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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ng Sukwoo Dec 24. 2019

잔향

2019년 12월 4일

11 30, 토요일에서 12 1, 일요일로 넘어갈 때의 기억은 대체로 선명하다. 월요일부터 화요일이 대체 어떻게 지났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월요일에는 평소답지 않게 조금 일찍 집에 갔다. 밥을 먹고,  번도 깨지 않고  잤다. 밤에는 동네를 걸었다. 정확히는 길음동부터 미아 현대백화점까지 걷다가 돌아왔다. 과거 언젠가 갔던 코스 그대로 걷다가, 뉴타운답지 않게 남은 불법과 합법 사이를 오가는 동네 주점에서 갑자기 나온 여성의 호객 행위에 그야말로 깜짝 놀라기도 했다(최근 놀란 일이 별로 없는데, 생각 없이 걷다가 진심으로 심장이 벌렁거릴 만큼 놀랐다). 동네 뒤편은 크게 변한 것이 없다. 길음역 7 출구  동네 초입에 마지막으로 남은 오래된 가게들만이 '랜드마크' 건설이라는 명목 아래 사라짐을 강요받는다. 커다란 현수막  '주민 일동' 대체 누구일까, 생각하고  씁쓸하였다.

2019 12월이다. 작년에 시작한    가지는 지금도 이어진다. 그중 일부는 올해  중요한 작업이 되었다. 초여름 즈음 시작한  하나는 계약상 12월이 마지막이다.  일은 내년에도 이어질까? 사회초년생 시절을 빼면 지금까지 회사에 다니지 않았다.  욕심 없이 살았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미련했다는 의미와 어느 정도 맞닿아 있을 것이다. 내년을 아무래도 요즘 부쩍 생각하는데, 작년과 올해보다   변화의 나날이 되지 않을까, 종종 고민한다.

오늘  거의 마지막 사전 인터뷰를 이른 저녁 무렵 마치고, 한남동 꼼데가르송 COMME des GARÇONS 매장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완벽하게 오랜만이었다. 매장은 수년에 걸쳐 조금씩 변했다. 지금은 꼼데가르송이라기보다는 도버스트리트마켓 Dover Street Market 일부를 떼어 놓은 기분도 든다. 1층으로 옮긴 나이키 Nike 매장에서 스웨트팬츠  벌을 샀다. 평소라면 사지 않을 색과 패턴으로, 작업실로 돌아가면 몰아칠 남은 일의 폭탄 사이에 잠시 소비하며   틈을 주었다( 변명한다). 여기서  와인색 바지를 지금 입고 있는데, 얼마  주문하여  입는 남색 MA-1 재킷과  어울린다. 차려입었다기에는 편안한 복장이지만, 이번 주가 끝날 즈음 친구네 바에 가서 혼자 위스키를 홀짝이고 싶어졌다.

친구들, 지인들과 이야기 나누다 보면 연애나 자존감 같은 단어가 화두에 오르고는 한다. 외롭다는 감정을 느낀 지는  오래되었다. 친구들은 너무 일을 많이 해서 그렇다고 얘기한다. 글쎄, 스스로 그리 느끼지는 않는다. 다만 어떤 기회들이 왔을 , 꾸준히 이어지기 쉽지는 않았다. 그것이 감정이든, 상황이든, 엇갈린 무엇이든 말이다. 전자책이 종이책을 그저 보완하는 것처럼, 삶이란 개인의 사회적 성취와는 다른 위안과 충실함과 안락한 감정이 있어야 한다.  알고 있다. 그러나 어떤 부분은, 적어도   정도 결여되어 있다는  또한 안다. 자연스럽게, 자연스럽게 라고 말할  있는 나이가 서서히 지나는지도 모른다. 남들이 아는 나와 내가 아는 나의 틈이 종종  벌어진다. 충만한 기운을 느낀 야밤의 소중한 술자리도, 어느샌가  효력이 사그라든다. 바람 부는 거리에 놓여 있는 촛불처럼, 아주 서서히, 웬만해서는 느끼지 못할 정도로.

저녁에 사무실에 와서 저녁을 먹으며 영화 <바닐라 스카이> 보았다.   누가 주인공에게 물었다. 언제 행복을 느끼느냐고. 자문해보기로 했다. 소소한 것부터 조금 커다란 것까지, 행복한 기분을 느낄 때는 물론 제법 있다. 하지만  길게 머무는 잔향 같은 마음이란 사라진  같기도 하였다. 낮의 사람들과 밤의 사람들 사이, 어디에 있을까...?

오전이 되고 다시 사람들이 일을 시작하는 시각이 오면,  역시 아침 회의를 마치고, 오후 회의를 준비하고,  하루를 서서히 마무리할 것이다. 다음 주에  책의 마지막 교정 교열 작업도 남아 있다. 목요일과 금요일에는 준비 중인 다큐멘터리 영상의 2 대본 작업을 검토하고,   원고 하나를  마쳐야 한다. 토요일은 여느 때처럼 팟캐스트에 참여할 것이고, 그리고 서점 '산책 BOOKWALK' 가려고 한다. 새로 놓을 책은 지난주에 이미 잔뜩 쟁여두었다. 올해 가장 아쉬운   하나는 서점에 생각만큼 신경 쓰지 못했다는 점이다. 글을 쓰고, 프로듀서로 작업하고, 컨설팅하고, 영상 콘텐츠의 디렉터로 일하며, 패션 팟캐스트를 운영하고, 작은  모바일 잡지가 있다. 종종 카메라를 메고 거리에 나서며, 가끔 외국 출장도 가고, 버는 돈이 무지막지하지는 않아도 먹고 사는  하등 지장은 없다. 주변에는 나름대로 자극받을 정도로 훌륭하게 자기 일을 해내는 친구들이 있다. 그런데, 11 하순 어느 새벽에 문득 생각했다. 우리 나이의 사람들은 잘살고 있나. 인스타그램의 삶이 아니라, 진짜로 잘살고있나.

가끔 느끼는 기분을 벽돌 사이 시멘트 바르듯이 채워나갔으면, 상상한다. 모두가 정말로 열심히 사는 동안, 정말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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