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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현주 Oct 21. 2020

화양연화(2)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을 표현하는 말

 

문과대에서 약 2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언론홍보 영상학과의 건물이 세워져 있다. 원래는 신문방송학과, 줄여서 신방과라고 불리던 단과대가 언론홍보 영상학과(이하 ‘언홍영’)라는 길고도 복잡한 이름으로 변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내가 몸 담고 있던 회색 빛깔의 칙칙한 문과대 건물들과는 달리, 언홍영의 건물은 붉은 벽돌이 착실하게 한 칸 한 칸 쌓여 만들어진 근대식의 서양 건축물로 이루어져 있었다. 푸르른 아이비가 벽을 감싸고 있는 모습은 오랜 세월의 흔적을 오롯이 품은 캠퍼스 낭만의 상징이 되었다. 

교통체증에 골머리를 썩는 서울 시내 한 복판에도 이런 숨 트이는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은 언제나 벅찬 감동이었다. 학교 내의 가장 심장부에 위치한 그 건물 속에 들어오면 세상의 모든 나쁜 것으로부터 보호받는 느낌. 결코 경박하지 않은 공기가 강의실을 감돌고 있었고, 이따금 들려오는 도심 속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만이 내 존재가, 바로 여기 있음을 일깨웠다. 충만하고 자애로운 공간 속에서 단단하고 깊은 안정감을 느꼈고, 수업이 끝난 빈 교실은 여전히 교수님과 학생들이 남겨놓은 지성의 열기로 가슴이 채워졌다. 강의가 끝날 때쯤이면 캠퍼스 곳곳에서 경쾌한 젊음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당연했기에 소중한지 모르고 거칠게 청춘을 낭비하던 시간들이었다. 


 당시 언홍영은 내가 다니던 대학의 단과대 내에서도 점수가 상당히 높아야만 들어갈 수 있는 과였다. 언론매체나 방송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많은 유명인들 중에는 그 학과 출신이 많았고, 때문에 조모임을 하던 누군가가 ‘저, 신방과예요’라고 말하면 왠지 달리 보이는 후광 효과도 있었다. 지금에야 취업난에 더 이상 언홍영이 예전 같지 못하다지만 라떼만 해도 공부뿐만 아니라 외모도 세련된 그들의 아우라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러니 내가 첫사랑에 아주 씨게 당했음에도 그 수업을 포기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 절대, 절대로, 철회는 있을 수 없는 일. 

 이별 때문에 죽느니 사느니 해도, 내 개인적인 사정과는 상관없이 <영상제작 이론>의 첫 수업이 시작되었다. 교수님이 늦으셨다. 10분 정도 지났을까. 15분이 지나면 수업이 자동적으로 휴강이 된다는 학칙이 있었던 터라 학생들은 하나, 둘씩 나갈 채비를 했다. 

 사실 급작스러운 휴강은 깜짝 선물 같은 것이다. 부모님이 비싼 학비를 부담했다는 사실이나 내가 선택하여 이 수업을 듣고 있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은 채 요행을 바라며 나머지 5분을 숨죽여 기다리는 철딱서니란. 게다가 교수님은 예술혼이 아니던가. 창작을 하는 사람들은 그럴 수 있다고, 역시 남다르다고 생각했다. 내게는 그저 이 모든 것이 낯설고 신기한 자극일 뿐이었다.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교수님은 결국 강의실에 모습을 비추었고 수업은 취소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덕에 옆 자리에 앉은 S를 알게 된 것이고. 


 하얗고 큰 눈에 서글서글한 인상과는 아주 딴판으로 S는 세상사에 대해 매우 비관적인 시선을 가진 사람이었다. 자기혐오와 자기 연민이 복잡하게 뒤엉켜 있었고, ‘비혼’이라는 말이 없을 때부터 비혼을 주장하던 신여성. 영화감독이 되고 싶어 이 학과에 진학했으나 실상 배우는 것은 별로 없어 후회 중이라고 했다. 속으로는 ‘‘데미안 신드롬’에 걸린 이십 대야 뭐야, 뭔 허세야,’라고 조롱하면서도 나와 비슷한 점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쩌다 보니 교수님을 기다리는 사이 나는 S에게 신상정보를 다 털어놓게 됐고 아, 어쩌다 보니 최근에 남자 친구와 이별한 것도 나누게 돼버렸네. 

 S는 외고 출신이었다. 그 때문인지, 성적으로 줄을 세우는 문화를 끔찍이 여기면서도 학점에 대해서만큼은 강박을 갖고 있었다. 쿨한 것 같은데도 학점에 매달리는 S의 모습은 늘 그녀의 매력을 현격하게 감소시키곤 했다. S는 수업을 열심히 듣느라 매번 첫 줄에, 나는 수업에 아슬아슬하게 도착하느라 남아 있는 첫 줄에 앉다 보니 자연스럽게 우리는 거의 매시간 옆 자리에 앉게 되었다. 영문학도인 나로서는 조금 다행이었다. 수업 중에 생소한 개념이 나오면 S에게 물어보면 되었고 그녀는 거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시작한 죽음의 수업, <영상제작 이론>은 강도는 높았을지언정 무척 흥미진진했다. 수업의 절반은 다큐멘터리나 영화를 보고 연출 테크닉이라든지 서사적 결함 등에 대해 토론을 하는 것이었다. 다양한 시각매체를 접한 나는 마치 엄청난 지성인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 시작했다. 이름은 자주 들어봤어도 실제로 보지 못했을 <달나라 여행>, <모던타임스>, <전함 포템킨>, <가늘고 푸른 선>, <라쇼몽>, 마이클 무어 감독의 다수의 다큐멘터리, 지금은 제목도 생각나지 않는 아주 난해한 영화들을 매 시간 소화하고 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말이 토론이지 사실 상 같은 수업을 두, 세 번쯤은 들었음직한 늙수구레한 복학생들 사이에서 나는 입도 뻥긋하지 못했고 역시 입도 뻥긋하지 못하는 건 S도 마찬가지였다. S는 그들에게 지는 것이 싫어 교수님이 부교재로 선정한 모든 책들을 읽었고, 나는.....

 나는 그냥 놀았다. 이번 학기는 무려 이별을 감당했는데, 수업 출석을  포기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대견하다 스스로를 합리화하면서 말이다. 안 그래도 어차피 지옥의 시간표였다. 젖 먹던 힘까지 밀어붙이든지, 아니면 그냥 즐기면서 다니든지 해도 GPA는 비슷할 것 같은 예감. S는 그런 나의 대범함을 부러워했다. 

 “와.. 너는 어떻게 그러냐. 대단하다”

 “야, 나 놀리는 건지 다 알거든? 네가 사랑의 아픔을 알기나 하냐.”

 “아니, 나는 그렇게 모든 걸 다 놓을 수 있는 게 정말 부럽다니까.”

 안 그래도 쌍꺼풀이 큰 눈을 껌벅이며 진지하게 나의 과감함을 예찬하는 것이었다. 

 S는 모태솔로였다. 고등학교 때 누군가를 아주 잠깐 사귄 적이 있다고 했지만 그건 자신의 기준에서 사귄 것으로  볼 수 없다고 했다. 나는 고작 딱 한 명을 사귀어 본 주제에 연애에 대해서 시시콜콜 아는 척하기 바빴는데, 신기하게도 S는 그런 나를  잘도 들어줬다. 

 정서적으로 잘 통하는 면도 있었고 때마침 대학 들어와 가장 친했던 친구가 외무고시를 준비한다고 휴학을 한 상태라 S와 나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우리는 읽은 책에 대해, 영화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눴다. 과제로 주어졌던 사진전과 전시회를 함께 했고, 그때 그 수업의 가장 큰 프로젝트였던 전주 국제 영화제에도 함께 가 하루에 영화 세 편씩 난해한 영화들을 보곤 했다. 사랑이 떠났는데 무슨 공부냐며  망나니처럼 자빠져 있는 나를 집 밖으로 끌고 나와 그래도 사람이 기본은 해야지, 제발 출석은 하고 과제는 하라고 닦달을 했다. 그 애의 잔소리가 끊일 날이 없었던 한 학기가 그렇게 마무리되고 있었다. S는 A 플러스, 나는 B 플러스. 전쟁 같던 시간이 지나고 나니 벚꽃은 모르는 사이에 져 있었고 녹음이 우거져 딱 지금 같은 더위가 찾아올 무렵, 이별을 했던 첫사랑에게 연락이 왔다. 

 ‘잘 지내?’


 내가 지난 사랑과 재회했다는 것을 S에게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그동안 함께 해온 구남친에 대한 욕 때문에 창피한 것도 있긴 했지만, 무엇보다 더 미안했던 건 S와의 선약속을 취소하고 J를 만났다는 것이었다. S는 이유를 묻지 않았지만 예감하고 있었으리라. 

 우리는 점차 (내 입장에서는 자연스럽게) 연락을 하지 않게 되었다. 미안함 마음에, 점차 그 애를 보는 것이 껄끄러워졌다. 나는 그녀와 함께하기로 계획했던 2학기의 <영상제작 실습> 수업을 신청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신내림의 수강신청 클릭이 빙의하지 않았다는 말로 둘러댔다. 데이트 때문에 S와의 만남이 귀찮게 느껴졌다. 그렇게 책도, 치열하게 싸매고 공부했던 영화 이론도 나에게서 모두 멀어지고 있었다. J와의 만남이 내 인생의 가장 아름답고 행복할 시절이라고 착각했다. 


에필로그 

 존 윌리엄스가 쓴 소설, <스토너>에서 박사과정을 하고 있는 주인공 스토너와 그의 친구 매스터스가 이런 대화를 한다. 

 “그러니까 신의 섭리인지 사회인지 운명인지, 하여튼 그것이 우리를 위해 이 누옥을 지어준 거야. 우리가 폭풍을 피할 수 있게. 대학은 우리를 위해 존재하는 걸세.” 

 소설 속 스토너와 매스터스처럼 우리를 위해 지어진 대학 안에서 S와 나는 위험한 발상을 했고 금지된 사상을 이야기했고 영화를 봤고 또 밤이 새도록 이야기했다. 대학은 <스토너 >에서처럼 미성숙한 나를 성장시키기 위해 단련을 하는 그 순간조차 가장 자상하고 다정했던 것일까. 


 물론, J와의 재회는 또다시 실패로 끝났다. 한데 이상하게도 두 번째 헤어짐은 첫 번째의 그것만큼 아주 힘들지 않았다. 밥도 먹을만했고, 수업도 다닐 만했고, 나를 아주 놓아 버리지 않아도 일상이 그런대로 굴러가더라. 가을 학기가 되어서는 타전공을 기웃거리던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영문과에 정착했다. 한 학기 내내 붙어 다녔던 S와는 이따금씩 만나 커피나 한 잔씩 하는 사이가 되었을 뿐이었다. 나는 그 후에도 각기 다른 얼굴을 한, 하지만 비슷비슷한 형태의 연애를 했고 수강 신청을 할 때는 전에 없는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과제의 양이 많은가’, ‘학점을 따기 쉬운가’, ‘강의실을 이동하는 것에는 문제가 없는가’, ‘시간표의 시간 배정이 고르게 되어있는가,’ ‘교수님은 지나치게 깐깐하지 않은가.’ 삶은 예전보다 수월해졌다. 

 인생이란 참 우습다. 어떤 사소한 일이 그 전과 그 후의 나의 인생을 판이하게 바꿔 놓는다. 내가 만약 S와 계속 함께 했다면 어떤 사람이 됐을까. S는 여전히 취업은 하지 않은 채 영화판에 몸담고 있다. 나는 그 시절은 아주 새까맣게 있고 교단에서 안주하는 삶을 택했다. 

 두 번 다시 책과 영화와 연극을 이야기로 치열한 삶이 내게 허락되지 않았다. 그 비슷한 것조차 다시는. 잔인하게 아름다웠던 내 삶의 화양연화는 딱 그때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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