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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ng Sukwoo Dec 19. 2019

버티는 해

2019년 12월 17일

사무실에서 깜빡 잠이 들었다. 느릿느릿 정리하고 집에 가니 아침이었다. 샤워만 하고 나와서 서교동까지 택시를 탔고 다행히 늦지는 않았다. 대신, 이라기는 뭐하지만 MA-1 재킷 오른쪽 주머니에  리디페이퍼 RIDIPAPER 전자책 단말기가 몸이  바깥으로 나오기도 전에 먼저 콘크리트 바닥으로 떨어졌다. 촬영지 앞에서 다시 기기를 보니 윗부분이 살짝 파였다. 일주일   기기를 바라보는 얼리어댑터의 마음은 그보다 조금  파였다.

이상하게 피곤했기 때문에 - 사실 나뿐만은 아니었다 - 카페인 가득  에너지 음료를 벌컥 삼키고, 다큐멘터리 이튿날 촬영이 이어졌다. 오전까지 제법 세차게 내린 비가 그치고 쌀쌀해진 날씨는 좋았다. 저녁까지 이어진 촬영도  문제없이 마쳤다. 오랜만에  경복궁 앞에서 원래는 커피를 마시고 책을 보다 들어가거나, 아니면 조금 걸으려고 했다. 그러나 역시 아주 오랜만에 만난 이와 이야기를 나누고, 알코올이 들어간 음료를 한잔하고, 걸었다. 목도리를 질끈 감고 드러난 얼굴 피부에만 내려앉은 바람이 어제나 그제와는 실감할 만큼 달랐다. 택시에 타니 붉게 물든 얼굴이 온기에 맞닿은 감각이 제법 느껴졌다.

12월에 하고자 했던 ‘정리들은 아쉽게도 시작도 하지 못하였다. 여느 때처럼 하루하루 빠듯하게 일을 한다. 만나는 사람들이 다들 배려하는 마음을 지닌 분들이라 다행이다. 욕심부린 결과를 위하여  일정에 조금씩 동그라미를 치고 밑줄을 긋는다. 올해 마지막 달이 사라지는 기분은 반대로 크게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

요즘 새삼스럽게 다잡은 마음은, 가능한  화를 내지 않는 것이다. 어떤 사람, 상황, 때로는 자신을 바라보며 악한 감정을 드러내도 결국 해소하는 것보다 불편한 생채기 같은 것이 남아버렸다. 머리에는  정리되지 않은 자국이 불쑥불쑥 튀어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호흡으로 가자고  홀로 생각을 다잡는다.

오늘 만난  명의 인터뷰이가 내년을 이야기하며, 버티는 해가 되길 바란다고 하였다. 버티는 . 휩쓸리거나 시샘하거나, 비교하거나 불안해하거나, 얼마나 많은 감정과 사람이 조금씩 언젠가 가장 처음의 감정을 갈아먹었는지 생각해보았다.  다리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행위에 돌연 감흥이 일었다. 버티는,  축축한 땅을 밟는 기쁨에 관하여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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