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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현주 Oct 20. 2020

화양연화(1)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을 표현하는 말

봄 학기가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J와 뜻밖의 이별을 했다(당했다). 여느 때라면 새로운 수업에 대한 기대로 생기가 넘쳤겠지만 갑작스러운 이별로 인해 꼴이 말이 아니었다. 아주 살짝 갬성 msg를 보태 표현하자면 나를 놓아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고나 할까.

 차마 눈물 없이 들어줄 수 없는 하현주의 흑역사, 길을 가다가도 잠을 자다가도 하염없이 눈물을 후드득 떨구던 그때의 내 모습은 여전히 슈퍼 이불-킥하게 만드는 웃픈 과거가 되었다. 그러나 열 손가락, 열 발가락을 오그라 붙게 만드는 이런 신파보다 내 대학생활에 더 큰 문제를 초래했던 건 이별의 징조가 보이기 전에, 그러니까 내가 빠워 오브 러브로 자신감도, 의욕도 만땅 일 때 수강신청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나는 쉽게 기분에 휘둘리는 사람이었다. 행복한 상태라면 가지고 있는 능력의 1000%도 발휘하는 원더우먼이 되었지만, 불행하다고 느끼는 순간 어떤 일도 이루지 못한 채 나가떨어지고 마는 멘탈 쓰레기였던 것이다. 하필 그해 수강신청을 하던 나는 첫 연애 중이었다.(당시의 나는 지구 상의 어떤 생명체보다 행복했다고 단언할 수 있다)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착각에 사로잡혀 있었고, 그 무시 무시한 사랑의 에너지는 다가올 이별을 차마 예상하지 못한 채 인생 최악의 시간표를 탄생시키고야 만다.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대학생들의 수강신청 루틴을 소개할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 에버뤼쥐 대학생이라면 수강신청을 할 때 보통 다음 상황을 고려한다. ‘과제의 양이 많은가’, ‘학점을 따기 쉬운가’, ‘강의실을 이동하는 것에는 문제가 없는가’, ‘시간표의 시간 배정이 고르게 되어있는가,’ ‘교수님은 지나치게 깐깐하지 않은가.’ 

응당 이성이 있고 합리적인 선택을 하는 인간이라면 아무리 듣고 싶은 수업이라도 학업의 강도가 쓸데없이 아주 세다든지, 이 쪽 강의실에서 저 쪽 강의실까지의 거리가 10분 내로 돌파되지 않다든지 하는 문제에 봉착하면 어느 한 수업을 과감히 포기했다. 

하지만 나는 참으로 남달랐다. ‘이게 사람인가, 아메바인가’라고 할 정도로 아주 단순한 한 가지 질문에만 집착했던 것이다.  

 ‘이 수업 재밌으려나.’

그때로 돌아가 대학생 하현주를 만난다면 머리끄덩이를 잡아서라도 제발 두 가지는 더 생각하라고 다그치고 싶을 만큼, 항상 의욕이 말과 행동을 앞섰다. 어디서 그렇게 작은 키에 호랑이 기운이 솟아나는지 모를 일이었다. 

게다가 쉴 새 없이 이곳저곳으로 튀던 나의 호기심도 지옥의 한 학기를 만드는데 큰 지분을 차지했다. 당시 나의 관심을 끌었던 분야는 문화사, 미술사, 예술, 영상매체 같은 것들이었다. 2학년이 되어 영문과 동기들은 전공과목 수강에 매진을 할 때도 나는 꼭 언론홍보 영상학과니, 인류학과니, 생활과학과니 하는 타 학과를 기웃거리며 그들의 전공수업 자리를 축내고 있었다. 그러니 내가 한동안 영문학에 정착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것은 동기들 사이에서도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내 강의 시간표는 언제나 들쭉 날쭉이었다. 이를테면 금요일 2교시 수업을 한 후에 그다음 수업이 7교시나 되어서야 있다든지, 아니면 화요일, 목요일은 공강인데 월요일 수요일이 6 연강이라든지 하는 식으로 말이다, 수강신청을 할 때마다 ‘이번 학기는 죽었지만 그래도 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어리석은 환상에 사로잡혀 있었고, 학기의 절반이 지나면 언제나 과했던 초반 러시의 의욕을 따라가느라 피로감에 허덕이곤 했다. 종강 후에는 그다지 좋지 않은 성적표를 보며 이건 순전히 시간표를 잘 못 짠 탓이라고 스스로 위로하는 일이 어쩜 그렇게 매번 반복되었는지. 

 그 학기의 시간표라고 예외는 아니었는데 이별까지 했으니 학점은 골로 갈 것은 뻔했다. 세~네 시간 공강은 기본이었고, 어떤 날은 1교시부터 수업이 시작되는가 하면 어떤 날은 6교시 시간에 달랑 한 시간만 수업을 듣고 집에 와야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나의 투머치 한 낭만주의적 관점에서 만들어진 시간표의 정수는, 당시 우리 학교의 언론홍보 영상학과에서 학점이 짜기로 유명한 교수님의 <영상제작 이론>이라는 수업이었다. 영문과에서 그 강의를 듣는 건 달랑 나 혼자였다. 실라버스를 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수업과 함께 읽어야 할 부교재는 열 권이 넘었고, 각종 전시회와 사진전, 심지어는 전주 국제 영화제까지 다녀와야 하는 일정이었다. 남자 친구 하고 가면 될 다양한 데이트 코스라고 생각했던 강의 계획서가 이별 후에는 혼자 모든 것을 헤쳐 나가야만 하는 퀘스트가 되고 만 것이다. 

 하지만 열정이 사라졌다고 하여, 남자 친구가 사라졌다고 하여 강의를 무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사실 그 교수님의 <영상제작 이론> 수업은 우리 학교에서 무척 인기가 많았다. 교수님이 직접 필드에서 뛰고 있는 영화감독이라는 말도 있었고, 외국에서 유학을 한 전망이 유망한 엘리트라는 얘기도 간간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순간적인 신들린 클릭으로 인해 몇 대 일의 경쟁을 뚫고 들어왔는데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천금 같은 기회였다. 영상 제작자들에 대한 환상에 부풀어 있던 나는 그 수업을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 학기, 어느 것 하나 놓을 수 없었던 욕심이 빚어낸 처참한 스케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지옥의 시간표를 소화하느라 시련의 슬픔은 분노로 억눌렸고 각종 사진전과 미술관, 영화제를 쫓아다니는 정신없는 스케줄에 점차 첫사랑의 추억이 잊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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