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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현주 Oct 18. 2020

교사로움(Are You Teachable?)(2)

연재 프로젝트 #13

유난히 서툴던 그 해 3월, 첫 월요일. 그 1교시를 잊을 수 있을까. 생각만으로도 그날의 온도와 그 곳의 분위기가 곧 눈앞에 펼쳐질 것만 같다.

마침내 슨생이 되고 만 나는 2학년 4반 교실 앞에서 내 교사로움에 대해 심판 받을 채비를 하고 있었다. 첫 수업이었다. 이 직업이 자신의 소명인지 그렇지 않은지는 첫 날, 첫 수업에서 부터 알 수 있다고 누군가 말했다. 익숙해지기보다 그저 정해져 버리는 것. 그것이 교사의 일라고 했다. 나는 과연 그 택함을 받은 자일까. 역시나 자신이 없었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쿵쿵 울려대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최대한 깊게 숨을 들이키는 것 뿐이었다.

차가운 감촉의 교실 문 손잡이를 잡는 그 짧은 순간, 학창 시절(라떼는 말이야)이 떠올랐다.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나름의 공상으로 멋있는 남자 선생님을 남몰래 짝사랑하기도 했고, 미혼인 이 선생님과 저 선생님을 엮으며 낭만적인 연애 스토리를 만들기도 했지만, 그들은 어쨌든 ‘우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주 강인하거나, 자애롭거나, 아니면 무자비한, 소위 ‘찐어른’이 가지는 요소들로 뭉뚱그려 한 덩어리의 이미지의 ‘교사’라는 절대적 타자를 만들어내곤 했던 것이다. 대게는 촌스럽고, 보수적이고, 지독할 정도로 꽉 막혔으며, 수업 도중 컴퓨터가 멈추면 지가 먼저 어떻게 해볼 생각은 안하고 늘 정보 부장부터 찾는, 지극히 평범하고도 오래된 익숙한 존재. 난 생각했다. 선생만큼은 절대 되지 않으리라.

그런데 이렇게 슨생이 되어 고등학교에 컴백해버리고 만 건 신이 내게 건네는 농담 같았다. 내 안의 나는 아직 철부지인데, 그걸 아이들에게 몽땅 들켜버릴 것만 같았다. 이 아이들에게 도대체 무엇을 가르칠 수 있단 말인가. 그냥 다 집어치고 도망가고 싶었다.

다행히도 자본주의의 힘은 자아의 그것보다 강했다. 도망쳐 버리고 싶은 마음과는 다르게 몸은 이미 교실에 반쯤 걸치고 있었고 모르는 사이 미소까지 머금으며 아이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얘들아, 안녕.” (좋았어, 자연스러웠어.)

스물 몇 쌍의 반짝이는 눈동자가 나를 향해 쏟아지고 있었다. 그 별들을 보고 있자니 뒷목에서부터 어깨까지 묵직한 것이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긴장 되었다. 그 때 누군가 나에게 첫 ‘선생님’을 불렀다.

‘선생님’이라고.

내게 와서 달라붙은 그 평범하고도 오래된 단어가 갑자기 너무 멀고 아득하게 느껴졌다.

‘아니 내가 뭐라고 이렇게 아무런 의심 없이 나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거야.’

속수무책으로 무방비인 그 아이를 보며 아주 조금 눈이 시큼해졌다. 선생님이라니. 내 삶에 별 의미 없던 그 호칭이 마침내 무거워졌고, 마음에 새겨졌고, 이 직업이 나쁘지 않다고 느꼈다. 드라마틱한 동기가 없어도, 그럴듯한 스토리텔링이 없어도 좋은 교사가 될 수 있을 것만 같은, 막연한 자신감이 들었다.

물론 아직 나는 과연 선생으로서 내가 이상적인 사람인지는 잘 모르겠다. 일은 여전히 서툴고, 여기저기 실수도, 구멍도 많다. 아이들의 존재가 익숙해져 고마움을 잊는 때도 종종 있다. 하지만 매년 3월 이 즈음이 되면 나의 첫 선생님을 불러준 그 아이를 떠오른다. 잘 웃고, 한 번도 졸지 않았던 아이의 눈망울을 말이다.

새 학기가 곧 시작된다. 이 코로나가 잠잠해지고 모두가 일상으로 돌아가는 날, 나는 또 한 번 나의 교사로움을 심판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은 아무 의심 없이 나를 또 선생님이라고 부를 것이다. 언제까지고, 언제까지나 신뢰를 받고 있다는 이 사실을 잊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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