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지로의 숨은 큐레이션형 책방
인쇄소 사이의 좁은 골목, 내 손 한 뼘 사이즈보다 약간 긴 듯한 나무 간판에 한자로 정중하게 ‘서향관’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허름한 건물 벽에 걸려 있다. 설마 하는 곳에 있을 줄이야. 지도 어플을 켜놓고도 몇 번이나 같은 골목을 왔다 갔다 하고 나서야 한참만에 만날 수 있었던 곳이다. 독립서점들의 규모가 작아 놓치기 십상이라는 것은 이미 숱한 경험 상 알고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서향관 찾기는 초고난도에 속한다. 물론 길 찾기에 들인 시간이 조금도 아깝지 않은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좁은 계단을 올라가 초록색의 문을 열고 들어간 곳에 오롯이 나와 책에 집중할 수 있는 안락한 공간이 있기 때문이다.
‘서향관’은 큐레이션형 책방이라는 독특한 콘셉트로 오직 스무 종류의 책만 판매한다. 사장님의 취향에 따라 분기별로 책이 선정되고 전시되는데, 그중 열 권은 기성 출판사의 책들로 구성되고 나머지 열 권은 독립출판물에서 선정한다. 때문에 남의 집에 놀러 갈 때면 언제나 책장부터 훔쳐보며 이 집주인의 취향과 독서 편향성을 가늠해보기 좋아하는 나의 관음증을 충분히 만족시키는 공간이었다. 또한 경영적 측면에서 보자면 스무 권만 판매하는 전략으로 재고 낭비를 막을 수 있는 영리한 선택이기도 했다. 정말 좋은 책이라고 판단하여 책방에 들여왔어도 찾는 사람이 없다면 악성 재고가 되기 마련이고, 이런 악성 재고들은 책방 운영에 타격을 주기 때문이다. 하여 다양한 책을 들여와 조금씩 파는 것보다 이렇게 몇 가지 책을 큐레이션 하여 최대한 재고를 줄이는 것이 좋다. 서점의 책장에서 길을 잃고 우연히 만나게 되는 보석 같은 존재들이 있지만 늘 그런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게다가 어느 독립서점을 가든지 비슷비슷한 책들 뿐이라는 점에서 조금 아쉬운 마음을 느낄 때 즈음 ‘서향관’을 발견했다. 물론 이렇게 운영되는 독립 서점에는 맹점이 있다.
‘서점 운영자의 취향만 믿고 책을 사러 올 수 있다고?’
‘스무 권 안에 내가 원하는 게 없을 수도 있잖아?’
‘온라인으로 사는 게 더 낫지 않나?’
물론 모두 맞는 말이다. 하지만 분명 이런 한계를 차치하고서라도 굳이 ‘서향관’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바로 이곳을 운영하는 사장님 때문이다.
'서향관'은 김병선이라는 콘텐츠로 서점을 브랜딩하고 매력적인 장소로 만들었다. 공간에 대한 정보를 찾다 보면 사장님에 대한 이야기가 종종 등장한다. 작가이자, 배우, 그리고 책방지기 등 다양한 N 잡러로 한 번쯤은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인물이다.‘100일, 100만 원, 유럽여행’을 쓴 작가이며 연극도 하고 강연도 하는 김병선이라는 사람과, 그가 큐레이션 하는 책은 어떤 것일까 하는 궁금증이 절로 생긴다. 게다가 이곳을 방문한 블로거들의 글에는 ‘친절하다’는 표현 일색이다. 그 친절의 의미가 책에 대해 깊이 있게 나누고 소개를 받을 수 있다는 부분에 있는 것은 아닐까. 호기심만 가득 쌓여가던 차에 마침내 짬이 생겨 이곳으로 향한 건 봄을 앞둔 겨울의 끝자락의 일이었다.
좁은 골목에서 만난 어스름한 계단을 올라가 오른쪽으로 도니 초록색 문이 나온다. 인스타그램에서 봤던 깊은 초록색이다.
‘이곳이구나.’
반가운 마음에 203호의 현관 손잡이를 잡고 들어가니 좋은 향이 나는 아늑한 공간이 등장한다. 종이를 실은 지게차가 지나가고 인쇄소의 사장님들이 맹렬히 일하는 거친 노동의 한 복판에 이런 쉼터가 자리하고 있다는 것은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게 했다. 인쇄소와 서점은 서로에게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임에도 이렇게나 다른 모습을 갖고 있다니. 책방은 잘 정돈된 마을이나 도심가에 세워져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는 순간이기도 했다.
서점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니 차분한 초록색의 벽지, 빔을 볼 수 있게 만들어져 있는 푹신한 빈백 체어, 그 뒤에는 바형 테이블과 책장이 배치되어 있다. 한쪽 벽면의 책장에는 그 시즌 사장님이 큐레이션 한 책들이 놓여 있고 마주 본 책장에도 서른 가지 종류 남짓한 책들이 진열되어 있다. 좁은 직사각형의 공간을 잘 활용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록색의 벽지와 고동색의 책장은 이곳에 방문한 손님들의 마음을 안정감 있게 붙잡아준다. 간단한 종류의 티와 과자가 준비되어 있고 필요하다면 외부 음식을 가지고 와 먹으면서 작업을 하거나 책을 읽을 수도 있는 여유도 있다.
내가 이 공간을 처음 방문했을 때 사장님도 계셨는데, 운영 시스템을 묻고 이야기를 들으니 시간 가는 줄 모르겠더라. 내가 서향관에서 만난 책은 ‘일의 철학’이었는데 이 것이 다리가 되어 나도 모르게 퇴사를 한 이야기, 또 이번 퇴사 이전에 했던 퇴사 이야기, 그 전 퇴사 이전의 또 다른 퇴사 이야기도 술술 하고 있다. 수다스러움은 편안한 공간에서는 감출 수 없는 것이 나의 습성이기도 했으니 서향관이 주는 안락함은 이것으로 증명된 셈이다.
< 공간 이용 꿀팁 >
공간을 이용하는 데 드는 비용은 2시간에 3,000원, 추가 1시간당 1,500원으로 쉽게 말해 시간당 1,500원인 셈이다. 만약 통으로 서향관을 빌리고 싶다면 한 시간에 15,000원을 내면 된다. 이렇듯 공간 대여를 하며 비교적 유연하게 운영되고 있기 때문에 인스타그램 DM으로 오늘은 운영을 하는지, 언제쯤 방문하면 좋을지 물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인스타그램 : @paperfragrancero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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