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에 초딩이 비디오를 고르는 법칙
로빈 윌리엄스의 비디오는 무조건 빌려야 하는 법이다. 아저씨가 나온 영화에는 실패가 없기 때문이다. 작달만한 키에 선한 눈매, 화살표 모양의 코, 웃을 때 한없이 길어지는 입매. 좋은 사람이라는 확신을 주는 단단한 표정이다. 그런 인상 덕분인지 아저씨가 맡은 캐릭터는 언제나 정의롭고 인자한 것들뿐이었다.
내가 아저씨를 처음 본 것은 <후크>라는 영화에서였다. 어린 시절 동심을 잃은 피터팬이 성인이 되어 네버랜드로 돌아가게 되면서 일어나는 일들을 그렸는데 그 작품에서 어른 피터팬을 연기한 배우가 바로 로빈 아저씨였다. 이미 디즈니 만화 <피터팬>의 후속작이라는 사실 자체만으로 그 영화가 좋았다. 로빈 아저씨가 후크 선장을 통쾌하게 물리치는 장면이나 팅커벨과 같이 하늘을 날아다는 것이며, 환상적인 네버랜드에서 벌어지는 아이들만의 세계는 이따금씩 나를 몽상에 잠기게 했다.
누군가의 팬이 된다는 개념이 머릿속에 없었어도 나는 아저씨가 나온 영화들이라면 꼭 챙겨보기 시작했다. <미세스 다웃파이어>, <쥬만지>, <플러버> 같은 것들을 말이다. 환상의 나라에 대한 모험이나 악당을 물리치는 서사에서 아저씨는 언제나 정의롭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내 마음에 제일 처음 들어선 외국 배우. 그래서인가, 나는 로빈 아저시를 이전에도 영원히 존재해왔고, 앞으로도 영원히 존재할, 늙지도, 죽지도 않을 사람으로 여겼다.
2014년에 파킨슨병에 걸린 것을 비관하여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기사를 읽었을 때 유년의 한쪽 부분이 미세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90년대를 주름 잡던 많은 유명인들(마이클 잭슨이나 브리트니 머피 같은)의 부고를 들을 때마다 묘한 기분이 들곤 했지만 이렇게 마음이 텅 비었던 적은 없었다. 그럴 리 없다고, 그렇게 인자한 미소와 선한 눈매를 가진 사람이 절망과 슬픔에 빠져 자신을 놓아 버렸을 리 없다고. 허망하게 가버린 그를 원망하면서도 계속 살아줬음, 하는 마음은 나의 욕심일 뿐이라는 걸 알만큼 커버린 후였다.
*로빈 윌리엄스 : 미국의 배우로 <죽은 시인의 사회>, <굿 윌 헌팅>, <쥬만지> 등의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한 배우로, 푸근한 아저씨 이미지를 갖고 있다. 디즈니의 <알라딘>에서 '지니'의 성우를 맡아 활약한 적도 있고 <후크>에서 성인이 된 피터팬 역할을 하여 아이들 팬이 많았다. 미국에서는 거의 국민 배우인 셈인데, 안타깝게도 파킨슨 병을 진단 받은 것을 비관하여 2014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마이클 잭슨 : 마이클 잭슨은 20세기 대중문화의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상업 수익을 남긴 아티스트다. 1980년대부터 활발한 활동을 하였고, 그 열기는 90년대까지 이어져 갔지만 후반경 성추문과 소아 성애등의 루머에 시달렸다. 2009년 과다한 프로포폴 투여로 심장마비를 일으켜 사망하였다. 앨범으로는 <Thriller>, <We Are the World>, <Dangerous> 등이 있다.
*브리트니 머피 : 미국의 여배우로 1995년 <클루리스>로 데뷔하였다. 당시의 유명한 하이틴 스타들이 많아 빛을 보진 못했찌만 <우리 방금 결혼했어요>, <8마일>, <씬 시티>를 통해 국내에서도 점차 인지도를 쌓았다. 2009년 돌연 사망하였다.
빌려온 비디오가 성공적일 수 있는 두 번째 팁은 하이틴 영화를 고르는 것이다. 미국의 중학교, 고등학교가 나오는 영화라면 무엇이든 좋았다. 눈부신 금발 머리, 자유로운 학교생활, 치어리더와 풋볼 게임 같은 지극히 미국적인 것에 마음이 사로잡히곤 했다. 나의 이런 환상에 부채질한 것 중 하나는 <패어런트 트랩>이라는 어린이 영화였다. 성인이 되어 각종 사고와 물의를 일으킨 린지 로핸이 아역으로 알약 스타덤에 오른 작품이었다.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다. 이혼한 부모님 때문에 서로의 존재를 모른 채 따로 자라던 일란성 쌍둥이 자매가 여름 캠프를 갔다가 우연히 만나게 된다. 처음에는 똑같은 외모를 가졌다는 사실에 경계심을 품고 갈등을 겪지만 결국 자신들이 쌍둥이임을 알게 되고 부모님의 재결합을 위해 캠프 마지막 날, 상대방의 집으로 바꿔 돌아간다. 한 명은 엄마가 있는 영국으로, 다른 하나는 아빠가 있는 미국으로. 부유한 가정의 모습과 가족의 감동적이고 극적인 회복의 서사, 악녀의 등장은 내 심장을 쥐락펴락하며 울고 웃기고를 반복했다.
할리우드 영화의 작법들은 매번 비슷했다. 어수룩한 주인공이 등장하고 그에게 이루기 힘들어보이는 목표가 있다. 그 목표 달성을 방해하는 많은 요소들, 이를테면 가난이나 사회적인 편견이나 물리적인 억압이 있다. 주인공은 그런 모든 역경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자신이 성취하고자 하는 바를 얻어낸다. 전형적이고 뻔한 '아메리칸드림'의 형태였지만 내가 그 때 뭘 알았겠는가. 나는 그 뻔하디 뻔한 결말이 좋았다. 세상이 그럴 거라는 믿음이 있던 때, 악한 사람은 반드시 응징되고 선한 사람은 반드시 보상받는다는 이야기를 믿었던 때. 가족이나 사랑, 꿈을 지켜주는 서사 속에서 착한 마음을 잊지 않는다면, 노력만 한다면, 모든 것이 가능한 것처럼 보이던 때의 이야기였다.
*린지 로핸 : 1998년 <페어런트 트랩>으로 1인 2역의 연기를 능숙하게 소화하면서 아역배우 스타가 되었다. 1986년 생으로 90년대를 향유한 키즈이며 한때 할리우드 악동으로 불릴 정도로 구설수에 많이 올랐지만 지금은 결혼하여 아들을 하나 낳고 행복한 가정생활을 하고 있다.
*아메리칸드림 : 노력과 의지만 있다면 자신의 계끕이 무엇이든, 젠더가 무엇이든, 인종이 무엇이든 성공할 수 있게 해주는 기회의 땅이 바로 미국이라는 관념이다. 하지만 '아메리칸드림'의 허구성은 지속적으로 비판 받고 있다.
덧
미국 병을 악화시킨 하이틴 영화에는 10대 초반 아이들이 보기에 부적절한 것도 있었다. 하지만 90년대에는 비디오 나이 제한에 대한 준법정신이 상당히 느슨했다. 대놓고 외설스러운 성인물이 아니라면 현재 나이에 살짝 넘치는 영화를 쉽게 빌릴 수 있었다. 한번은 친구들 사이에서 재미있기로 소문 난 하이틴 영화 <클루리스>*를 대여하기 위해 비디오 가게로 간 적이 있다. 난 고작 열두 살이었고 <클루리스>에는 15세 등급이 찍혀있었다. 가게 안에서 비디오 케이스를 들고 빌리기를 시도할지 말지, 한참 고민했다. 영화 장면과 줄거리를 보니 더더욱 보고 싶다는 확신이 들었지만 도무지 내 나이에 허락되지 않은 이 영화를 비디오 아저씨에게 가져갈 용기가 생기지 않았던 것이다.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일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초자아와 이드 사이의 줄다리기가 시작되었다. 결국 보고 싶다는 욕망 앞에 나의 도덕적 관념이 무릎을 꿇을 수밖에. 비디오를 손에 쥔 채 카운터에 있는 주인 아저씨에게 천천히 다가간다. 심장이 명치 쪽에서부터 펄떡 거린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그러나 분명 긴장하고 있었을 표정으로 비디오를 카운터 데스크에 올려놓았다.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지만, 아저씨가 15세 미만은 볼 수 없다고 야단이라도 친다면, 마치 까마득히 몰랐다는 듯 메소드 연기를 펼칠 생각이었다.
그러나 아저씨는 아무 말도 없이 거의 기계적으로 비디오 케이스를 열고 테이프를 꺼냈다. 평소와 다름없이 우리 집의 동, 호수를 묻고 그것으로 전부였다. 까만 비닐봉지에 담긴 비디오와 함께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여전히 요동치는 심장을 끌어 안은채로. 찝찝한 기분이다. 혹시 엄청나게 야릇한 장면이 나오는 건 아닐까.
그렇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본 <클루리스>의 기억은 수치심과 죄책감으로 얼룩져 있다. 의지를 가지고 행한 위법 행위의 첫 경험. 그것은 결코 달콤하지도 짜릿하지도 않았다.
*클루리스 : 90년대 대표적인 미국 하이틴 영화다. 이 영화로 한국의 많은 학생들은 미국 고등학교 생활에 대한 환상이 생겼다. 특히 여주인공을 맡은 알리시아 실버스톤은 아름다운 미모와 패션으로 인기몰이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