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에 남은 흔적들

2009/03/13 05:40

by Hong Sukwoo


일찍 잠이 들었다. 심지어 문자를 주고받고 있었는데, 게다가 무언가 지금의 이 불안한 상황과 어설픈 미래 얘기 따위를 하고 있었는데도 나는 잠을 못 이기고 항복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깬 것은 시간을 가늠할 수 없는 새벽이었고 엄마는 나를 보며 살그머니 방을 나가신다. 시계를 보니 2시가 넘었다. 난장판인 내 방을 보다못해 치우러 들어오셨다기에는 늦은 시간이지만, 모전자전인가, 엄마 역시 새벽 1시에 잠이 깼다면서 결국 3시가 넘어서는 텔레비전을 보다 잠이 드셨으니. 아, 나도 2시를 못 넘기고 잠이 들 때가 있었는데(중학생이 되기 전이던가).

조금 전 메일함에서 2005년에 남은 흔적들을 한 번 찾아봤다. 약 2주에 걸쳐 주고받은 길지도 짧지도 않은 메일들. 관계라고 할 수 없던 상태였는지도 모르지만 어떤 관계성이 싹트고 있을 무렵이었는데, 말 그대로 '뚝' 하고 끊긴 것이었다. 당시의 나는 이성 문제에 있어 즐거우면서도 혼란스러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기 때문에 그 끊김은 그대로 잊혔다. 그러다 작년 언제인가 다시 연이 닿았다. 덕분에 주고받았던 메일을 한 번 찾아 읽어봤다. 당시 나를 내가 보는 것과 당시 내가 했던 얘기를 통해 다른 이의 글에서 보는 나는 미묘한 차이를 주면서 또 생각하게 한다. 마르지엘라의 넘버 매거진, 이제 막 도착할 시기였던 디올 옴므 Dior Homme 청바지, 츠비 Tsubi, 랑방 Lanvin처럼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디자이너들, 그리고 하루의 짧은 동선 같은 이야기들이 그 며칠의 메일 속에 담겨 있다. 졸려서 눈이 감기는 시점인 지금, 몇 개의 톱니바퀴로 다시 돌아간 길지도 짧지도 않았던 시간의 이야기가 이 글을 쓰게 만든 원동력이다.

세상은 얼마나 '이어지다'와 '단절되다'의 연속으로 돌아가고 있을까? 이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은 생각보다 사소한 계기로 이어지기도 한다. 단절되지 않을 것 같던 관계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단절되곤 한다. 내가 살면서 지나간 곳에 있던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지금의 현재진행형인 것들과 과거의 진행형이었던 것들을 구분할 수 있게 된 것처럼.

고등학생 시절, 첫사랑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에게 뜬금없는 문자를 받았다. 다시 연락이 닿게 된 이유는 역시나 싸이월드는였는데, 한 번이라도 만나 볼 생각은 들지 않지만 1년에 몇 차례인가 그저 연락을 주고받게 될 것 같다. 반은 예의로 반갑다고 했더니 먼저 연락을 주었으면 자신이 더 반가웠을 것이라는 그녀. 보석세공사를 준비한다고 했다. 워낙 어릴 때의 만남이었기 때문에 지금 생각하면 철부지 이상도 이하도 아닌 낯부끄러운 기억들도 많은데 지금의 서로는 서로가 참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미 10년 전 얘기가 되고 있으니까. 심지어 이런 가끔의 연락에서, 그녀도 나도 꼬박 존댓말을 하고 있을 정도. 사실 서로의 삶에 대해서는 5분 이상 대화를 진행할 수 없을 정도로 서로의 신상에 대해 아는 것은 없다(내가 생각하는 한). 그녀는 내 범주의 일을 모르고 나도 그녀의 전반적인 삶에 대해 모른다. 되려 그래서 나쁘지 않은 것도 있다. 내가 속속들이 말해주고 싶어도 그걸 받아들일 수 있는지 확신할 수 없는 사람들이 생기기 마련이니까, 차라리 드문 연락이 반가운 과거의 사람이 한 명 있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이건, 물론 시간이 많이 지났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긴 하다.

딱히 무얼 하지 않은 새벽의 시간에 나는 이제 막 40살을 바라보는, 좋아하는 음악가의 홈페이지에서 그가 남긴 기록들을 보았다. 어쩜, 그는 40살을 앞두고서도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거지. 사실 나이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란 것을, 보통의 사회적인 관계들만 아니라면 나이를 떠난 소통과 나눔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 최근 몇 년 새 내게 생긴 변화인지도 모른다. 가끔은, 시간도 과거도 회한도 미련도 사랑도 애정마저도, 모두 초월한 어느 순간이 있을 것 같다고 확신하게 된다. 반갑게 들리던 빗소리를, 추위 때문에 닫은 창문을 잠시 바라본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고요한 시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없지만 그런 순간이 지금 이때인 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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