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후루츠캔디 Jan 03. 2024

07 내동생을 위한 모두의 성금이 내마음에 수치심 줬나

#캐나다워킹홀리데이,#친구,#캐나다,#해외공부,#단체모금의그림자

내 마음 상처로 인해 내가 평생 고생할 수 있다고?

에이, 벌어질지 안벌어질지도 모르는 일을 뭐하러 걱정하나

그냥 지금처럼 사는 것도 나름 나만의 색깔이고 내 인생이야

그냥 덮어버리려했다. 사람은 저마다 아픔과 단점이 존재할지도 모른다고,

그러나 잘 숨겨버리면 그만이라고, 앞으로 더 티나지 않게 꽁꽁 묶어 마음밖으로 튀어나오지 못하게 할 거라고


그때에는 꽁꽁 숨겨버리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했지만, 사실 정답은 그 반대였다.

지금부터 나의 상처에 대한 이야기, 내 관계맺기 패턴에 대한 이야기, 캐나다 워킹홀리데이와 캐나다이민이 이루어졌던 배경과 근본적인 원인, 캐나다 삶이 성공적이라 자부하는 이유가 될 수 있는 이야기를 낱낱이 까발리겠다. 시간 순서일 수도 있고, 아픈 순서일 수도 있고, 그래도 말하기 쉬운 순서일 수도 있다. 내 마음이 시키는대로 말하는 것이 정답일 거라 생각한다. 내 마음이니까


모두 캐나다이니까 허락된 마음이었다고 생각한다.

캐나다가 준 내 생에 가장 큰 선물은 바로 스스로에 대한 수용, 치유인 셈이다.




그 당시, 스물 한 살 까지 주변에 나를 챙겨주는 이 하나 없이, 그저 잃어버린 아이 (lost child) 상태로 살았던 내가 느끼는 가장 대표적인 감정은, 외로움과 수치심이었던것 같다. 내 문제가 들킬까봐 언제나 나는 삐져나오는 수치감을 감추려 노력하며 살아왔고, 화려한 겉치레로 그 모든 것들을 가리려고 했다. 항상 부끄러움이 많은채로 살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힘들었던 건, 사진속에 또는 거울속에 비춰진 나 바라보기였다. 친구가 같이 사진 찍자고 하는 것이 너무 싫었다. 막상 사진을 찍고 한 참 지난 에 보면 아무 탈없는 멀쩡한 모습이었지만, 사진 찍은 직후, 카메라나 사진 한 장 속에 찍혀진 나는 정말 초라하고, 보잘껏 없고, 수치스러워 내 스스로 나 자신을 마주하기 힘들 정도였다. 특히 주변친구들은 활짝 웃고 있는데, 내 표정은 영락없이 어색했다.  나는 왜 그렇게 나 자신을 보는것이 그렇게 쑥쓰러웠으며 수치스러웠을까...주변친구들은 모두 소연이가 제일 잘 나왔다지만, 나는 누가 나를 찍는 행동이 너무 싫었다. 특히 허락없이 내 모습이 사진 어떤 면에 걸쳐져있을 때에는 영락없이 분개했다. 얼굴표정도 항상 어색했다. 아마도 내 스스로의 맘속 수치심이 혹시라도 내 허락 없이  몰래 삐져나와 있을까봐 얼굴을 이리 구기고 저리구기고 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웃는 얼굴이 나올 수 없었던 것 같다. 얼굴 이곳저곳에 단순 흠이 있는 모습을 보기 싫어서가 아니다. 진짜 자신이 무방비상태 그대로 노출되어질까 노심초사 하던 것 같다. 그런 나 위에, 또 그런 나 자신을 한번 더 부끄러워했던 것 같다. 




수치심에 원인이 되는 대표적인 사건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거다 그거. 백혈병 걸린 내동생을 위한 전교생의 후원금 모으기 대회. 엄마 아빠는 그 후원금을 통해 경제적인 도움을 조금 받을 수 있었지만, 동생과 같은 학교에 다녔던 나는 내동생을 제외한 700명이 넘는 전교생앞에 졸업식을 앞둔 6학년까지 아픈아이의 언니여야했다. 아픈아이의 언니, 친구들에게 도움을 받은 사람으로서 나는 왠지 모를 책임의식과 수치심 그리고 죄책감을 동시에 느꼈다. 다행히 그 점을 이용해 나에게 해를 가하던 나쁜아이들이 대체로 없던 따뜻한 동네에 살아 누구하나 나에게 책임의식을 강요한 적은 없었지만, 착한 아이였던 나는 항상 친구들에게 좋은 사람이어야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 당시 천만원에 해당하는 도움을 받았는데(한 사람앞에 평균 만원정도 된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누군가는 10만원을 내기도 했으니 1/10의 참여율 정도 되었다고 본다. 약 30년전, 모두가 어려웠던 IMF직전이라는 상황을 생각해보았을 때, 꽤 무게가 되는 돈이 모였던거다.), 그 천만원어치의 성의와 금전은 그것받은, 매달 수천만원에 해당하는 치료비와 병실입원비를 감당했던 내 부모가 아닌, 정작 학교에서 매일 얼굴을 마주해야하는 직접적인 상대자인 나에게 떨어졌다는 사실이 4,5,6학년, 약 2년 반 동안 얼굴 따가운 경험이었다.


초등학교 졸업식 때, " 아 나는 이제 더이상 이 아이들에 의한 책임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라는 생각에 마음이 가벼워졌으니까.


평등한 관계였던 내 친구들, 나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유난히 나를 좋아하던 친구들과 내 의지와 상관없이 입장이 바뀐 느낌이 들었고, 구걸한 적도 없었는데 내가 구걸한 것 처럼  되어버렸다는 생각도 들어 자존심이 구겨지고 수치스러웠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당시가 IMF가 터진 시기이기도 했기에, 다들 가정형편이 좋아지기보다는 기울어지고 있는 상황이라는 뉴스를 접하기도 했던것이, 그럼에도 나를 위한 성금모음이 몇 주간 지속되었다는 사실이 내 어깨와 등을 조금 더 무겁게 했던 것 같다. 그 시절, 다른반 아이 중 하나였던 '최은영'이라는 아이는, "소연아, 너는 우리가 모금했으니 우리삼촌이 그러는데, 너 우리한테 잘해야한데" 라는 엄포를 지속적으로 나에게 놓기도 했었지만, "이혜란"을 비롯한 내 주변 친구들은 " 최은영! 너 우리엄마가 그러는거 아니라고" 했다며, 나에게 최은영이란 애랑 같이 놀지도 말고 너 쟤말 듣지도 말라고 했었다. 그때에는 얼어있는 채 였기에 혜란이가 왜 그 상황에서 화를 내는지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참 감사하게도 내 주변에는 정의로운 부모님과 정의로운 아이들이 많이 있었던 것 같아 정말 다행이다. 기부참여여부보다는 사실 당사자와 가족들에게는 "내가 너를 진심으로 생각하고, 아끼고 있어" 라는 주변인들의 진심과 대응이 큰 힘이 됨을 내 어릴 적 산 경험으로 느꼈다.


지금 생각해보면 구겨진 자존심과 최은영과 같이 남을 도와주기 심리적으로 어려운 환경에 놓여진 아이도 있는데, 관심을 독차지 한 것에 대한 죄책감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여러방면에서 시도했던 것 같다. 이 이후로 반장을 도맡아 화장실청소 감시와 같은 일을 한 학기 내내 해 학급을 위해 봉사하기도 했고, 안하던 공부를 시작해 내내 전교일등을 찍기도 했다. HOT 춤도 잘 추고 노래도 잘 불러 아이들 앞에서 공부도 잘하고 멋지기도 한 우리반장, 인기 최고가 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은 내 안의 수치심을 덮기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성인이 된 후, 심지어는 이 수치심의 원인이 된 사건을 분석하기 직전에까지 턱없이.. 턱없이 부족하기만 했던 것 같다.


지금의 내가 어릴 때와 같은 경험을 한다면, 어릴 적 내부모와는 달리 외부리소스를 활용하려하기보다는 내 힘으로 모든 것을 덮으려 노력할 것 같다.  때의 상처때문이다. 그리고 술에 취해 독단적이고 경솔하게 담임샘을 무조건 찾아가기보다는, 해당 학교에 속해있는 나의 의중을 먼저 묻고 결정했을 것 같다. 또, 전학을 고려하기도 했을 것 같다. 그런생각 저런생각을 할 수 없이 1명의 아이의 아픔, 그리고 자기자신들의 입장에, 술에 취해있던 생각짧고 나는 안중에도 없던, 보호받아 마땅한 어린아이인 나는 안중에도 없던 내 부모가 조금은 밉다. 그 때의 경험으로 나는 일대 다의 관계에서,  짓지도 않았는데 마치 죄지은 사람 같은 마음이 들었다. 대인관계에서 상대를 대할 때, 조금 얼굴에 그늘이 생긴 것 같고, 책임을 다하려 노력했던 것 같고, 착한 사람,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저 사람이 나랑 친구해줄거라는 생각이 생겼던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이 내 험담을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좀 더 커서는 내 안의 수치심을 들키지 않으려는 태도가 수치심이나 죄책감으로 사람을 조종하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에게 들켜 크고 작은 우여 곡절을 겪기도 했는데, 그 중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시어머니의 횡포였다. 그리고 엄마가 나쁜 것은 알지만, 그 안에서 크고 자라 아는 방법이라곤 그거밖에 없는 지금의 내 남편으로부터이다.







대학에 입학 한 후, 우연한 학교 행사에서 만난 의류학과 1학년에 다니는 민정이랑 친구가 되었다. 민정이는 나를 좋아해주었다. 대학에 들어와서 만난 내 친구 민정이, 그녀는 나를 너무 아껴주었다. 그렇지만 나는 나를 아껴주는 그녀가 너무 부담스러웠다. 한번도 누군가에게 아낌을 받아보지 못해서였던것 같기도하다. 엄마가 초등학교 선생님이셨고, 아빠가 사업체를 운영중인 집의 큰 딸이었는데, 나는 민정이가 항상 정장 또는 딱 보아도 엄마나 아빠가 신경써줘 입혀준 것 같은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볼 때, 부러워서  " 와 나와는 차이나는구나, 나는 초등학교 4학년때부터 엄마와 아빠가 없었는데, 엄마 아빠는 내 동생 신경쓰느라 나는 엄마 아빠 없이도 티안나게 잘 살아야했는데, 정상적으로 크는 아이들은 이렇구나" 하며 더욱 초라함을 느꼈다. 내가 명품 가방을 매기 시작하기 이전 시기였다. 내가 맨 가방을 보며 민정이는 " 나 너랑 같은 가방 살까 하는데 사도 돼?" 라며 물었다. "나, 기분 안나빠, 먼저 물어봐줘서 고마워, 당연히 되지" 라고 말했다. 그녀는 나를 격려하기 위해서 나에게 친절하게 다가와주었던 것일까, 진짜 내가 좋아서 그런 것일까? 아냐, 그럴리없어. 내 겉모습을 보고, 내 성적을 보고, 사슴과 여우가 동시에 공존하는 여성스런 내 외모를 보고, 내 성실성을 보고, 나를 좋아하는 것 일 테지만, 진짜 나를 알면, 내 엄마 아빠가 아픈 동생을 돌보느라 고생해 육체와 정신이 망가지고, 서로가 서로를 두들겨패고 사는 꼴, 그 안에서 보이지 않는 아이로 커 방임되고 상처받아 초라한 내 진정한 모습을 본다면 나를 좋아할 리 없을거야, 그만두자" 며, 민정이에게 이별을 선고했던 경험이 생각난다. 그런 내게 민정이는 "소연아, 난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니가 그렇게 결정했으면 하자는 대로 해줄게, 난 네가 스스로 예쁘고 사랑스럽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어, 니가 쑥쓰러워할때 난 마음이 너무 아파" 라고 해준 답변은 17년이 지난 지금도 내 눈에 머리에 생생하다. 내가 우리집사정을 말 했을리 없는데 어쩐지 그녀는 내 마음 저 깊은 곳 상처를 아는 듯 했다. 순간 관계단절이 시급했다. 나의 마음을 들킨것 같아서이다. 내 수치심, 철저히 숨기려 에너지 쓰는 나인데, 수치심을 들키는 순간 관계는 당연히 파해야했다. 내 수치심을 나와 관계된 누군가가 알게되는 순간, 그것이 공기타고 말타고 일파만파 퍼질것이며, 지금까지 나의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 그렇게 되느니, 내 수치심을 들킨 건, 그녀정도에서 멈추고, 이제 더욱 철저히 관계를 정리하며 살아야한다. 긴장을 늦출수 없다. 관계속에서 숨쉬고 자유로울 수 없지만, 저 밑에 비참한 감정이 들키는 것 보다는 그 편이 낫지 않은가. 십여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 그녀를 떠올리며, 마음이 상처로 가득 차 수치심으로 얼룩졌던 나의 스무살,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으로 내가 사랑받았던 기억에 늘 감사하다.


동갑 남자친구가 있었던 민정이, 민정이와 관계가 끊어지고, 일 이년 뒤 나는 학교를 계속다니고 있었고, 민정이는 미국으로 유학갔다는 이야기를 그녀의 같은과 친구에게서 들었다. 그래, 민정이는 내가 없어도 사는구나, 칫. 그녀가 선한 의도를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에 훌륭하게 성장해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과 믿음을 주는 사람으로 성장했으면 좋겠다. 잘살고 있지?나야나 네가 알던 아동학과 그 아이. 감사해 강민정이야. 그 때 내 쑥쓰러워하는 모습을 보며 화내는 너를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제 네가 나를 보며 얼마나 마음아파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아.



매거진의 이전글 06 Me time, 치유의 힘을 느낄 기회를 놓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