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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소연 Aug 26. 2024

비디오 대여점(3)

8평으로 이루어진 작은 우주

8평 남짓한 동네 비디오 가게는 작은 우주를 품고 있었다. 영화에 진심인 주인아저씨가 자신만의 안목으로 비디오를 가져다 놓았다. 아무도 찾지 않아 빼곡하게 먼지가 쌓인 영화라도 한번은 자신을 아라봐 줄 누군가를 위해 그 자리를 지켜줬다. 그래서 알프레드 히치콕의 <사이코>나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 같은 흑백 영화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출처 : 씨네 21

나와는 말 한마디 섞지 않던 비디오 가게 주인아저씨는 웬일인지 아빠와 잘 통하는 사이였다. 아빤 주말이면 어른의 특권으로 두, 세 편 정도의 중국 무협 영화를 빌렸는데 그때마다 아저씨에게 재밌는 것을 추천 받았던 것이다. 물론 나는 아빠와 아저씨의 친밀감에 대한 부러움보다는 주말에 영화를 몇 편 봐도, 심지어는 평일에 영화를 봐도 괜찮은 아빠의 삶이 위대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어른이 되면 나도 꼭 그런 멋진 사람이 되겠노라 다짐하는 것이었다. 물론 평일에도 영화를 봐야만 간신히 견뎌질 어른들만의 삶의 무게가 있다는 건 한참 후에 알게 된 사실이었다. 


비디오 대여점이 하나, 둘씩 문닫기 시작한 것은 DVD가 보급되면서다. 한 편의 영화가 얇은 CD 한 장에 담겼고 그런 CD에 불법 복제된 작품들은 너무나 쉽게 유통되었다. 길거리에는 여화 3편을 담은 DVD를 단돈 만 원에 파는 노점상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복제물을 사는 사람도, 파는 사람도 저작권에 대한 개념이 무척 희미하던 시절이었다. 

그즈음 우리 집도 VHS 기기를 DVD 플레이로 바꾸었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 방식으로 바뀌었다고 하는데 솔직히 이전의 것에 비해 뭐가 더 좋아졌는지 알 수 없었다. 똑딱이 키로 이루어진 빨리 감기와 되감기 버튼이 사라진 DVD 플레이로는 보고 싶은 장면을 찾는 것이 쉽지 않았다. 게다가 어쩌다 CD에 상처라도 나면 화면이 깨졌다. 아무렇게 팽개쳐 놔도 잘만 돌아가는 투박한 비디오 테이프는 겉이 빤지르한 CD에 의해 서서히 밀려났다. 


비디오만이 아니다. 다른 것들도 디지털로 대체되고 있었다. 카세트테이프를 재생시키던 마이마이도 MP3가 나온 후 맥을 못 췄다. 음악도 디지털, 사진도 디지털. 이런 새로운 물결에 디지털이 모든 것을 대체하리라고 주장하는 한 축과 그럼에도 사람 냄새 나는 아날로그가 여전히 건재할 것이라는 다른 한 축이 대립했다. 어떤 것이 맞는 소리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디지털 물결이 요동을 치고 있었음에도 동네 비디오 가게는 DVD를 들여올 만한 여력이 되지 않았다. 우리 가족은 번화가에 있는 크고 세련된 프렌차이즈형 대형숍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동네 비디오 가게보다 더 많은 종류의 DVD 영화들이 있었고 무엇보다 쾌적했다. 인기 많은 작품은 세, 네 개씩 보유하고 있어 원하는 영가 이미 대여 중인 경우는 드물었다. 젊은 아르바이트생 대여섯 명이 친절한 서비스를 제공했고 모든 것은 전산 시스템으로 운영되었다. 머리 정리가 안 된, 숫기 없는 아저시까 장부에 일일이 손으로 적던 동네 비디오 대여점과는 차원이 달랐다. 대형숍에는 포인트 제도라는 것도 있었는데, 열 번 빌리면 한 번은 공짜였기에 왠지 이득인 것 같았다. 작은 동네 비디오 가게는 막강한 대형숍의 자본력을 이길 수 없었다. 날이 갈수록 그곳엔 손님의 발길이 뜸해졌다. 


당연한 이치라고 생각했다. 더 화려하고, 더 편한 서비스와 더 좋은 혜택을 선택하는 것이 합리적인 인간의 본성이라고.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하여 우수한 품질의 것들만 살아남는다는 자본주의 논리에 어떤 잘못이 있단 말인가. 그렇게 우리 가족이 등을 돌린 비디오 대여점은 빠르게 기울어져 갔고 그보다 더 빠르게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 버렸다. 

이후 그 세련된 대형 매장도 결국 사라지게 된다. 다지털 기술은 더욱 발달하여 이젠 영화를 볼 때 CD라는 매개조차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인터넷을 통해 밖에 나가지 않고도 영화 한 편을 다운 받을 수 있게 된 세상이 도래했다. 

그러나 진보된 기술은 한편으로 개인의 경험을 한정시키고 제한했다. 영화를 보는 것에서도 그랬다. 소수의 사람들이 찾는 옛 영화나 예술 영화들에 다각ㄹ 수 있는 루트는 점점 협소해졌다. 알고리즘은 내 취향에 맞는 작품을 골라 줬지만, 오히려 그 취향에 갇힌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보는 것만 보고, 듣는 것만 듣게 되는, 그리하여 이 음악이 그 음악 같고, 그게 그거 같은, 도무지 나와 다른 의견은 들리지 않고 자꾸 내가 보는 세상의 틀만 확고하게 만드는, 그런 세상. 

이런 세상에서 90년대 비디오 가게 주인아저씨와 우리 아빠 사이에서 생겼던 취향 공동체의 친밀감 같은 걸 다시 찾기는 힘들어 보인다. 마음에 들지 않아도 다른 영화로 빨리 갈아탈 수 없었던 그 시대에 우리는 빌려온 영화의 실패를 인내했고, 성공은 충분히 즐기며 자랐다. 그러는 사이, 성공과 실패의 구분은 더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었고 모든 순간에는 의미가 깃들고 있었다. 


덧.

비디오 대여점마다 금기의 구역이 있다. 바로 빨갛게 '연소자 관람 불가'라고 쓰여 있는 코너다. 당시 내 머릿속에는 연소자 관람 불가 영화들은 모두 엄청나게 야하고 외설스러운 것으로 각인 되어 있었다. 얼핏 봐도 조금 야릇한 포즈의 남녀 모습과 표정의 사진들이 있어 본능적으로 돌아가는 고개를 의식적으로 막아내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어쩌다 해당 구역에서 영화를 빌리는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 저런 영화를 대낮에 부끄럼 없이 빌릴 수가 있을까.

라고 생각했다. 나는 어른이 되어도 연소자 관람 불가는 절대 보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세상이 그처럼 단순하다면 참 좋으련만. 알고 보니 우리 엄마, 아빠도 연소자 관람 불가 영화를 보는 사람이었다. 알고 보니 그런 등급의 구별은 절대적이지도 않았다. 때로는 정치적인 맥락이 작용하기도 했고, 이권도 개입하는 것이 영화 관람 등급이기도 했다. 

빨간색 표시가 좋은 것, 나쁜 것을 구분하는 게 아니라는 것, 은근히 등급이 높은 영화들 중에는 좋은 작품이 많다는 것은 내가 마침내 모든 영화의 등급을 볼 수 있는 나이가 되고 나서야 알게 된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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