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소공녀>
집은 없어도 생각과 취향은 있어.
주인공 미소의 가계부는 단순하다. 수입은 오늘 일당이 전부이고, 밥, 세금, 약, 집, 위스키, 담뱃값이 고정지출로 나간다. 플러스인 일당은 오르지가 않는데, 날이 갈수록 마이너스 값들만 커진다. 담뱃값이 4500원으로 오르고, 월세가 5만 원 오르자 하루 순수익이 마이너스가 되는 지경에 이른다. 계산기를 두드리던 미소는 고심 끝에 집을 포기하기로 한다.
집이 없는 미소는 대학 시절에 함께 밴드를 했던 옛 친구들을 찾아간다. 그들에게 계란 한 판을 건네며 며칠만 재워달라고 부탁한다. 친구들을 그 시절과 많이 달라져 있다. 좁은 방에 모여 국가가 허락한 유일한 마약인 음악을 즐겼던, 술을 퍼마시고 담배를 뻑뻑 피워가며 밤을 새웠던, 생각과 취향이 가장 찬란하게 빛났던 젊은 날을 기억하는 이는 미소밖에 없다.
현대인은 바쁘다. 보통 때는 생각이나 취향을 고려할 겨를도 없이 앞만 보고 달려야 한다. 그렇게 달리다가 너무 힘이 들면, 무의식적으로 '아, 집에 가고 싶어.'라는 말이 튀어나온다. 아픈 아이가 엄마를 부르며 울듯, 우리는 지칠 때마다 안길 수 있는 따뜻한 집을 필요로 한다. 단순히 직사각형의 모양을 가진 건물이 아니라 현생에서 나를 해방시켜주는, 힘든 마음을 위로해 주는 안식처를 말이다.
House와 Home은 모두 집을 뜻하는 단어이지만,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전자는 building이고, 후자는 place이다. 즉, Home은 건물이라기보다는 개인적인 장소성이 부여된 곳을 의미하는 것이다. 누추하고 별 볼일 없어 보이는 것도 나에게는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이 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가족과 가정도 엄밀히 다른 의미를 가진 단어이다. 가족은 개인의 감정과는 상관없이 법적으로 가족관계를 맺는 사람들의 집합을 말한다. 그 사람이 좋든, 싫든 혹은 죽거나 집을 나갔어도 가족은 가족이다. 하지만 가정은 오로지 개인의 감정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내가 사랑과 평화, 안정을 느끼는 모든 것들을 말한다. 9살 때 엄마가 나에게 선물로 주었던 돼지 인형, 학창 시절의 공책들을 모아 놓은 책장, 뭘 먹어도 맛있는 고향집 식탁, 이것들이 내 주변에 있을 때 나는 비로소 집에 있다고 느낀다. 나의 Home, 나의 가정에 말이다.
정미는 미소에게 집이 없을 정도로 돈이 없으면 술 담배는 끊는 게 맞지 않냐며, 너의 사랑은 염치가 없다고 말한다. 너는 가정이 없으니까 다른 사람이 집에 있는 게 얼마나 불편한 지 모른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이 말이 얼마나 폭력적으로 들렸는지 정미는 알까? 미소의 Home을 부수려고 달려드는 조폭처럼 보였다는 것을 알까? 정미는 미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자신이 바라보는 틀에 맞추어 미소를 평가했다. 자신의 House를 지키려고 미소의 Home을 공격했다.
나는 담배, 위스키 그리고 한솔이 너. 그게 내 유일한 안식처야.
미소에게는 늘 Home과 가정이 있었다. 아주 젊었던 날에는 좁은 방에 모여 함께 잠을 자던 친구들, 술을 마시고 담배를 태우며 떠들었던 이야기들, 악기와 노래가 있었고, 그 시절이 지나 모든 것들이 떠나간 지금은 술과 담배가 미소의 옆에 남았다. 미소가 쉴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 오늘을 버티고 내일을 살게 하는 사랑. 마음속에 각자만의 Home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알 것이다. 남들 눈에는 보잘것없어 보여도 나에게는 가장 소중한 것들이 있다는 것을. 정미는 아주 큰 집을 가졌지만, Home은 가지지 못했다. 남편의 눈치를 보고, 독박 육아를 하고, 외출할 때마다 엄마에게 아이를 맡겨야 하는 정미. 어쩌면 그녀는 자신의 취향을 지키며, Home을 가지고 살아가는 미소가 부러웠던 것은 아닐까? 사랑을 하는 미소가, 집이 없는데도 늘 집으로 돌아가는 미소가 말이다.
집이 없는 미소의 직업은 아이러니하게도 가사도우미이다. 바쁜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온 사람들이 편히 쉴 수 있게, 생각과 취향에 집중할 수 있도록 그 사람들 대신 청소를 하고 반찬을 만든다. 미소의 손을 거쳐 타인의 House는 Home이 된다. 미소는 집이 없지만, 집이 있다. 그 집을 늘 머리에 이고 다니면서 사랑을 한다. 무엇인가를 기꺼이 포기하고 선택한 당당하고 염치 있는 사랑, 미소는 매일 그 사랑을 입에 머금고 산다.
그럼에도 미소에게 건물 모양을 한 집이 생기기를 바란다. 사랑이 가득한 그 Home은 정처 없이 떠도는 마음들의 안식처가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