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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현주 Oct 19. 2020

그를 기리며

연재 프로젝트 #14

야하게 쓰면 A였고 그렇지 않으면 B라고 했다. 예쁘면 F를 줘 자기 수업을 다시 듣게 한다고도 했다. 그에 대한 소문이었다. A를 받아도, B를 받아도 조금 귀찮아지는 글쓰기 수업.
도대체 교수라는 권위는 온데간데없고 갓 스무 살이 된 학생들에게 늘 이런저런 구설에 오르곤 했던 그였다. 혹여나 학교 건물에서 오가다 마주치기라도 하면 아이들은 키득 대며 웃곤 했다.

건장한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다.
"저 사람이야"
동기가 내 옆구리를 쿡 찌르며 누군가를 가리켰다. 
"누구-"
"저 사람, 마광수"

아주 마른 체구, 처참하게 바싹 마른 얼굴에 들러붙어 있던 힘없는 흰 머리카락, 움푹 파인 두 볼, 축축한 눈빛. 양복의 양쪽 어깨가 헐거웠고 바지는 국기 게양대에 걸린 깃발처럼 펄럭이고 있었다. 신발은 몸에 비해 어찌나 크던지, 영락없이 노년을 향해 시들어가는 볼품없는 사내의 모습이었다. 도무지 선배들에게서 들은 그런 성욕의 도가니로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그렇게 어느 봄날, 그를 처음 봤다.  


문과대학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이러쿵저러쿵 뒷말은 많이 했으면서도 그의 유명세에 묘한 자부심을 느끼던 어린 위선자가 다름 아닌 나였다. 한 때 다른 학교에서도 도강을 하러 왔다고 하니, 그런 유명인을 이렇게나 가까이서 본 것은 처음이었다

물론 그에 관한 너무 많은 소문은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알 수 없었다. 신비로운 노인네였다. 그가 지나갈 때마다, 시선이 쏠리는 호기심은 어쩔 수 없었다.  


실은 마광수는 국내의 윤동주 연구 일인자였다. 그건 내가 학부를 졸업하고도 한참 뒤에 안 사실이었지만 그의 윤동주에 대한 해석이 여전히 중,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리고 있을 만큼 큰 힘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이...'를 읊을 수 있을 만큼 널리 알려진 시인 아니던가. 동주는 백석 다음으로 내가 좋아하는 우리나라 시인이었다. 영화 '동주'를 보고 더 좋아진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가 동주를 연구했다는 전력을 아는 이는 극히 드물었고 변태 교수라느니, 음락 작가라느니 하는 자극적인 형용사로 그를 소비했다. 마치 그를 욕보이는 것이 나의 순수와 무고함을 증명해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헐뜯으며 짖어댔다. 

물론 그중 누구도 마광수의 작품을 읽은 사람은 없었다. 얼마큼 야한데?라는 질문에 아무도 속 시원하게 대답해할 수 없었고 불온서적으로 처분받아 읽을 수 없었다던 작품의 이름도 몰랐다. 그러나 우리는 끊임없이 그의 이야기를 했다. 끊임없이, 지치지도 않고.


무엇에 대해 너무 많이 이야기를 하게 된다면 그 자체의 의미가 퇴색되어 종국에는 껍데기만 남는다(고 생각한다). 신학기 초, 마광수, 마광수 하며 호기심을 번뜩이던 철부지 새내기들은 곧 그를 궁금해하지 않는다. 매번 답도 없는 뫼비우스의 띠 같은 이야기가 반복되기 때문이다. 아니면 조금이나마 자신들의 험담이 천박하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일까. 


그의 부고를 접했다. 작품처럼 허무하게 갔다. 

마지막까지 교단으로 다시 돌아오길 간절히 바랐다는 이야기를 누군갈 통해 얼핏 듣는다.  

나는 또 아주 짧은 기억의 파편으로만 그를 기억할 것이 너무 송구스럽다. 

R.I.P

2017.09.05씀


내가 죽은 뒤에는

내가 「윤동주 연구」로 박사가 되었지만

윤동주처럼 훌륭한 시인으로 

기억되긴 어렵겠고


아예 잊혀져 버리고 말든지

아니면 조롱 섞인 비아냥 받으며 

변태, 색마, 미친 말 등으로 

기억될 것이다.


하지만 칭송을 받든 욕을 얻어먹든

죽어 없어진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으랴

그저 나는 윤회하지 않고

꺼져버리기를 바랄 뿐


-마광수 시선, <내가 죽은 뒤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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