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9월 5일
아버지의 입원은 (이전 글에도 쓴 것 같지만) 조직 검사 때문이었다.
간략히 설명하면, 췌장에 아주 가느다란 바늘을 넣어 조직을 떼어내고 분석하는 일이다. 조직 검사를 해야 정확한 암의 치료 방법을 특정하고 확진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사전에 혈액 검사를 한 번 더 했다. 조직 검사 후에는 암의 전이 상태를 확인하는 PET-CT 방사선 검사를 했다. 혈액, 조직 검사, PET-CT는 각각 일, 월, 수요일에 했고, 화요일만 검사가 없었다. 검사 사이 금식 기간이 길었다. 수요일 정오를 약간 넘은 시각, 쨍한 대낮에 퇴원 수납을 마치고는 원래 병원에서 점심을 먹으려고 했다. 긴 금식을 여러 번 거친 아버지에게는 오랜만에 제대로 된 식사였다. 평일 낮, 병원 본관 푸드 코트는 웬만한 대기업이나 학교 점심시간에 버금갈 정도로 사람이 넘쳤다. 그 인파와 소음에 지쳐버릴 것 같아서 택시를 타고 동네에 가기로 했다.
밥을 먹으면서 자연스럽게 녹음기를 켰다.
어떤 이야기들을 기록해 두자, 아니 기록하자, 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8월 초순, 누나가 가족 단톡방에 어느 블로그 글을 하나 공유했다. 아버지의 20대 시절, 설악산 암벽 등반 루트를 산악회 동료들과 함께 개척한 기록이었다. 입원하던 일요일에서 고작 나흘이 지났을 뿐인데 눈에 띄게 수척해진 얼굴에 깎지 못한 수염이 덥수룩한 아버지의 모르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엄마조차 확실히 아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도 사람이 밟지 않아 에델바이스가 펼쳐진 설악의 암릉. 넝쿨이 수북하고 사람 발자국 없이 곰만 다닌 흔적만 있어 '곰길'로 불렀다는 누구도 뚫지 않은 산길 (사실 길도 아니고). 곰을 밀렵해 잡혀갔다는 소문이 돈 동네 양봉업자 아저씨. 등반 동료끼리 작은 촛대바위라고 부른 — 산을 타는 사람들이 아는 그 바위가 아니라 — 바위 주변을 밤에 몰래 올랐다가, 근처 군부대 군인이 내려오지 않으면 쏜다고 하여 기록으로 남지 않았다는 길. 장군 바위와 울산 바위 안쪽의 첫 코스들.
1973년, 52년 전, 홀로 산 타는 걸 즐긴 스물넷 젊은 청년의 기억들. 그리고 내 앞에는 52년의 세월을 더 담아낸 아빠의 얼굴이 있다. 며칠 바싹 마르고 연약해진 손과 팔뚝이 있다. 시끄럽고 넓은 동네 밥집 4인석 옆에는 홀로 밥을 드시는 할머니가 계셨다. 아마도 우리 이야기를 모두 들었을 것이다.
한국과 외국의 온갖 유명인과 창작자를 인터뷰해보았으나, 오늘의 이야기는 사실 중구난방이었다.
에델바이스와 곰길에서 밀렵꾼이 된 양봉업자의 구속 소문까지 흐르는 동안, 갈비탕과 육회 비빔밥과 아버지가 시킨 한우 된장찌개가 나왔다. 엄마는 항상 그렇듯이 갈비가 많다고 했다. 살을 발라 아버지 공깃밥 위에 몇 점 얹었다. 몇 달 전이라면 한 그릇 뚝딱 비웠을 아빠는 고작 고기 몇 조각을 넘기기 힘들어한다. 잔소리는 대체로 이 시점에 시작된다. 고기를 잘 먹어야 한다, 항암을 하려면 체력이 있어야 한다, 배가 아프더라도 먹는 게 치료라고 한다, 엄마도 포기하지 말고, 먹여야 한다. 몇 주간 반복하는 도돌이표.
문득 할머니 생각이 났다.
거의 한 달 전, 일요일 가족 식사 때, 아빠는 자신의 이야기를 즐겨 하는 성향이 아님에도 그날은 확실히 신이 났던 것 같다. 글과 사진에 취미가 있다는 걸 그날 처음 알았고, 몇 주 후 어느 평범한 날, 아버지는 온갖 사진과 함께 몇 개의 잃어버리지 않은 — 많은 어른이 그렇듯이 스마트폰을 바꾸면서 쉰 개 가까운 메모가 날아갔다고 한다 — 글을 가족 단톡방에 보내주었다.
아빠는 글을 쓸 때 이상하게 슬픈 내용을 쓰게 된다고 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지금 아버지가 느끼는 슬픔의 심상이 무엇일지 궁금했으나 한사코 얘기해주지 않았다. 받은 글을 보니 금세 알 수 있었다. 할머니였다. 아빠의 엄마.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도, 또 살아계실 때도 생생히 느꼈지만, 아빠만큼 매일 할머니 집에 가서 보살펴드리는 자식, 어른, 남자를 평생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마치 조선시대 미담 속에 나오는 효자 같은 사람. 그러나 아버지는 자신의 엄마에게 회한과 후회의 감정을 품었다. 불효를 했다고 생각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화장을 마쳤을 때, 뽀얀 가루 사이 투박하고 커다란 은색 금속이 하나 남았다. 그나마 조금 건강하셨을 때 수술한 무릎 안 보조 장치였다. 아마도 그날 아버지는 마음속에 어떤 것이 무너졌던 것 같다. 평소 무릎이 아프다고 그렇게 말씀하셨다는데, 저렇게 커다란 게 들어가 있는 줄 몰랐다고, 스치듯이 장례식 어느 때인가 얘기했던 기억이 났다. 정형외과에 부모님을 모시고 오는 자식들을 보며 엄마에게 아쉬운 소리를 했었다고 했다. 한 번도 그러지 못했다고.
나는 그 얘기를 담담하게 했다.
술과 담배가 암의 큰 원인이라지만, 스트레스가 사실은 가장 크데. 이런 일들이 아빠 마음 속에 응어리처럼 맺혀 있는 게 아닌가 싶어. 그래도 나는 할머니의 좋은 점들, 건강하셨을 때, 또 우리를 아껴주시던 모습들만 기억하고 있어. 아빠도 부정적인 쪽으로 생각하고 후회하지 말고, 할머니의 좋은 모습들을 더 남기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 자신이 암 판정을 받았을 때도 아버지 표정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굳이 이번 한 달간 약간 흔들렸던 모습이란 항암 치료 과정의 고된 현실을 차가울 정도로 냉정하게 설명한 동네 의사 선생님과의 대화였다. 아버지가 태어난 해, 할아버지는 한국 전쟁의 장교로 전사했고 우리는 지금까지도 유해를 찾지 못했다. 6·25 사흘 후 벌어진 한강인도교 폭파 때 돌아가신 게 아닌지 친척 어르신들이 추정할 뿐이다. 그 험난했을 시대에 할머니는 자신의 아들을 평생 홀로 키워냈다. 할머니 입관식 이후 아버지가 우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수요일 오후는 조금 길었다.
밥을 먹고, 주섬주섬 온갖 짐을 챙겨 근처 카페에 갔다. '앱'으로 할 수 있는 보험 관련 회원 가입을 아빠 스마트폰으로 하고, 시험 삼아 제출해 보고, 세브란스병원 앱의 사용 방법을 알려주고, 또 이번 주 검사 결과를 확인하러 가는 화요일에는 어떤 검사를 더 하는지 확인하고 (참 무수하다), 엄마스마트폰에 동일한 작업을 했다. 이런 상황에도 어른들에게 스마트폰 사용법을 알려드리는 것은 극도의 인내심이 필요하다. 나는 교육자의 삶을 살지는 못했을 것이다.
상태를 말하자면, 아직은 통증을 다스리는 정도의 일만 벌어지기 때문에 이를테면 아버지는 진통제로 버티는 나날이다. 그 사이 단백질을 좀 더 섭취해서 서서히 빠지는 체중이 조금이라도 멈추거나, 돌아가는 쪽으로 갔으면 하지만, 아버지의 몸이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은 아니다 (대신 귀찮게 노력하는 거다).
지루하고 긴 마지막 검사를 할 때, 연구원이라는 사람이 들어왔다고 했다.
임상 실험에 동의한다면 혈액을 채취한다고. 아버지는 '또 다른 나 같은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이라고 생각하며 동의했다고 했다. 만약 내가 어느 정도 따뜻한 마음을 지니고 산다면, 그것은 나의 성정이라기보단 어느 정도 물려받은 형태가 없는 무언가일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Seoul, S. Korea
Mon, September 01 — Wed, September 03, 2025
이야기 dialog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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