있던 나의 어린시절이 불쑥 튀어나오고, 나조차도 처리하기 힘든 강렬하고 부정적인 감정으로 쳐올라오면 내 앞에 있는 아이들은 또 다른 희생양이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엄마와의 관계에서 엄마가 어린시절에 장난감을 어지럽힌 나를 견디지 못했다면, 맘껏 노는 아이 모습에 대한 귀여움 보다는 장난감을 정리해야한다는 강박적 생각때문에 손에서 장난감 정리를 놓을 수 없는 상태가 된다. 또, 식사시간에 엄마나 아빠와의 관계에서 다정한 대화보다는 훈계나 비교, 구박이 대다수의 대화 내용이었다면, 나도 모르게 아이와의 대화에서 훈계나 비교, 구박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기도 한다. 그건 당신과 아이의 일이 아니라고, 당신과 부모의 해결되지 못한 과제가 아이에게 투사되는 것이라고 아무리 말해 주어도, 표면적으로는 이해하지만, 그래서 뭐 어떻게 해결해야한다는 건데, 하는 생각이 들며, 바른 방향을 모색하기 힘들어하신다.


일단 먹고 사는데 걱정이 없는 환경이어야하는데, 뭐가 그렇게 빡빡할까

한국에서 20,30대에게 처해진 현실이다.

부부가 열심히 달리는데, 치솟는 물가를 벌이로는 감당할 수 없었다. 주식, 물론 수혜자가 될 수 있지만, 내가 수혜자가 된다는 것은 누군가의 희생이 필수조건이 되는 것이다. 큰 그림을 볼 때, 무한정으로 돈을 찍어 내는 것이 아니라, 내 주가가 오르면, 다른 파트의 주가는 내려가는 것이며, 종목을 아무리 잘 골라 솔솔한 이익을 챙길지언정, 그것이 언제까지인 지 알 수 없다. 문제는 한번 큰 돈을 맛보면, 그 외의 돈은 돈 같이 보이지도 않아보이는 큰 문제가 생긴다. 일해서 돈버는 모든 행위가 전근대적 발상이며 바보 같아 보인다. 애초에 본인의 노동의 이유가 돈 뿐이었다는 사실, 속 빈 강정, 텅 빈 내면을 인정해야할 일이다. 돈이 세상 전부인 것 같고, 여타 가치들은 추구 할 필요 없는, 애초에 있을 필요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집, 한국처럼 급상급감이 있는 곳이라면 투자해 볼만 하다 하지만, 사실 캐나다 특히 내가 살고 있는 위니펙은 급감할 일도 없지만 급상 할 일도 없다. 항시 초조함으로 내 소중한 시간들을 그래프만 쳐다보며 보내버리기에는 일상의 소중함을 너무나 느껴버린 후이기에, 돈에 너무나 많은 에너지를 흝뿌리며 살 고 싶지 않다. 그런 사람들이 오면 좋은 것이 이민이다. 특히, 대도시를 선택지에서 버리고 생활에 불편함도 없고, 아시안도 상당수 분포한 중견도시 이상의 캐나다 도시들이다.


단, 대도시가 주는 화려함이 없기에, 내면에 귀기울이게 되고, 그럼으로서 얻는 깨달음도 있지만, 깨달음 전에는 고통이 동반된다는 사실을 꼭 염두하셨으면 좋겠다.


내 안의 동자, 동녀를 달래주고, 사랑해주기위해 나는 카운셀링을 권유한다. 객관화할 수 있는 제 3자를 통해 솔루션을 얻고 해답을 얻기위해서가 아니라, 사느라 뭉개져버린, 외면당해버린 자기중심성을 위한 시간을 내가 산 안전한 공간에 맘껏 할애한다는 것 자체가 치료이며, 내 안의 내면아이를 성장시키는 과정이다. 그 때로 돌아가 기억을 재조합하고, 왜곡을 걷어내며, 진정한 내 부모와 나 그리고 내 아이의 진상을 마주하게 됨에 꼭 우울이나 불안을 동반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모든 부모는 부모 되기 전, 그리고 부모역할을 하면서, 또 아이들을 모두 독립시킨 후에도 모두 상담 받아야한다고 생각한다. 좋은 음식을 먹여주고, 좋은 목욕제로 목욕을 하고, 나를 위한 운동과 명상의 시간을 주는 것도 도움이 된다. 결국 보면 모두 자기중심성을 일부러, 의식적으로 확보하는 시간을 두는 것이다.


더욱이, 캐나다에서 아시안 여성으로서 사회적 그리고 가정안의 개인적 의무를 짊어지고 사는 것은, 타인종의 그것과 다르다. 이 무게 또한 가볍지 않음을 말하고 싶다. 우선, 한국에서 갓 이민 온 사람들, 혹은 캐나다에서 오래 살았어도, 한국 커뮤니티만 의존하고 사는 사람이라면 깨우치지 못할 부분인 것이, 그래서 평생 그렇게만 살수 밖에 없는 특징...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힘이 들다. 아니 내가 관계 안에서 약자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힘들어 한다. 남성이 많은 집단에서 아이가 있는 기혼녀로서의 사회생활이 힘든것을 집단생활을 한 사람들이라면 알고 있다. 특정 전문직도 힘이든데, 누구에게나 대체될 수 있는 일반 사무직이라면, 머리색 언어라도 같은 한국에서 집단 안 소수로 사는 것도 힘든데, 하물며 외국에서는 어떨까? 가정안에서 부부갈등의 희생양이 아이가 되듯, 사회속에서 물리적 약자, 그리고 관계적 약자가 누구인지 따져볼 일이다. 누가 내 손을 잡아주며, 나와 친구하고 싶을지, 도움이 필요하거나 부축이 필요해보여서가 아니라, 나의 밝게 빛나는 가치를 알아보고, 친구하고 싶어 달겨들지. 항상 세상은 울부짖을 때를 제외하고, 평소에도 소수인의 말을 들어주고, 존중해주고, 보듬어주려 노력하지 않는다. 내가 언급할 때가 아니면, 나의 의견을 그냥 그렇게 묵살되고 만다. 영어를 잘하는 것이 필요없을지도 모르는데, 어차피 너란 사람 자체에 관심이 없고 묵살하는 세상에 살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자꾸 영어 점수가 몇점이네를 따지는 것 자체가 아이처럼 아직도 세상의 중심은 나 라는 생각에서 오는 착오적 발상일 수 있다. 내 목소리에 정작 관심없는 세상에 살고 있는데, 내 발음이 어떻네, 내가 어떤 영어단어를 구사하네, 문법이 옳네 그르네 판단하며 스트레스 받는 건, 그게 바로 유아적발상 아니고 무언가. 영어를 신경쓸 필요가 없다는 게 아니라, 그만큼 아시아가 아닌 환경에서 사람들과 섞여살면서 겪는 존재감이다. 남자의 경우도 별로 다를 것이 없다. 나의 능력이 부족해서라고? 그러면 차라리 좋으련만, 상관 없다. 아쉽게도...모두가 인정하는 공식적인 사회적 분위기이다. 이런 환경에서 살면서, 내면 아이까지 방임당하고, 위로받지 못하고 산다면, 삶의 질은 솔직히 한국에서의 그것보다 낫다 볼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분위기를 모른 채, 스스로를 자책하고 자존감만 깎아먹고 살고 있다면, 나의 경우에는 20살 이후 성인이 되어 자의적으로 이민 온 케이스 이지만, 부모가 여기가자, 하면 여기 가야하고, 저기가자 하면 저기가야하는 성인기 이전의, 즉, 1세 1.5세로서 이민 온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그들이 남몰래 싸우는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사회적 의무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짊어져야하는데, 묵인 당하는 것, 내가 없어도 이 사회가 돌아가는데 아무 문제가 없을 것 같지만 이 곳으로 나를 떨어뜨린 부모로 인해 버텨야하며, 인간들의 단체질서상 내가 우위를 점령하는 것이 원천적으로 봉쇄당하는 것 같은 그 보이지 않는 계단같은 것 말이다. 대부분 청소년기 이전, 이후 시기라 자책을 하며, 버틴다. 내가 공부잘하면 나아지겠지, 내가 키가 더 크다면 대우가 나앗겠지, 내가 영어 못해서 이 수모를 견뎌야하는 거겠지. 아니다. 모두 다 자기중심성에 같힌 탓이 내리는 오류이다. 내가 공부를 잘해도, 내가 키가 커도, 내가 영어를 잘해도... 그 자체가 문제가 절대 아니니, 원래 이 쪽 사회 구조자체가 그렇게 생긴 것이며,  다수대 소수의 대결에서 밀리는 것 뿐이다. 세상의 나에 대한 대우는 사실 나의 능력과 크게 상관 없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너무너무너무 중요하다. 이것이 어렵기에 바로 외국 경험이 있지만, 한국 가서 살기를 결정하는 사람들의 주된 이유이다.  인정해버리고 살면 될 일이다. 인정받기 위해 노력하는 것 따위가 얼마나 가치없는 일인지는 최대한 빨리 깨달을 수록 좋다. 


신기한 사실은, 남들은 그런 나를 나 자신보다 더 빨리 알아 챈다. 내가 세상질서에 편승하려하고, 우위에 서려하고, 이겨버리려고 하면, 곁을 주지 않고, 너 따위가 어림없지 라며 밀어 버리고 나보다 더 강한 힘으로 나를 밟아버리려 하지만, 내가 내 내면에 귀를 기울이고, 내 스스로를 행복하게 하기위해 살면, 사람들도 세상 질서에서 자유로운 나를 알아보고, 나의 진정한 친구가 되려 하더라. 그들도 내 안의 동자, 동녀를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해 나를 돕더라, 나를 닮고 싶어하고, 마음으로 좋아하더라. 맥도날드, 공공장소에서 활동하는 슈가대디 물색하는 동양인 호어라 안아주고 돈줘야하는 존재가 아니라(사실이다. 오랫동안 굶주린 그들의 사고방식이다. 알면 알수록 기가 막힌다.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펼쳐져있지 않다. ) 진정한 나 소연으로서. 나의 필터링이 얼마나 촘촘한 지 아는 사람이라면, 내 말을 믿어도 무해하다는 사실 또한 알아채실 것이다.


 내가 행복한 일을 하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고, 내가 나 자신을 대우해 주지 않은 채, 사회적 인정을 먹고 살겠다고 덤비면, 이 타국에서의 삶은 처절하고, 찢기고, 괴롭다.


확대적으로 보면, 이 말은 한국에 살고 있는 외국인에게도 해당되는 내용인 것 같다. 또 외국인이 아니더라도, 다수의 사람들과 어떤 형태로든 다른 사람이라면, 절대로 자신의 다름을 능력치로 극복하려는 시도 자체가 위험하다는 점을 생각해 보고 싶다. 세상은 마치 내가 다른 사람과 다르게 취급받고 있으니, 주류사회에 편승되려 노력하는 것이 당연하듯, 남들과 최소 비슷하게 살아야한다고 나를  각종 매체들을 동원해 부추겨 대지만, 정작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 그들이 그들의 질서를 유지하고, 우위를 놓지 않기 위해 벌이는 대중을 향한 가스라이팅에 불과하다는 것 정도만 새기고,


내 삶을 살거다. 내 영혼이 살아 숨쉬게 할거다.


 나에 귀기울이는 것, 내 안의 동자 동녀를 웃게 매일 매일 시간을 내어 나 스스로를 구체적으로 훈련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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