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도시*에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할 즈음, 우리 가족은 머물던 단독주택을 떠나 네모반듯하게 구획된 아파트촌으로 이사 했다. 아빠는 월급쟁이, 엄마는 전업주부, 초등학교 저학년인 딸과 유치원생 아들이 각각 하나씩인, 90년대 전형 네 명의 핵가족. 벽으로 둘러싸인 아파트-적 일상은 이전 생활에 비해 지극히 단조롭게 느껴졌다. 주변에는 온통 우리 가족과 비슷한 사람들뿐이었고 나를 구성하고 있는 도심의 표준적 삶은 되풀이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엉뚱하고 공상에 빠지기를 좋아하는 아이였다. 정갈하고 규칙적으로 흘러가는 일상은 지루했고 새로운 세계를 향한 갈증과 타는 듯한 호기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른 모양의 삶을 사는 이들의 이야기, 그들의 고민, 행복과 열망 같은 것이 궁금해질 무렵, 그래서 질문이 많아지고 어른들을 자꾸 귀찮게 할 무렵 엄마는 동네 비디오 대여점*에서 애니메이션이니, 할리우드의 하이틴 영화니 하는 것들을 빌려주기 시작했다.
비디오를 품은 텔레비전은 호환, 마마*보다 무섭다는 무분별한 불량/불법 비디오 시청을 경고했고, 이어서 본격적으로 내가 살고 있는 공간과 전혀 다른, 낯선 세상과 이야기를 보여줬다. 생경한 이미지의 파편들 속에서 마음껏 유영했고 언제나 선한 것이 승리하는 권선징악의 서사를 보며 정의로운 마음을 갖고 있다면 못 할 것이 없으리라는, 지극히 순진하고도 어리숙한 생각을 품었다.
비디오가 만들어 준 환상의 공간은 평범한 내 삶에 작은 틈을 내주었다. 비디오를 빌릴 수 있는 토요일이면 아침부터 무척 기분이 좋았다. 학교가 끝나자마자* 엄마가 쥐여 준 천 원짜리 몇 장을 가지고 남동생과 동네 상가로 내달리는 순간, 난 지구에서 가장 행복한 아이였다.
그렇게 달려간 마을 단 내 단층짜리 상가에는 'OO비디오 대여점'이 있었다. 여느 비디오 가게의 풍경처럼 입구에는 너저분하게 비디오들이 쌓여 있었고 문을 열자마자 퀴퀴하고 탁한 담배 냄새가 코를 찌르는 곳이었다. 꾀죄죄한 더벅머리에 매사 심드렁하고 지독히도 말 없는 주인아저씨는 내가 와도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인사에 듣는 둥 마는 둥. 하지만 차리라 이것저것 말 시키는 옆집 슈퍼마켓 아줌마보다 침묵으로 일관하는 아저씨가 난 편했다.
그 많은 비디오가 어린이용, 로맨스, 스릴러, 공포 등의 굵직한 카테고리별로 나누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 이하의 분류 기준을 어린 내 머리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가나다 순도, 그렇다고 영화가 나온 시기순도 아니었다. 주인아저씨는 자신만의 고유한 영화에 대한 철학과 신념으로, 그러니까 요즘 말로 하자면, 비디오들을 나름의 규칙과 지식으로 '큐레이션' 했던 것이다. 자신이 창조한 작은 비디오 왕국에서 영화의 인지도와 장르, 배우들의 명성을 고려하며 배치하는 소소한 기쁨을 누렸겠지. 손님들이 모두 돌아가고 마감이 임박한 밤 늦은 가게에서 그렇게 진열된 비디오들을 보며 자신이 창조한 질서에 충만해 했겠지.
비디오가게를 갈 때면 철거머리 같은 남동생이 꼭 쫓아 왔다. 누나가 하는 것은 뭐든 해야 직성이 풀리는 애였으니 비디오를 고를 때도 성가셨다. 엄마가 정한 1주말 1영화의 규칙 때문에 어떤 영화를 볼지 우린 매번 합의의 과정을 거쳐야 했다. 보통의 남매처럼 나와 내 동생에게도 평양냉면과 함흥냉면만큼이나 좁힐 수 있는 취향의 거리가 있었고 그것은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았다. 동생은 로봇이니 전쟁이니 하는 만화를, 나는 지브리 풍의 애니메이션이나 할리우드 하이틴 영화에 꽂혀 있었다. 동생을 구워삶아 내가 원하는 것만 볼 수 있었던 호시절은 찰나의 순간으로 지나갔고, 이내 그 애에게는 자기주장을 할 수 있을 만큼의 자아가 들어섰다. 더는 누나의 권위로 누를 수 없게 되자 우리는 각자 원하는 비디오를 들고 가게 문간에서 줄곧 다투기만 했다.
동네 창피한 것도 모르고 싸워대는 바람에 엄마는 나와 내 동생이 원하는 영화를 따로 빌릴 수 있도록 허락을 해야만 했다. 성격과 개성이 정반대인 남매를 키우는 것은 고난의 연속이었을 터. 하지만 엄마의 마음을 헤아리기에는 너무 어렸다. 나도 외동이 아니기에 억울한 것은 많았다. 필연적인 투쟁과 쟁취의 연속이었다. 먹을 것도 2분의 1, 장난감도 2분의 1, 부모님의 관심도 2분의 1. 온통 절반으로 점철된 남매의 삶 속에서 각자의 비디오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반으로 나누지 않고도 누릴 수 있는 온전한 하나를 갖게 되었음을 의미했다.
물론 투쟁할 대상이 사라졌음에도 여전히 영화를 고르는 일은 결코 쉬워지지 않았다. 동생을 설득하고 싸우는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비디오 가게 진열대에서 고민하게 되었던 것이다. 끝내주는 걸 찾고 싶다는 욕심에서 였다.
인터넷 후기도 찾아볼 수 없던 90년대였으니 오로지 그간 길러온 직관과 비디오 갑에 그려져 있는 영화 포스터, 요약된 줄거리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 비디오 갑이 뒤집어져 꽂혀 있으면 이미 대여 중이라는 의미였는데 무슨 법칙이라도 작용하는 것처럼 보고 싶은 것들은 언제나 누군가 먼저 빌려간 후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에게도 영화를 고르는 몇 가지 기준과 노하우가 생겼다. 몇 번의 실패와 성공 이후의 일이었다.
to be continued...
*신도시 : 신도시는 계획적으로 건설한 도시다. 90년대 제1기 신도시 계획은 노태우의 13대 대선 공약이었다. 주택 200만 호 건설 계획에 따라 분당신도시, 일산신도시, 중동신도시, 평촌신도시, 산본신도시가 조성되었다. 1991년부터 1기 신도시에 도시민들이 입주하기 시작했다.
*비디오 대여점 : 동네에 하나씩은 꼭 있는 대여점으로 VHS 비디오 테이프를 200원에서 1000원 선에서 빌려줬다. 신작은 2000원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하고 대여 기간은 비디오마다 달랐다. 연체료가 있는 경우도 있었지만 동네 장사다 보니 봐줄 때가 많았다.
*호환, 마마 : 비디오를 재생시키면 항상 나왔던 공익광고로 "옛날 어린이들은 호환, 마마, 전쟁 등이 가장 무서운 재앙이었으나"를 패러디한 것이다. 보통 1991년부터 1994년에 나온 비디오테이프에서 볼 수 있다.
*토요일 학교 등교 : 그때는 토요일에도 학교를 가던 시절이었다. 심지어 노는 토요일인 놀토도 없었던 때. 다만 그날은 3교시, 혹은 4교시까지만 했기 때문에 여전히 90년대 키즈들은 즐거울 수 있었다. 직장도 마찬가지로 주6일제 근무를 했다. 참고로 놀토는 2005년부터 시행이 되었고 정식으로 주5일제가 시작된 것은 2012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