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의 브런치 큐레이션 주제, '가족'
<책> 김달님, '나의 두 사람'
그들이 준 사랑에 작은 대답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더 늦게 전에 우리가 보낸 시간들을 쓴다.
나의 그랜드마더, 그랜드파더.
나는 내 부모가 예감하지 못한 시기에 갑작스레 세상에 오게 됐다. 너무 이르게 온 나머지 그들은 누구의 부모보다 누구의 자식인 게 더 어울리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어쩔 줄 몰라 겁먹은 그들은 부모에게 갓 태어난 아이를 맡겼다. 아마 그들에게는 부모가 되기 위한 시간이 더 필요했을 것이다. 그런 사연으로 1988년 서울 올림픽과 함께 태어난 나는 1939년생 김홍무 씨와 1940년생 송희섭 씨의 품에서 자라게 되었다.
조손 가정. 할머니 할아버지의 손에서 자란 아이.
또래의 아이들과 다른 가정환경에서 자라는 일은 자주 나를 주눅들게 했다. 가령 초등학교 숙제로 가족신문을 만들어야 했을 때, 고등학교 야자 시간에 한 아이가 엄마 이야기를 꺼내자 모두들 엄마, 엄마 하며 따라 울었을 때, 졸업식이든 운동회든 어디서든 내 부모가 가장 늙어 보였을 때, 친구 녀석이 우리 엄마가 이혼 가정 애들이랑은 어울리지 말래, 라는 말을 서슴없이 내 앞에서 했을 때. 그럴 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숨 죽여 주변 눈치를 살폈다. 너무 당연한 룰에서 나만 벗어난 것 같은 초조함. 슬프기보다는 당혹스러웠다.
시간이 지나자 다행히 그런 것은 점차 괜찮아졌다. 크기와 깊이가 다를 뿐, 가정의 불행한 사연 하나쯤은 누구나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들의 불행과 비교해 위안을 받았다는 것은 아니지만 어쩌면 화목한 가정이란 누구나 기대하는 실체 없는 이미지에 가까울지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나는 행복과 불행을 고루 느껴본 평범한 어른으로 자라있었다.
- 김달님, <나의 두 사람> 프롤로그 중에서
<글> 사과집, '산초 된장찌개를 끓이며'
그럼에도 산초 된장찌개는 결국 내 소울푸드가 되었다.
어떤 시절의 기억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짠내가 오래가시지 않는 매운 산초의 향으로 남는다.
아빠의 장례를 치른 후 돌아온 집은 텅 빈 듯 공허함이 감돌았다. 며칠간 집에서 요리는 하지 않고 배달 음식을 시켜먹던 우리는 베란다에서 아빠가 담근 산초 장아찌 한 통을 발견했다. 그러고 보면 아빠가 죽기 일주일 전 금산에 오랜만에 내려간 적이 있다. 그때 아빠는 산초와 다슬기는 물론, 인삼까지 잔뜩 사 왔다. 갑자기 떠날 것을 짐작이라도 한 것처럼. 담금통엔 꽉 채워진 산초 장아찌가 한가득이었다.
엄마는 그 산초로 된장찌개를 해줬다. 아빠가 해준 것과 거의 비슷했지만 미묘하게 달랐다. 나는 산초 된장찌개를 먹으며 불현듯 이 장아찌가 마지막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는 아빠가 어디서 산초를 따는지도 모르고, 안다 해도 굳이 따러가지 않을 것이며, 장아찌를 담그는 일도 없을 것이다. 이걸 다 먹으면 끝이라는 생각에 목이 매어 울음을 삼켜야 했다.
문득 어떤 드라마의 한 장면이 생각났다. 부인을 잃은 남편이 벽장 안에서 발리볼을 발견하는 에피소드였다. 아내의 모든 것을 정리하고 버렸지만, 남편은 그 발리볼만큼은 버리지 못했다. 아내가 살아있을 때 입김을 불어넣는 발리볼, 그곳엔 사랑하는 사람의 숨결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게 꼭 우리 가족의 모습 같아 보였다. 유품을 정리하고 잊어보려고 해도, 갑자기 마주친 입김 같은 아빠의 흔적에 무너져버리고 만다.
- 사과집, <산초 된장찌개를 끓이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