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2/13 22:27
내일은 '밸런타인데이라고 하는 날'인 것 같다.
뚫린 벽에 열심히 페인트며 시멘트며 바르고 있는데, 일감이 점점 줄어드는 것 같은데 그대로인 것처럼 보이고. 불안이 쌓일 대로 쌓인, 피곤을 넘어 밤샌 다음 날 오후와 비슷하기도 하고. 결국, 다시 작업실에 가진 못했고.
지금보다 훨씬 어릴 때 나는 웬만한 선배격인 사람들이 눈에 차지 않았는데(객관적이거나 주관적인 기준 필요 없이, 지식도 무엇도 별로 없이, 그저 개인적인 감정과 사고로 말이다), 그것은 뭐라고 할까. '티셔츠'만 입을 무렵 나이를 먹고 '셔츠'를 입는 것이 '변절자'라는 말과 동의어처럼 느껴지던 시절의 생각이었다. 나이를 먹으면서 좀 더 유연해진 부분은, 예전보다는 남의 말을 듣는다는 것이다. 이제 티셔츠보다는 셔츠를 좋아하게 되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티셔츠는 (적어도 내게는) 혁명 같은 것이 아니었고 셔츠 또한 보수의 지름길 같은 것이 아니었다.
좋아하는 것 = 패션 관련한 것들 = 지금의 직업에 관련한다는 것에서, 일부분 행운이라고 느끼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물론 있다. 단순하다. 스스로 행복한가, 아닌가, 물을 때. 괜히 머리 아프고 소주 한 잔 생각나는 그런 때. 별로 생각하고 말했다거나 멋 부린 것도 아닌데, 나는 사람들이 생각한 것보다 더 직선적인데, 어떤 이들은 그것을 비비 꼬았다고 보거나 적어도, 그 이면에 무언가 의도가 있지 않은가, 멋져 보이려는 것 아닌가, 생각하는 것을 목격할 때. (다혈질이니까) '아니 이 잡것들은….' 하다가, 그래도 불만 많은 이들은 쏟아낼 뭔가라도 있구나, 싶어서 반쯤은 답답하고 반쯤은 가라앉는다.
블로그와 커뮤니티가 한창 붐을 이룰 때만 해도 이것은 참 수평적인 세상을 위한 편리한 도구 - 말 그대로 받아들이든, 살짝 비꼰 의미로 받아들이든 - 라고 생각했는데, 소셜네트워크서비스 SNS의 세상은 더 장난 아니게 됐다. '자기만의' 공간이라서 싸지르고, 분노하고, 대상이 있고 없고, 남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것들과 안티 anti의 안티의 안티가 자기 딴에는 아니라고 생각하는지 몰라도 '쿨 cool'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게 됐다. 생긴 지 얼마나 됐다고, 현재진행형이겠지마는. '소통을 장려하는 사람들을 까는 사람들을 까는' 일정 부분 냉소적이고 일정 부분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들이 특히, 여러모로 왜 저런가 싶다(혹자에게는 내가 그럴지도 모르겠다만).
어린 시절 이후, 마음이 맞지 않더라도 어떤 사람들의 존재 안에서 그래도 무언가 좋은 것을 발견하려고 노력했다면, 그것은 '내가 아는 것이 전부(혹은 진리에 가까운 것)를 대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째서인지 깨닫고 난 후였다. 자세히 기억나지 않지만, 한두 해 세상을 살면서 적어도 뭐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혹은 진짜라고 생각했는데 가짜에 가까운 것 아닌지, 어디에 분노하고 있었는지 기뻐하고 있었는지 같은 것들을 좀 더 깊숙하게 생각한 다음이었던 것 같다. 나도, 당시 만나던 친구들도 제법 고정관념(혹은 고집)들을 갖고 있었다. 어떤 것들은 자연스럽게 사라지곤 했다. 어떤 친구들도, 그 고정관념과 함께 사라지곤 했다(그들로서는 내가 사라졌는지도 모르겠다).
불만 가득한 투정만 있는 대안 따위, 추호도 만들고 싶지 않다. 그게 멋져서도 아니고, 멋지지 않아서도 아니고, 그냥 그렇게 느끼기 때문이라는 걸 왜 - 더 어리지만, 사실은 더 늙고 꽉 막힌 사람들에게 설득해야 하는 세상인지 모르겠다. 징징거림이 난무하는 와중의 종종 진지함이 멋져 보이는가. 대화하지 않고 관찰하는 것만으로 무엇을 얼마나 받아들이려는가. 분노하고, 무언가 하고, 전 세대의 업보를 밟고, 그러는 걸 보면 결국 내가 2000년대 초반부터 생각한 것과는 별반 다르지 않은데, 어쩌면 나도 이제 별로 신선한 입장은 아닌가 싶다.
재밌는 걸 하자. 생각도 좀 하자. 여유도 좀 갖자. 다른 걸 비겁하다고 생각하진 말자. 그리고 좀 행복하자. 뭐 이 정도만 지키면서 살면 참 좋겠다. 그리고 할 말 있으면, 당당하자. 아직 뛰어들지도 않고는 이천구백팔십칠 개의 퍼즐 조각을 이미 다 맞췄다고 생각하는 이들을 보면 내가 부끄럽다, 괜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