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망생 Aug 04. 2020

범인(犯人)은 아니었고, 범인(凡人)은 맞는 듯해.

범인(犯人) : 범죄를 저지른 사람, 범인(凡人) : 평범한 사람.

“내가 범인이면 어떡하지?”


어렸을 적, 가장 많이 하던 생각이었다. 내 주위에 일어나는 일들 모두 내가 일으킨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에 빠졌다.


유치원 때, 같은 반 남자애가 책상 사이에서 놀다가 못에 머리가 찢겨 응급실에 실려갔다는 소리를 들었다. 머릿속에 비상 신호가 울렸다. ‘내가 그 책상을 옮겼던 건 아닐까,  내가 실수로 그 애를 밀쳤던 건 아닐까.’ 선생님이 나 불러서 앰뷸런스 같이 타고 가자고 할까 봐 어찌나 심장이 쫄 리던지. 하루 종일 그 생각뿐이었다. ‘나 혼자서라도 병원에 가봐야 하나’ 며칠을 고민했는데, 그 아이가 이마에 반창고를 붙인 채 유치원으로 돌아와 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나는 손을 흔드는 와중에도 ‘나중에 나에게 잘못을 묻는 건 아닐까.’ 생각하며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정말이지,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장소와 시간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같은 피아노 학원에 다녔던 언니가 있었다. 어느 날 발을 절뚝거리며 들어오더니, 다음 날 그 발에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다. 또다시 스위치가 켜졌다. ‘사람들이 나를 의심하면 어떡하지. 내가 질투해서 그랬다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그 언니는 집에서 다쳤는데, 괜히 나 혼자 막장 드라마 한 편 썼다.


자주 가던 분식집에 전에는 보이지 않던 아저씨가 슬러쉬를 따르고 계셨다. ‘아저씨가 납치범은 아닐까’하는 의심이 들었다. 근데 그냥 납치범은 아니고, 분명 사연이 있는 납치범일 것이라 생각했다. ‘만약 나를 납치해가면, 말로 잘 구슬려서 풀려나야겠다’라고 생각하며 대사 몇 줄을 멋지게 적어보았다. 아저씨가 건네주는 슬러쉬를 받으며, ‘여기에 독을 탄 건 아니겠지?’ 생각하며 그냥 한 번 마셔보기로 했다. 먹어보니 탄산이 다 빠져 있길래, ‘에잇 별로네.’하며 또 마셨다. 그 분식집이 아직까지도 건재한 걸 보면, 아마 납치범은 아니셨겠지.


한창 인터넷 소설을 즐겨 읽었을 때는 모든 주인공에 나를 대입했다. 특히나 출생의 비밀을 가진 여주인공의 이야기가 내 마음을 울렸다. 누구나 한 번쯤은 들었을 “너 다리 밑에서 주워온 거야.”라는 말을 나도 어김없이 들었고, 그 말을 어느 정도는 믿었다.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 둘을 옆에 낀 부자가 찾아와  “내 친 딸을 데려가겠소.”라고 하는 상황을 상상했다. 친부모와 키워준 부모, 누구를 선택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했다. 부잣집에서 올라갈 때는 100층까지 10초 만에 가는 초고속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올 때는 1층까지 한방에 가는 미끄럼틀을 타는 상상을 했다. 생각만 해도 짜릿하니, 나는 결국 부자 부모를 따라가기로 했다.  엄마, 아빠는 자주 보러 와야지 다짐하면서.


세상의 신비로움에 환상으로 가득했던 시절이 있었다. 내 머리에 떨어지는 물방울이 나를 천재로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닐까. 자고 일어났더니 영어가 입에서 막 튀어나오는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까. 모르는 사람에게서 온 편지가 나를 다른 세계로 보내주지는 않을까.


싱크대가 움푹 들어가 있는 모양과 계단의 모양, 오른손에 두껍게 잡히던 책이 어느새 얇아져 있는 것이 신기했고. 연필은 왜 깎으면 줄어들고 형광펜은 왜 닳아 없어지는지 궁금했다. 지금은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들에 그때는 꽤나 진지했었다. 알 수 없는 것들에 감탄하고, 나를 지키기 위해 상상했다. 나는 진심으로 나의 삶이 소중했다.


의자 이름이 왜 의자일까. 책상은 왜 책상일까. 책상이랑 의자가 왜 같이 있는 걸까. 어른들께 물으니 ‘왜 그런 걸 묻느냐’고 했다. 그래서 난 ‘아, 이런 건 물어볼 필요가 없구나’ 하고 말았다. 차라리 언어의 사회성 때문에 그런 거라고 말해줬으면, 중학교 공부 예습이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 그렇게 부르기로 사람들 간에 약속했기 때문이라는데, 난 그런 약속을 한 기억이 없다고 하고 싶었지만  ‘왜 그런 걸 묻느냐’고 할 것 같아 그냥 그렇게 하기로 도장 찍었다.


나도 모르게 붙여진 내 이름도 똑같다. 나는 5살이 되기 전까지도 이름 석자를 못써 받아쓰기 공책 한 권을 내 이름으로 채웠다. 그때 처음으로 내 이름을 알았다. 처음 본 유치원 선생님이 ‘5살이 이름도 몰라요?’하며 어이없다는 듯 웃으시더라. 내가 짓지도 않았고, 별로 안 궁금하지도 않았으니까, 모를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이름은 사실 남을 위한 것이다. 남이 알고, 보고, 평가하기 위한 것이다. 내가 내 이름을 부르면 이상한 사람이 된다. 내가 “oo이 배고파요, oo이 치킨 먹고 싶어”라고 하는 걸  남들이 듣는다면 소스라치게 놀라며 치킨집이 아니라 병원에 가보라 할 것이다. 내 이름을 나를 위한 것이 아니다. 나를 생판 몰랐던 우리 엄마, 아빠가 지은 거다. 나에게는 나만을 위한 이름이 필요하다.


그런데, 막상 이름을 지을 기회가 오면, ‘아, 왜 이런 걸 해.’라며 발을 뺀다. 다급히 검색창에 ‘예쁜 이름’을 치고 지식인이 알려주는 100가지 중 하나를 고른다. 그러다 결국 ‘아, 너무 유치하다’ 싶은 마음이 들고, 다시 내 이름으로 돌아와 겨우 한 글자만 바꾼 것을 ‘내 이름’이라고 적는다. 그렇게 브런치 작가 이름을 지었고, 한동안은 이 이름으로 살아야 한다. 이렇게 성의 없는 이름이라니. 다른 웹사이트 별명이 ‘별 따러 가자’, ‘귀찮다’, ‘김치찌개 일 인분’인 이유가 있다. 아, 배민 별명은 좀 낫다. ‘아직 닉네임이 없어요’


아무튼, 입으로는 나만의 이름이 필요하다고 나불대면서, 스스로 별명 하나 못 짓는 사람이다. 머리로는 색다른 것을 추구하는데, 실상은 무채색의 옷만 입는다. 싫다, 싫다 하면서 난 내 이름을 시장에 팔기 위해 발품을 판다. 여기저기 찔러보고, ‘내가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인가’하고 절망한다. 그럴 때, 나는 ‘이게 다 이름 때문이다’라고 생각한다. 내가 지은 이름이 아니니까 잘 못 파는 거라고 합리화를 해본다. 껍데기 같은 이름만 보여줬을 뿐, 알맹이는 아직 안 보여 준거라고. 그래서 알맹이는 언제 보여줄 거냐고 묻는다면, 찾는 중이고 아마 오래 걸릴 것 같다는 답을 남긴다.


다음에 브런치 작가 이름을 바꿀 때, 3번 이상은 고민해보는 것을 목표로 세웠다. 목표가 아주 깜찍하지만, 내가 정말 원하는 이름을 찾아가는 첫 단계라고 생각한다. 옛날의 나는 나를 무어라 불렀을까. 세상의 중심에서 자신이 범인(犯人)이라 말하던 이는 왜 지금 스스로 범인(凡人)이 되려고 하나. 게을러서 그렇다. 상상력을 현실로 만드는 힘은 책임감이라 생각하는데, 나는 책임지는 것을 귀찮아한다. 미래가 두렵고 도전이 겁난다고 말하는데, 실은 그 상황들을 책임지는 것이 귀찮은 것이다. 나의 게으름을 반성한다. 내일은 좀 부지런히 움직여야겠다. 정신은 날로 가벼워지는데, 몸만 무거워지는 것 같다. 젠장.

















매거진의 이전글 저는 아싸가 아니라 내향적인 사람일 뿐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