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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루츠캔디 Jun 28. 2024

타인종에 대한 경계심을 녹인 진심 어린 손편지

특정인종우월주의안에서 상처받은 내 마음이 말끔히 치유되다.

나는 이 [자아해체 그 후] 매거진에서 어린시절 그리고 캐나다 이민초기의 상처를 마주하고, 흘러보내고 난 뒤에 변화된 내 일상속 감정과 생각, 느낌을 낱낱히 기록하고 있는 중입니다.




아이의 학기 말이다.


아이는 담임선생님이 주신 성적표와 상장, 그리고 선생님의 격려카드를 받아왔다.


예전의 나 같았더라면,

"그저, 형식이겠지, 이 선생님 일 열심히 하네" 라며, 선생님의 행위를 사무적 의례라고 생각하고 끝냈을 것이다.

실제로 그런 경험들이 여럿있었다. 모든 선생님이 손편지를 써주신것은 아니지만, 몇몇 따뜻한 선생님들의 헤아릴 수 없는 마음의 가치를 어떤 면에서는 'She is a hard worker' 라는 말로 퉁치며 살았다. 그것이 나와 아이에 대한 외부세상으로부터의 보호라 생각했을때니까, 이민생활에서 타인종에게 받을 상처를 최소화하는 방법을 선택했을 것 같다.


너는 백만명중에 하나 있을까말까한 사람이야!

너는 정말 타인을 존중하는 멋진 친구이고, 매사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을 해 내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해..지혜로운 아이!

올해 네가 이룬 모든 성취들은 나에게 있어 커다란 자긍심이란다.(전과목별 각 4영역, 총 28영역에 all 최우수 점수뿐만 아니라, 학생으로서의 Personal Management Skills, 능동적 참여도와 리더쉽,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책임의식을 갖는지 여부에 대해서도 최고점수, 뒤의 3 영역이 고학년으로 갈수록 더욱 세밀하게 평가되는, 공부잘하는 것만으로는 50점밖에 안되는 캐나다이다.)  

멋진 여름 보내길 바래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따뜻한 선생님을 만나 격려받은 한해를 보낸 아이를 통해 선생님에 대한 감사함을 진심으로 느낀다.  미묘한 뤼앙스를 파악하는바, 솔직히 이 정도 칭찬은 립서비스라 여기기에는 무리가 있다.


열심히하고 잘해서 인정받고, 칭찬받는 일이 외국에서는 당연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외국인으로, 소수로 살아가는 일이 서러운거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허무하고 무력한거라는 거다. 같은 감정으로 힘들어하시는 어린이, 청소년, 어른들께 드리고 싶은 말씀은 우선 자신의 마음밭을 정리하시고, 스스로를 믿으며, 그 믿음을 바탕으로 나를 반드시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게 해달라고 진심으로 간절히 기도하시기를 부탁한다는거다. 단 한사람, 딱 나의 열정과 노력을 어떠한 형태로든 반사해주는 한사람이면 충분하다. 그걸로 된다.





캐나다에도 믿을 사람은 있다. 내 노력과 실력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 물론 반성기능이 탑재되지 않은 나쁜 사람들도 존재하지만 극소수이다. 나의 인종 안에서만 신뢰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와 다른 타인종안에도 내가 믿고, 섬기고, 존경할 사람이 존재하며, 그렇다면 이 곳에서 오히려 더불이 삶이 가능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삶의 희망을 본다.


내 나라에서의 대다수 사람들의 징글한 능력위주 삶처럼 남에게 칭찬받기위해 삐에로 삶을 살라는것이 아니다. 최소한 인간 마음의 잡다한 변수들로 인해, 서로간의 입장차이로 인해, 서로가 서로를 원천적으로 신뢰를 포기하고, 한 손가락 이미 접고 시작하는 캐나다 다민족 국가 안에서의 서로에 대한 차별의 일상과 안개 만연한 모호함이, 나와 아이가 경험하는 또는 경험한 관계의 100% 전부는 아님을 최대한 많이, 다각도로 체험하고 싶을 뿐이다. 그 가능성이 원천봉쇄된 사회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  투명하게 내 진심을 반사할 반사판이 필요한거다. 자신감을 지키고 살고 싶기 때문이다.



내가 인간에 대한 믿음을 한국 사람이외의 다른 민족출신의 사람에게 확대할 수 있다는 것은, 해외생활에 있어서 나에게 큰 의미이다. 사람사이, 나의 개인적 일상에서의 불안정도를 낮출 수 있고, 각 개인이라는 요소요소를 통해 신뢰를 체험하며, 인간은 물론 캐나다라는 사회에 대한 믿음을 배울 수 있다는 뜻 이기도 하다. 이것은 캐나다에 단지 오랜기간 머문다고 달성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또한, 이 사회 안에서 아직은 30대 후반, 젊은 이 중 한 사람으로서, 도전에의 욕구, 성공여부와 관련 없이 안전한 것 일 수도 있다는 것일 수 있으며, 과업에 대한 도전뿐만 아니라 인간대 인간안에 도전, 즉 사람과의 관계안에서 상대가 나에게 어떤 감정을 품든, 타인에게 마음을 주는 행위가 가능하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다는 거니까 내 삶의 지평, 인간관계의 지평을 확대하며, 보다 마음을 나누는 풍요로운 삶이 가능해 지고 있다는 크나큰 의미를 담는다.


나는 나에게, 그리고 내 아들에게 믿음과 신뢰, 포용의 마음을 가르쳐 준 선생님을 존경하게 되었다.


이 곳 사람들은 경계심을 갖고, 곧 터질 듯 팽팽한 풍선처럼 부푼 사람에게 본인이 긴장을 풀기 전에 절대 다가가지 않는 개인주의 문화가 있는데, 그 개인주의문화가 나에 대해 간섭하지 않아 좋을 때도 있지만, '개인 안의 긴장이' 관계에 의한 상처에서 빚어진 것이 원인이라면, 이들의 문화답게 적정거리를 유지하고 바운더리를 지켜줌으로서 절대 해결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잔뜩 긴장하고 있는 사람눈에는 '니가 긴장을 하고 있든 경계를 하고 있든 상관없는데, 나에게는 피해주지마' 라는 사인으로 느껴지며, 너와 내가 다르며 관심없으니 떨어지라는 태도는 해당자의 경계심을 극대화 할 뿐이다.


이와 반대의 접근은 사람의 차가워진 마음에 온기를 훅 넣어준다. 마음으로 얻은 상처는 마음으로 치유될 필요가 있다. 따뜻한 말 한마디, 따뜻한 눈 맞춤, 웃음, 진심을 담은 카드 한 장이 어쩌면 불안해 떨고 있는 사람의 마음이 가장 원하고 있는 것인 것 같다. 내가 속했던 한국에서는 아무리 세상에 변했다지만 기본적으로 나누는 정문화가 있어서, 아무리 남이라도 서로가 서로를 다독여주고 보듬어주고 이해해주는 분위기에서 컸기에 그것이 없을 때야 비로소 내 정신건강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절감하게 된다. 나와 같은 성장환경, 가정환경을 가진 채로 개인주의 서구사회에서 컸다면, 나는 정말 지금보다 훨씬 많이 상처받고, 이 곳의 매마르고 건조한 정서안에서 아파하며 컸을지도 모르겠다.

 


이민 후, 전 사회에 만연한 백인 중심주의와 그로인한 차별로 마음아파하며, 사회적 서클 안으로 한 발, 두 발 들이는 것에 태산보다 높은, 누가 봐도 한눈에 보이는 통제불가능하게 잔뜩 부푼 경계심을 갖고 불안해 했었는데, 아이를 통해 만난 올해 선생님은 내게 다가와도 괜찮다며 내 마음을 열어주었다. 나의 삶에 새로운 가능성을 활짝 열어 준, 캐나다에서의 삶의 희망을 가르쳐주신, 나의 아들과 내 아들의 선생님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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