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보다 낭만적인 여유를 느끼다
피로의 누적과 손 안의 만능지도(스마트폰)를 잃고 나니 새로운 도전 욕구가 매우 많이 감소되었다. 그래서 아쉽게도 고흐마을을 포기하고 파리의 일상과 주말의 여유를 느릿느릿 느껴보고자 ‘몽마르트르 언덕’에 왔다. 호텔 앞 지하철역(Madeleine)에서 6 정거장을 지나자 바로 Abbesses 역, 몽마르트르 언덕으로 갈 수 있는 입구에 도착했다. 개선문의 악몽을 연상시키는 원형 계단을 오르다 숨이 차 잠시 쉬고 싶을 때쯤 눈앞에 서광이 비췄다. 출구로 나오니 바로 오른 켠에 세계 각국의 언어로 ‘사랑’을 표기한 사랑의 벽이 눈에 띈다. 아직 자세한 건 잘 모르지만 1870년대 파리 코뮌의 저항과 수많은 희생이 이곳에서 있었고, 그들을 향한 연민과 속죄와 감사의 마음을 이렇게 ‘사랑의 벽’으로 표현한 것은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니 이곳이 로맨틱한 낭만보다는 아픔과 치유의 공간으로 느껴졌다.
오늘 유난히 바람이 선선하여 근처 벤치에 앉아 있고 싶었지만 아침 공복의 허기를 달래기 위해 근처 카페를 찾아 나섰다. 오늘은 크루아상과 커피가 당긴다. 그렇게 길을 걷던 중 한 무리의 줄이 늘어선 매장이 보였다. [Copains]라고 쓰여 있었고 우리나라 표현으로 하자만 근처 매장과는 달리 ‘hip’하고 ‘인스타그래머블’했다. 나도 어느새 줄을 서서 예쁘게 전시되어 있는 빵을 골랐다. 내가 찾던 크루아상은 없었지만 가장 덜 달아 보이는 빵 2개와 라지 사이즈의 카페라테를 주문했다. 그런데 이 매장은 테이블이 없는 테이크아웃 전문 매장이었다. 양손에 빵과 커피를 들고 아까 들렀던 사랑의 벽을 다시 찾았다. 많은 여행자들이 아직 줄을 서서 사진을 찍고 있었고, 그 중심인 핫스폿을 지나 조금 더 안 쪽으로 들어가면 우거진 나무와 그 사이에 벤치들이 있는 공간이 나온다. 이곳에서 간편한 간식을 즐기기에 충분하였고, 이미 적지 않은 파리시민들이 각자 준비해 온 간식과 식사를 여유롭게 즐기고 있었다.
그늘이 잘 드리워진 벤치에 자리를 잡고 Copains에서 사 온 빵과 커피를 마신다. 잠시지만 파리지앵이 된 것 같다. 정각이 되니 인근 성당에서 종소리가 울린다. 이렇게 여유롭고 홀리(holy)한 아침 식사라니, 이것이 진정한 파리라는 생각이 든다.
옆에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사랑의 벽에서 자국어로 된 ‘사랑해’를 찾아 사진을 찍기 위해 장사진이다. 하지만 그곳에서 10m만 더 안쪽으로 들어왔을 뿐인데 전혀 다른 분위기에 전혀 다른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조금만 더’의 힘이 위대함을 느꼈고, 계획과 달리 이곳에 ‘조금만 더’ 머물다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