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된 밥에 번아웃 뿌리기
텀블벅에서 정산을 받았다. 초중고와 대학을 거쳐 다시 대학을 온 만년 학생인 내가 돈을 다 벌었다. (엄마! 나 돈 벌었어!) 돈을 벌고서 한 일은 수입 초콜렛 7만원 어치 구입. 왜 하필 7만원인고 하니 7만원 이상 사야지 무료 배송이라기에 불필요한 배송비 절감 차원으로 합리적인 소비를 감행했다. 나는 정말이지 훌륭한 어른으로 자란 것이다.
미세먼지가 기승을 부린 탓에 며칠 동안 공기청정기가 제공해주는 청정한 산소에 몸을 내맡기고 초콜렛을 까먹으며 지냈다. 못 잤던 잠도 실컷 자고 실컷 먹고 실컷 쉬면서. 그리곤 자, 이제 쉴 만큼 쉬었으니까 어디 한번 희망찬 한 해를 시작해 볼까! 하고 몸을 일으키려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동안 하루에 두 세 시간씩 자고 할 때에도 재깍재깍 움직였던 몸이!
뚝딱하고 나오면 끝일 줄 알았던 책은 사실 뚝딱하고 보니 할 일이 더 많아졌다. 텀블벅으로 1쇄를 다 팔았으니까 다시 얼른 2쇄를 찍어내 독립서점에 입고시켜야 하고, 그러려면 그 전에 교정을 다시 보면서 디테일을 수정해야 하고, 독립출판물 유통 방법이나 인디자인 관련 강의들도 찾아서 들어야 하고, 브런치북 프로젝트도 준비해야 하고……. 나름 계획했던 일들이 줄줄이 있었는데 아무것도 하고 싶지가 않아진 것이다.
설화에 따르면 웅녀는 사람이 되려고 굴 안에서 마늘만 먹었다는데 나는 줄창 초콜렛을 먹어서 곰이 된 건지, 돼지가 된 건지, 아니면 돼지곰이 되어버린 건지. 잠도 잘 자고 잘 쉬었다고 생각했는데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고 싶지 않았다. 아픈 건 아닌데 어딘가 스위치가 꺼진 것 같았다. 지금껏 아무것도 안 하고 있었지만 더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싶고, 아무것도 안 하는 것마저도 안 하고 싶은 기분이랄까.
프로게으름러인 내게도 이 정도의 게으름은 생소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책을 준비한 게 꼬박 일 년이고 쉰 건 일주일 남짓이었던지라 아직 덜 쉬어서 그런가 보다 생각하고 일주일 정도를 더 푹 쉬기로 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소원대로 아무것도 안 해보자는 생각으로 운동도 안 하고 씻지도 않고(!) 책도 잘 안 읽었다.
불 위에서 부지런히 뒹구는 양꼬치보다도 게으르게 하루에 두어 번 정도만 굴렀으니 그 의지와 기상이 참으로 대단했다. 그러나 그렇게 일주일 정도를 지내본 결과 자괴감과 더불어 모순된 피로감만 나날이 치솟았다. 쉬어도 쉰 것 같지 않은 기분. 무기력했다.
심상치 않은 기운에, 질문을 올리면 초등학생 형님들이 냉철한 현답을 내려주신다는 지식인으로 달려가니 이런 것을 두고 '번아웃 증후군'이라고 부른단다. 세상에나. 내가 번아웃이라니! 한계에 내몰을 만큼의 극한의 '버닝'을 피해 온 소시민인지라 '번 아웃'을 겪을 일도 없었지만, 번아웃 증후군의 증상으로 분류된 것들을 살펴보니 번아웃이 맞는 것 같았다. 그 증상이란 이런 것들이다.
1. 무기력해지면서 업무에 적응하지 못한다.
2. 기력이 없고 쇠약해진 느낌이 든다.
3. 쉽게 짜증이 나고 노여움이 솟는다.
4. 감정의 소진이 심해 '우울하다'고 표현하기 힘들 정도의 에너지 고갈 상태를 보인다.
5. 일과 삶에 보람을 느끼고 충실감에 넘쳐 신나게 일하던 사람이 어떤 이유에서건 그 보람을 잃고 돌연히 슬럼프에 빠지게 되는 현상이다.
심리적 진단으로 정확히 확인받은 사실은 아니지만 해당되는 증상들이 많았다. (사실 전부였다.) 음, 그렇군. 나는 번아웃이야. 일단은 빠르게 수긍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번아웃 증후군의 증상 아래에는 그 극복 방법들이 제시되어 있었다. '혼자 고민하지 말고 지인이나 배우자 혹은 회사에 멘토를 두어 상담을 한다.', '되도록 정해진 시간 내에 일을 해결하고 집으로 일을 가져가지 않는다.', '운동, 취미 생활 등 능동적인 휴식 시간을 갖는다.'
음, 그렇군.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려면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 '돈을 모으려면 돈을 모은다.' 는 식의 명제처럼 다소 진부하게 느껴지는 말들의 나열들이었다. 별다른 소득 없이 지나치려던 찰나 마지막 문장의 한 단어가 다시 눈길을 끌었다. '능동적인' 휴식 시간을 가지라는 것. 그냥 휴식이 아니라 '능동적인' 휴식. 문득 내가 휴식을 취했던 방식에 대해서 생각했다.
나에게 휴식의 시간은 일부러 시간을 내서 누리는 게 아니라 할 일을 다 끝내고서 남는 자투리 시간들이 휴식 시간이었다. 휴식의 행위 또한 공부나 일을 하지 않으면 그만인 것으로 뭉뚱그려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거나 그도 아니면 밀린 잠을 자거나 했다. 딱히 쉬었다는 기분은 들지 않지만 뭐 별 생각 없이 보냈으니 적당한 휴식이 되었으리라 짐작하면서. 그동안 휴식이라면 잠시 쉬는 단기 휴식과 이번처럼 제약 없이 오래 쉬는 장기 휴식까지 두루 섭렵해왔지만, 내 휴식의 대부분은 '수동적인' 휴식이었을 뿐이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라는 말에서처럼, 어떤 불행도 행복도 지나간다. 번아웃 또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스럽게 없어질 테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지나갈 것이라는 사실이 아니라 '어떻게' 지나가게 할 것이냐는 지점이다. 쉬는 것도 능동적으로 쉬라니! 번아웃에 지친 나 자신에게 다소 가혹한 처방인지 모르겠으나 지금이 능동적인 휴식의 방법을 찾아볼 수 있는 기회란 생각도 든다. (덕분에 새로운 연재 소재를 찾은 것은 금상첨화다.) 능동적인 휴식이란 무엇일까. 당분간의 나는 그 물음에 답이 될 수 있는 '능동적 휴식 아이템'을 찾기 위해 몸소 셀프 실험을 해보려 한다.
* <다 된 밥에 번아웃 뿌리기>는 일주일에 한 편씩 연재될 예정입니다.
* 김버금 들으라고 하는 소리입니다.
* 말글 ⓒ your_dictionary_
* 그리고 사진 ⓒ 2nd_ro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