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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버금 Mar 14. 2020

가족이라는 이름의 서사

2월의 브런치 큐레이션 주제, '가족'



가깝고도 먼,

가족이라는 이름의 서사



  에세이를 생각할 때 떠오르는 주제를 하나 꼽자면 가족을 꼽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가족은 무어라 말할 수 있을까요. 나를 이루는 배경이자 공간이고 타인이되 완전한 타인은 아닌 인물이랄까요. 설명만 놓고 본다면 꼭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인물을 말하는 것 같이 들리지만, 가족은 사실 우리 곁에 발 딛고 선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가족이라는 주제를 전해 듣고 가장 먼저 했던 일은 글을 고르는 게 아니라 가족이 무엇인지 고민을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가족은 무어라 말할 수 있을까요. 가족을 생각해보면 절로 그려지는 평범한 이미지들이 있었습니다.


  건강한 부모님, 슬하에서 바르게 자란 자녀 - 어쩐지 그 자녀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딸 하나, 아들 하나로만 그려집니다- 그리고 강아지가 있는 그런 평범한 가족의 그림이.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고 보니 스스로에게 그런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는 어떤 이유로 이러한 모습을 평범한 것이라 여기게 되었는지를요.



 


  사람에 다양한 면면이 있듯, 여러 사람이 엮인 한 가족의 서사 또한 다양하기 마련입니다. 각기 다른 이야기의 행복과 불행, 탄생과 죽음을 겪기도 하면서요. 가족의 서사를 찾아 소개하는 시간인 만큼 높고 견고한 '평범함'의 벽에 돌 하나를 더 쌓아 올리기보다, 크고 작은 다양한 모양의 돌들을 그 옆에 나란히 놓고 싶었습니다.


  글을 찾기 전까지의 고민은 길었지만 찾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말한 것처럼 어떤 모습의 가족이든 그들은 우리 곁 가까이에 발 딛고 선 사람들이었으니까요. 여기, 가족의 서사를 다룬 브런치 작가님의 책과 글 한 편을 소개합니다.



<책> 김달님, '나의 두 사람'



그들이 준 사랑에 작은 대답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더 늦게 전에 우리가 보낸 시간들을 쓴다.
나의 그랜드마더, 그랜드파더.


나는 내 부모가 예감하지 못한 시기에 갑작스레 세상에 오게 됐다. 너무 이르게 온 나머지 그들은 누구의 부모보다 누구의 자식인 게 더 어울리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어쩔 줄 몰라 겁먹은 그들은 부모에게 갓 태어난 아이를 맡겼다. 아마 그들에게는 부모가 되기 위한 시간이 더 필요했을 것이다. 그런 사연으로 1988년 서울 올림픽과 함께 태어난 나는 1939년생 김홍무 씨와 1940년생 송희섭 씨의 품에서 자라게 되었다.

조손 가정. 할머니 할아버지의 손에서 자란 아이.

또래의 아이들과 다른 가정환경에서 자라는 일은 자주 나를 주눅들게 했다. 가령 초등학교 숙제로 가족신문을 만들어야 했을 때, 고등학교 야자 시간에 한 아이가 엄마 이야기를 꺼내자 모두들 엄마, 엄마 하며 따라 울었을 때, 졸업식이든 운동회든 어디서든 내 부모가 가장 늙어 보였을 때, 친구 녀석이 우리 엄마가 이혼 가정 애들이랑은 어울리지 말래, 라는 말을 서슴없이 내 앞에서 했을 때. 그럴 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숨 죽여 주변 눈치를 살폈다. 너무 당연한 룰에서 나만 벗어난 것 같은 초조함. 슬프기보다는 당혹스러웠다.

시간이 지나자 다행히 그런 것은 점차 괜찮아졌다. 크기와 깊이가 다를 뿐, 가정의 불행한 사연 하나쯤은 누구나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들의 불행과 비교해 위안을 받았다는 것은 아니지만 어쩌면 화목한 가정이란 누구나 기대하는 실체 없는 이미지에 가까울지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나는 행복과 불행을 고루 느껴본 평범한 어른으로 자라있었다.

- 김달님, <나의 두 사람> 프롤로그 중에서


  친구에게 이 책을 추천해주며 했던 말이 있었습니다. "이 책 버스나 지하철에서 읽지 마." "왜?" "절대 읽지 마. 꼭 혼자 있을 때 읽어."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제 말을 한 귀로 흘려들었던 친구는 결국 이 책을 버스에서 읽었고, 예상했던 것처럼 첫 페이지를 다 넘기기도 전에 눈물을 쏟았다고 했습니다. 정말이지 위험한(?) 책이에요.


  <나의 두 사람>에 관해서라면 소개할 거리가 많습니다. 5회 브런치북 금상 수상작이라던지, 김달님 작가의 본명이 진짜 달님이라던지, 표지의 사진이 할머니와 달님 작가님 본인의 사진이라던지, 하는 사실들인데요. 이런 소갯말을 구태여 더 하기에는 제 말은 그저 모없는 공간 비처럼 느껴집니다.


  한 아이가 '행복과 불행을 고루 느껴본 평범한 어른' 으로 자라기까지. 어떤 대단한 일화다루지 않아도, '잘 쓴 책' 소박하고 꾸밈 없는 생의 장면만으로도 마음을 울리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느끼게 해준 책이었습니다.


https://brunch.co.kr/@20150127/166 




<글> 사과집, '산초 된장찌개를 끓이며'



그럼에도 산초 된장찌개는 결국 내 소울푸드가 되었다.
어떤 시절의 기억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짠내가 오래가시지 않는 매운 산초의 향으로 남는다.

  

아빠의 장례를 치른 후 돌아온 집은 텅 빈 듯 공허함이 감돌았다. 며칠간 집에서 요리는 하지 않고 배달 음식을 시켜먹던 우리는 베란다에서 아빠가 담근 산초 장아찌 한 통을 발견했다. 그러고 보면 아빠가 죽기 일주일 전 금산에 오랜만에 내려간 적이 있다. 그때 아빠는 산초와 다슬기는 물론, 인삼까지 잔뜩 사 왔다. 갑자기 떠날 것을 짐작이라도 한 것처럼. 담금통엔 꽉 채워진 산초 장아찌가 한가득이었다.

엄마는 그 산초로 된장찌개를 해줬다. 아빠가 해준 것과 거의 비슷했지만 미묘하게 달랐다. 나는 산초 된장찌개를 먹으며 불현듯 이 장아찌가 마지막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는 아빠가 어디서 산초를 따는지도 모르고, 안다 해도 굳이 따러가지 않을 것이며, 장아찌를 담그는 일도 없을 것이다. 이걸 다 먹으면 끝이라는 생각에 목이 매어 울음을 삼켜야 했다.

문득 어떤 드라마의 한 장면이 생각났다. 부인을 잃은 남편이 벽장 안에서 발리볼을 발견하는 에피소드였다. 아내의 모든 것을 정리하고 버렸지만, 남편은 그 발리볼만큼은 버리지 못했다. 아내가 살아있을 때 입김을 불어넣는 발리볼, 그곳엔 사랑하는 사람의 숨결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게 꼭 우리 가족의 모습 같아 보였다. 유품을 정리하고 잊어보려고 해도, 갑자기 마주친 입김 같은 아빠의 흔적에 무너져버리고 만다.

- 사과집, <산초 된장찌개를 끓이며> 중에서


  소울푸드라는 말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별다르지 않은 음식이 나에게는 소울푸드로 기억되는 특별에 대해서요.


  집에서의 밥은 보통 엄마가 요리한다는 통념이 있습니다. 이에 반해 아빠가 솜씨를 발휘해 만드는 집밥은 엄마의 것에 비해 투박하면서도 푸짐한 특유의 손맛이 있는데요. 사과집 작가님은 '아빠'가 끓인 '산초 된장찌개' 를 자신의 소울푸드로 꼽으며 그에 얽힌 이야기를 글로 풀었습니다. 고 나면 산초 된장찌개를 먹지 않은 저까지도 꼭 그 맛을 본 것처럼 진한 향이 맴도는 글입니다.


  잘 끓인 한 편의 글을 따라 산초의 낯선 맛과 그 맛이 불러오는 짠내를 함께 읽어봐도 좋겠습니다.


https://brunch.co.kr/@applezib/235#comment






  평범의 영역을 구체적으로 그릴수록 평범하지 않음의 영역으로 밀려나는 들이 있습니다. 평범과 비범의 구분 없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글들을 이 곳에서 나란히  함께 읽고 싶었습니다.


  보다 깊이 공감하고 넓게 헤아리는 시간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책 한 권과 글 한 편을 소개했습니다.



사진: 2nd_roll

말글: your_dictionary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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