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혼주의 결심한 채 묵언수행 떠난 곳에서 생긴 일
역시 여기에도 없었다, 나의 마음을 움직이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지구 밖에 있는 것인지... (전편에 이어서)
계속 울려대는 결정사 전화를 내치기도 지쳐갔다. '백날 전화해 봐라, 내가 결정사 가입하나, 그 돈으로 여행 가지.' 청개구리 마인드로 그렇게 모든 것을 내려놓고, 언제나처럼 훌훌 여행을 떠났다. 해외 일정으로 일주일 남짓은 그리 길지는 않은 시간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내가 갈 수 있는 한 최대한 멀리 가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한국과는 반대의 계절, 남반구의 호주 시드니에 가기로 결정했다.
비장한 마음을 먹은 채 비혼주의자를 결심하고, 여행 내내 묵언수행을 하며 정처 없이 돌아다녔다. 하루에 3만 보씩 걸으며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정작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여행을 떠나왔지만, 이제 나에게 여행은 더 이상 새로운 자극을 주는 놀이가 아니었다. 앙꼬 없는 찐빵 같은 여행 앞에서 나는 하루 종일 한없이 돌아다니다 터벅터벅 숙소에 돌아와서 그저 허한 마음을 마주해야 할 뿐이었다.
그렇게 여행도 막바지가 다가왔고, 아무것도 기대할 것 없는 여행자의 일상에서 이제 진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는 날만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내 앞에, 다 내려놓은 내 앞에, 여행 마지막 날, 그가 나타났다... 하늘에서 떨어진 것인가, 땅에서 솟아난 것인가. 한눈에 봐도, 저 멀리서 봐도, 이리 봐도 저리 봐도, 내 스타일... 아 망했네. 난 이미 이 얼어 죽을 연애 따위에 신물이 나서 비혼주의자로 살겠다고 다짐했는데, 지금 이렇게 처음 본 사람에게 순식간에 빠져버리면 내 꼴이 참 말이 아닌데... 마음이 갈피를 못 잡고 흔들렸다. 이런 마음을 꽁꽁 숨기고 애써 현실을 외면하려고 '차도녀' 연기를 하면서.
그렇지만... 우리는 마치 자석처럼 이끌려, 어느새 나란히 앉아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나도 모르게 마음이 너무나 편안해져서 서서히 마음의 빗장이 열리고 있었다. 아니, 외적인 모습에 이어 대화까지 잘 통한단 말인가? 어떻게 이런 일이... 사실 처음에는 자신의 솔직한 이야기를 미주알고주알 털어놓는 이 남자가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처음 보는 여자 앞에서 자신의 치부까지 막힘없이 드러내는 남자라... 그의 컬러풀한 인생사를 듣고 있다 보니, 나는 어느새 마음속으로 그의 아픔까지 보듬어주는 여자가 되어 있었다...
마치 며칠간 한 마디도 못 한 사람처럼 (정작 묵언수행한 사람은 나인데?) 끊임없이 자신을 보여주던 남자. 그런 남자의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고, 그 시간이 무척이나 편안해서 시간 가는 줄 모르던 여자. 그렇게 꼬박 한나절 동안 숨 쉴 틈 없이 우리는 정말 많은 대화를 나눴다. 나중에 그의 말을 들어보니, 자기도 원래 평소에 말이 그리 많은 사람은 아닌데, 그날은 왠지 모르게 자기 얘기가 술술 나와서 스스로도 신기했다고. 그렇게 우리는 깊은 속마음을 털어놓는, 마음의 방어기제를 무너뜨리는 존재로 서로에게 서서히 스며들었던 것이다.
어김없이 밤은 어두워졌고, 내일이면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렇다, 이제는 헤어져야 할 시간. 저녁에는 무슨 일정이 있냐는 그의 물음, 그 안에 담긴 뜻은 알 수 있었지만, 그저 스쳐 지나가는 여행지에서의 불나방 같은 만남이 되지는 않을까 하는 조심스러운 마음에 관계를 쉬이 발전시키지 않고, 우리는 이 날의 추억을 고이 접어 두기로 암묵적으로 동의했다. 차마 마음속 깊이 있던 그 어떠한 것도 전하지 못하고, 우리는 그렇게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렇지만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그 열 시간 동안 내 머릿속은 이미 온통 그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착륙하자마자 빛의 속도로 카톡을 열어서 그에게 메시지를 보내던 나의 모습. 무척이나 쿨한 감사인사로 가장했지만, 실제로는 사심 가득한 카톡을. 아무래도 나보다 나이가 많은 남자인 그가, 여자인 나에게 사적으로 연락하는 것은 부담스러웠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서, 내가 먼저 '선빵'을 친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먼저 연락 주어서 너무나 고맙다'는 그의 답장이 왔다. 나는 뛸 듯이 기뻐서 집으로 가는 전철에서 소리를 지를 뻔했다. 10시간의 고된 비행도, 무거운 캐리어도,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누군가의 연락을 받고 이렇게 기뻤던 적이 언제였던가. 8,400km가 넘는 거리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 순간, 그와 나는 보이지 않는 끈으로 단단히 연결되어 있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우리는 여느 연인들처럼 매일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시나브로 서로에 대해 알아가기 시작했다. 또 언제 볼 수 있을지 미래를 기약할 수는 없지만, 그런 것 따위는 생각할 여념이 없었다. 메시지를 보내고 답장이 오기까지 기다리는 동안,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아지랑이가 마음을 간지럽혔다. 무척이나 오랜만에 느껴보는 이 순간의 환희 앞에서 모든 것은 그대로 멈춰버린 지 오래였다.
나는 용감하고 현명했다.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모든 세포가 죽은 채, 그저 꼭두각시처럼 살고 있는 줄로 알았는데... 여전히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을 쟁취(?) 하기 위해 '행동'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살아있네!' 나는 부끄러움은 잠시 접어두고, 나의 직감을 굳게 믿었다. 그간 시간을 참 많이 까먹었지만, 후회는 없다. 그 모든 이불킥 경험이 없었다면, 나는 아직도 무엇이 중요한지 깨닫지 못하고, 애먼 것 쫓아다니며 무지몽매한 삶을 살고 있었을 테니까.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