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

2009/04/30 17:47

by Hong Sukwoo


몇 달 전 친구가 알려준 팟캐스트 Podcast라는 엄청난 기술을 통해, 지난 라디오 방송들을 들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친구의 추천은 '유희열의 라디오 천국'.

라디오로 말하자면 어릴 때는 정말 자주 들었고 한창 티브이 TV를 볼 나이였던 내게 제2의 티브이와 다름없었다. 중학생 때만 해도 추석이나 설날 연휴 때 귀성 차량을 위해 온종일 음악만 틀어주는 방송이 많았다(요즘도 그런지는 모르겠다). 집에서 누나와 공테이프 몇 개에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면 녹음하고, 타이밍을 잘 맞춰서 조심스레 정지 버튼을 누르고, 몇 곡은 테이프의 끝자락에 걸쳐져 놓치기 마련이고, 그 노래들의 대부분은 대중가요였다.

요새처럼 인터넷 한 번만 치면 가사가 나오는 세상도 아니었으니 신나게 녹음한 테이프를 재생기에 넣고 틀었다 감기를 반복하면서 공책에 가사를 받아적기도 했다(항상 애매한 단어들이 많이 있었다).

충북 보은에 살던 국민학생(초등학생) 때에는 북한에서 쏘는 것으로 추정되는 남한 비방 방송 - 당시 김영삼 대통령을 그렇게 씹었다 - 을 에이엠 AM으로 들은 적이 있다. 외할머니 것으로, 손바닥만 한 크기의 검은색에 작은 건전지 두 개가 들어가는 산요 Sanyo 미니 라디오를 그렇게나 좋아했는데. CD 플레이어를 사게 되고, MD 플레이어를 사게 되고, MP3를 알게 되고, 그러다 MP3 플레이어를 사게 되니까 라디오는 저 멀리 바이 바이, 했던 게 라디오에 관한 나의 진화과정이었다. 가장 마지막에 샀던 라디오들은 잡지의 부록으로 주는 싸구려들이었는데 지금은 버렸는지도 모른다.

유희열과 라디오에 대한 기억은 신해철까지 거슬러간다. 김현철과 이소라가 11시를 점령하고 있을 무렵, 아직 이문세가 '별이 빛나는 밤에'를 진행하다 하차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무렵, 신해철이 '음악도시'를 진행하며 마왕이 아니라 시장님이라 불렸던 시절…. 유희열은 그 수줍은 모습과는 다른, 그렇게 청산유수는 아니지만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을 지닌 말발로 음악도시 부시장 노릇을 톡톡히 했다.

당시 독자들의 사연은 정말 발군이었기 때문에, 신해철 본인도 소개하면서 깔깔거리며 웃으며 이분들 모두 콩트 작가를 해도 되겠다던 기억도 난다. 그러던 신해철이 시장직을 사임하고, 초대 손님으로 자주 등장하던 넥스트 N.EX.T. 멤버들이 아닌 부시장 유희열이 바통을 이어받고 조금 달라진 음악도시를 들었던 그맘때가 내가 유희열과 라디오를 연결한 가장 첫 기억이 아닐까. 무가지와 길거리에서 봤던 '나이트 인 서울 A Night in Seoul'의 콘서트 포스터가 생각나면서.

최근 아이팟과 컴퓨터의 아이튠스로 듣고 있긴 하지만, 덕분에 저작권 문제로 잘린 노래들이 아쉽긴 해도 생각보다 그 곡들이 거슬리지 않는 유희열의 라디오천국이다. 가끔 길을 걷거나 버스에서 창밖을 보면 혼자 실실 쪼개며 걷는 사람들이 이상해 보일 때가 있는데, 단순히 음악을 듣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대화하는 것을 듣고 있으니까 공감할 때는 실실 웃게 되고, 좋아하는 음악가가 나오면 또 이런 얘기가 있었구나 하면서 남들이 나를 보면 그러겠군 싶다. 그리고 컴퓨터를 맥에서 피시 PC로 바꾸고 싶어지는데, 왠지 라디오천국 홈페이지에 참여해보고 싶기 때문이다.

구십 년대와 지금의 라디오는 참 다르다. 당시 라디오는 텔레비전과는 또 다른 문물의 새로운 창구였다. 이현도는 선진 힙합을 소개했고 유희열을 비롯한 다른 음악에 정통한 음악가들과 디제이 DJ들은 모두 각자의 음악 외에 그들이 가장 먼저 접했던 음악을 소개했다. 하지만 지금은 인터넷이 그 모든 정보 창구를 움켜쥐고 있다. 조금만 찾으면 최소한 겉보기에는 선지자들의 관록만큼 많은 정보를 가진 사람들 찾기가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래도 라디오가 즐거운 것은, 라디오가 정보의 제공만으로 끝나지 않고 디제이들의 생각, 이야기, 삶 같은 것을 다른 청취자들과 함께 느낄 수 있기 때문 아닐까. 티브이는 평소 즐겨보지도 않지만, 아무래도 일방적이고 화려한 분야라서 말이지.

언젠 가의 꿈, 지금도 가끔 생각하는 꿈은 새벽 방송의 디제이를 맡는 것인데, 사실 반 이상 포기했다. 라디오 디제이가 되려면 지금 생각에는 딱 두 가지가 유효한 방법인데, 유명한 연예인이나 성실한 아나운서가 되는 걸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실시간으로 들을 수 있는 라디오는 지금 어디에 처박혀 있을지 모르겠지만 지난 방송들을 계속 듣고 있으니 예전처럼, 다시 어느 야심한 시각만 되면 규칙적으로 라디오를 켜고, 조금은 고요하고 바람만이 잔잔히 부는 창문 열어놓은 밤을 전파 속의 목소리들과 그 목소리들을 듣고 있는 누구인지 모를 많은 이와 공유하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사실은 아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