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가면 함께 간 사람과 꼭 한 번은 싸운다는데 우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빠와 단 둘이 여행을 떠났던 날, 우리는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다퉜다. 여행이 아니었다면 '아, 됐어. 내가 알아서 할게.' 라는 말로 끝났을 사소한 투닥거림이었지만 그러지도 못했다. 여행은 '됐다' 고 중간에 끊을 수도, '알아서 하겠다' 고 등을 홱 돌릴 수도 없이 계속되어야 했으니까. 그 날의 투닥거림은 늦저녁까지 이어졌다.
아빠 생애 첫 해외여행이었다. 한겨울의 한국을 떠나 한여름의 싱가포르에 도착하는 여행. 짐을 싸는 날엔 자못 긴장한 표정으로 주섬주섬 옷가지를 챙기는 아빠에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아빠, 라이터는 캐리어에 넣으면 안 돼. 따로 챙겨뒀다가 꼭 들고 타, 알았지? 그리고 거기는 더우니까 반팔이랑 반바지 챙겨야 돼, 듣고 있지?
비행기로 가는 여행은 평생 제주도가 전부였던 아빠는 이 추운 겨울에그 곳이 덥다는 게 잘 와닿지 않는지 나의 채근에도 긴 옷을 챙겼다. 스마트폰으로 날씨를 검색해 거긴 30도가 넘는다는 걸 눈으로 보여줘도 막무가내였다. 그 고집이 못마땅해서 입이 비죽 나왔지만 아빠가 알아서 하겠거니, 하고 애써 말을 삼켰다.
아래위로 긴 옷을 입고 갔던 아빠는 예상대로 공항에서 나오기 바쁘게 땀을 흘렸다. 몇 걸음 걷지도 못하고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에 연신 손부채질을 했다. 그런 아빠를 데리고 어디 구경을 갈 수도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야외 일정을 취소했다. 첫날에 꼭 가려고 봐 두었던 곳들을 여러 군데 포기해야 해 속이 쓰렸다.
실내에서 한참 시간을 보내다 해가 질 무렵에야 밖으로 나와 저녁을 먹으러 갔다. 야경이 유명한 칠리 크랩 레스토랑이었다. 명성대로 강 바로 옆에 있어 건너편의 마리나베이 샌즈가 한눈에 들어왔다. 그래도 오늘 여기라도 건져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려던 찰나, 아빠가입을 열었다.
"어휴, 여긴 왜 이렇게 덥니."
"그것 봐. 덥다니까."
삐딱한 핀잔에도 아빠는 속없이 허허 웃으며 셔츠 소매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아빠, 내일은 그냥 반팔티 하나 사자."
"됐어, 무슨..."
"아, 그거 얼마나 한다고. 그냥 하나 사."
"에이, 팔 걷으면 되는 걸뭐 하러..."
안 그래도 아빠 고집 때문에 오늘 일정이 엉망이었는데 또 고집을 부리는 아빠의 모습을 보니 점점 짜증이 났다. 여행을 와 즐거워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런 입씨름을 하고 있는 것도 싫었다. 내 속도 모르고 자꾸 바보같이 구는 아빠가, 사실 너무 미웠다.
여행을 와서 여행 온 기분도 제대로 못 내는 아빠가 미웠다. 반팔티 하나 사는 게 아까워 구질구질하게 구는 아빠가 미웠다. 외국 음식을 먹어본 적 없어서 촌스럽게 구는 아빠가 미웠다. 내가 일상처럼 먹고 즐기는 이 모든 것들을 마음껏 누리지 못하는 바보같은 아빠가 너무 미웠다.
그 마음이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쏟아져 나왔다. 아빠 진짜, 내가 몇 번이나 말했잖아. 여긴 덥다고. 근데 이게 뭐야. 대체 긴 옷은 뭐하러 가져왔어?아빠 때문에 오늘 아무 데도 못 갔잖아.우물쭈물하던 아빠가 겨우 한 마디를 말했다.
"나는 외국이 이런 줄 몰랐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머리가 다 이해하기도 전에, 눈물이 먼저 고였다. 황급히 고개를 돌리는데 눈에 담긴 온 세상이 출렁거렸다. 마리나 베이의 눈부신 야경이. 오색으로 빛나는 찬란한 강물이. 목 아래 깊은 곳에서 자꾸만 울음이 올라왔다. 아빠가 몰랐던 이 세상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이 세상이 다 거짓말처럼 아름다워서.
아빠의 돈과 아빠의 젊음과 아빠의 꿈을 배불리 먹고 자란 내가이집트에서 피라미드도 보고 일본에서 온천도 할 동안 아빠는 줄곧 나이만 먹어왔다. 아빠가 첫 해외여행을 떠나기까지 걸린 시간, 오십 년. 숫자로는 헤아릴 수 없는 아빠의 한평생이 담긴 시간이었다.
눈물을 참느라 울컥울컥한 목울대에 연신 침을 삼키며 내게 혼잣말을 했다. 참 잘났다, 너. 그래, 진짜 잘났다. 아빠가 짐 쌀 때 그 잘난 입으로 왜 말만 한 거야, 네가 뭘 얼마나 잘나서... 처음으로 여행 온 오늘 같은 날에 넌 왜 벌컥 화만 내는 거야, 네가 대체 뭐가 그렇게 잘나서...
땀인 척 냅킨으로 대충 얼굴을 훑고 칠리 크랩을 아빠 쪽으로 밀면서 말했다. 아빠, 저기 보여? 마리나베이 샌즈라는 건데 저 위에 수영장이 있어. 엄청 예쁘지? 저거 우리나라 건설사가 지은 거래.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나도 모를 만큼, 아무 말이나 조잘조잘 이어가며 마음속으로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