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장과 위로, 선입견이 주는 상처
1999년 설날, 거실엔 브라운관이 떠들썩했고, 그 안에선 김현정 언니가 ‘되돌아온 이별’을 부르며 어깨를 흔들고 있었다. 화려한 셔츠, 날렵한 턱선, 유난히 긴 팔다리—언니는 혼자서도 무대를 꽉 채웠고, 나는 그 모습에 얼어붙은 채 티비 앞에 앉아 있었다.
“솨아랑이라고 느끼고 시퍼쮜…”
속으로만 따라 부르던 그 순간, 온몸이 간질간질해졌다. 언니는 당당하고, 강하고, 자유로워 보였다. 그에 반해 나는—이 집의 낯선 손님. 조심조심, 작게 숨 쉬는 보일듯 보이지 않는 그런 존재였을거다.
큰 외삼촌 댁은 시끌시끌했다. 엄마의 사촌들, 나보다 2살, 4살, 6살 많은 언니들, 고스톱 소리, 냄비 뚜껑 닫히는 소리, 텔레비전에서 터지는 박수 소리…
우리 엄마는 딸 다섯, 아들 셋 그러니까 팔남매가 있는 집의, 밑으로는 남동생이 하나 더 둔 일곱째이다. 분명히 엄마도 이모도 여자인데, 다섯 있는 이모들은 아무 일을 하지 않고, 단 세분 뿐인 외숙모들만 항상 주방에 계셨던 것이 신기하던 나의 어린시절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명절날의 풍경이란, 외숙모들은 늘 음식을 만들고 계셨고, 이모와 외삼촌들은 안방에 모여 고스톱을 치거나, 술을 마시거나 수다를 떨며 놀았다. 계속해서 커다란 음식상을 만드시는 외숙모들이 수고롭지도 않나, 엄마한테 종종 묻곤 했었던 어린시절이 가끔 기억난다.
엄마 아빠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고, 나와 동생은 큰 외숙모 차를 타고 외할머니 산소에서 곧장 내려와 먼저 와 있던 참이었다. 평소라면 항상 엄마 아빠 사이에 찰싹 붙어있을 나였는데, 그날은 혼자였다. 딱히 친하지도, 그렇다고 멀지도 않은 사촌들과의 거리만큼이나 어정쩡한 자리. 밥을 먹는지 숨을 쉬는지조차 모르겠는 상태로, 나는 계속 시계만 흘끔거리고 있었다.사람들과 어울릴줄도 모르는 채 어색한 웃음만 한 없이 짓고 있었던 참이다.
항시 소심한 친족 멤버에게는 막간의 틈을 다 쪽을 주는 인간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 인간들은 예리하게도 자신이 쪽을 주면, 움추러들 대상을 단박에 간파하고 만다는 특징이 있다. 막내 삼촌이 그랬다.
이 날도 이 순간을 놓칠리 없는 그 사람이 등장했다.
너는 엄마 아빠 다 어디가고 여기 왜 이렇게 있냐? 누나는 왜 애들만 여기뒀데? 애들 버렸어? 설이고 추석이고 명절날엔 친정말고 먼저 시댁가야하는거 아니야? 왜 애들을 외갓집에 뒀데?
퍽.
말이 가슴에 부딛혔다. 알면서도 말하는 그 잔인함때문이다. 아빠는 고아라 우리는 친가가 없다. 지금은 고인이신 막내외삼촌은 아빠가 고아라는걸 모를 이가 없는데, 아픈 구석을 건들여 지는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 말을 꼭 했어야했는지... 말없이 고개를 떨궜다.
외갓집에서 막내사위인 우리 아빠의 유일한 약점은 고아출신이라는 거다. 성실하고 유능한 사람이 하필 막내 사위라 다들 짜증나던 판인데, 그렇다 하더라도 그걸 꼭 본인이 없는 자리에서 자신보다 약한 어린이들을 기죽이려는 명목으로 말해야하는걸까? 안 그래도 친조부모 없어, 부모도 없는 자리에서, '우리 아빠에 대해 함부로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라는 마음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그 뜨거운 걸 꿀꺽 삼켰다. 아이 앞에서 부모욕을 하면, 그것이 평생 남을 원한이 된다는 걸 여러 역사극에서 보지만서도 정작 그것이 자신과 가까운 곳에서 벌어지는 일이 될 줄 사람들은 잘 모르는 건 아는가싶다. 누군가가 넌지시 눈치를 주기도 했지만, 올해도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막내 외삼촌은 우리 아빠가 고아라는 사실을 자꾸만 몰랐다.
나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했던 그 막내 외삼촌은 그 해 가을, 운전 중 사고로 명을 달리하셨다. 장래식에 참석했던 나는, 철없이 낄낄 빠빠하던 친척언니들과 다르게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표정으로 그를 추도했음에 나의 찐 감정이 감춰졌으리라. 고인이 하늘에서 내 글을 본다면, 그 또한 마음으로 내게 한 행위들을 뉘우치고 있겠지.
그 날 부모님은 설날 이른 오후에 도착했던 우리들과 달리 늦은 저녁에나 큰 삼촌댁에 도착할 수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나의 불편한 심정을 울 엄마가 알턱이 없지.
어른들과 함께 점심식사를 하던. 그 자리에는, 큰 삼촌과 큰 외숙모 이외에도 둘째 외삼촌과 둘째 외숙모, 그리고 두 세분의 이모들이 함께 계셨다. 그날 점심, 어른들은 동생의 백혈병 치료 이야기를 화제로 삼고 있었다. 이건 내 가족 뿐만 아니라, 다른 집이어도 사촌 안의 친척이 가까운 시기에 백혈병에 걸렸다면 자연스럽게 일어났을 대화 주제이다. 그렇지만 이제 갓 열살이 된 나로서는, 내 부모님도 없는 곳에서 어른들끼리의 대화가 아닌, 모두가 함께 모여 나를 보호자 자격에 두고 내 동생에 대해 길게 이야기하는 것이 감당하기 어려울 참 이었다. 원래 별로 말씀을 하시지 않아, 우리에게 큰 관심이 없을거라 생각이 들게 했던 큰 외숙모께서는 그런데 그 때, 시무룩해진 내게, 큰 외숙모가 말을 걸었다.
캔디야, 넌 원래 잘하니까 사람들이 아픈 동생한테만 신경을 쓰는 거야. 그런데 외숙모가 지금 보니까, 사람들이 다 모두 동생에 대해서만 얘기하니까, 그게 너한테 미안하다, 숙모는 왜 이제야 그걸 알았지?'
커다란 눈물방울이 툭 떨어지려는걸 꾹 참으려니 끝내 외숙모 얼굴도 바라볼 수 없었다.
그렇다. 역시 새로운 관점에서 문제를 발견할 수 있는 건 의외의 인물, 엄마네 집 식구들과 태생이 다른, 남의 집 식구인 외숙모셨다. 내 마음의 눈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처음 큰 외숙모를 통해 내 감정을 만날 수 있었던 것 같다.
내가 그 동안 사람들 속에서 느꼈던 감정이 외로움 이었던 것을. 어린아이가 주제 넘게 벌써부터 느껴버린 외로움을 수치심을 죄책감을 공허함을.
그리고 감정이라는 건, 나 자신이 인식하기 전에 주변 사람들로 부터 대신 읽혀지고, 공감받으며 위로받을 수도 있다는 사실도 그 때 배운 것 같다. 누군가의 설교가 아닌, 꾸짖음이 아닌, 담담한.. 진심을 만져주는 간결한 사과같은 것의 힘을... 딱 그 순간, 딱 그 마음, 딱 내가 필요한 말을 들었을 때, 마음의 손바닥이 착! 하고 쳐지는 그 느낌을...
외숙모의 숨결같은 그 짧은 말 한마디에, 내 마음에선 빵빵하게 제 멋대로 있는대로 부풀었던 풍선이 스르르 바람 빠지듯 진정되었다. 그 날 난, 감정은 꼭 내가 말해야만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누군가는 눈빛 하나로, 조용한 목소리 하나로도 읽어낸다는 걸. 그리고 그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를... 감정은 누가 읽어주기만 해도 반쯤은 살아난다는 걸 나는 그날 처음 알았다.
내가 좋아하는 핑클 언니들이 노래하는 빠알간 '루비' 처럼 단단하거나 더 유능하고, 커다란, 어디에 놔도 반짝거리는 어른다운 어린이, 더욱 멋진 그런 사람이 되어 스스로에게 보상해야한다고 스스로에게 한 굳건한 다짐이 모두 허튼 것일지 모른다는, 사실은 필요없을지도 모른다는, 빛나지 않아도 화려하지 않아도, 누군가와 공감하고 마음을 나눌 수 있다면...세상에 있는 듯 없는 듯한 나 자신, 캔디 그 자체로도 충분하다는 지금의 생각에 미치기 위한 첫 걸음이 바로 이 날의 외숙모와의 대화였을지도 모르겠다.
외숙모 일은 그렇다쳐도 외갓집에서 느끼는 어쩐지 모를 쓸쓸한 감정 덕분에 그 때 그 이후로 머리가 좀 더 굵어지고, 더 많은 것을 느낄 줄 알게 된 나는 친척들과의 만남을 결혼전까지 최소화했다. 결혼후에는 단 한번도 한국에 방문하지 않았으니 연이 끊겨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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