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서울국제작가축제 작가들의 수다
500페이지가 넘는, 꽤나 두께감이 있는 책입니다. 하지만 인물과 에피소드가 다양하기 때문에 지루함이 느껴지지는 않았습니다. 되려 이 정도의 인물과 서사라면 책이 더 두꺼워도 상관없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책은 소설의 중심이 되는 천 씨 가족에게 일어난 비극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하나, 하나의 불행이 쌓여 거대한 덩어리가 된 비극은 귀신처럼 천 씨 가족의 주위를 맴돕니다. 되풀이되는 학대에 무뎌지는 사람들, 그들은 귀신보다 더 귀신같은 존재로 살아갑니다.
서울국제작가축제의 서포터즈인 리라이터즈 6조는 천쓰홍 작가의 귀신들의 땅을 읽고 독서 모임을 진행했습니다. 1부와 2부는 서면으로 감상을 나누었고, 3부 결말까지 읽은 후 ZOOM으로 모여 더 심화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1부: 엄마가 안 보여 (2024년 08월 21일, 리라이터즈 6조 카카오톡 게시판)
H: 인물이 많고 화자가 자주 바뀌어서 파악이 어려운 부분이 있다. 한국 근현대 소설과 유사한 느낌(암울, 소외)이 들었다. 폭력적이고 비윤리적이며 비상적인 행동들이 많이 나타나지만 그 배경은 드러지 않는다. 허례허식만을 중요시 여기는 세태에 대한 비판 의식이 보인다. 공무원에 대한 무조건적인 비판, 짜깁기식 마녀사냥을 보여주는 부분은 한국의 현재 모습과도 닮아있다.
Y: 챕터마다 주인공과 상황이 달라진다. 같은 공간에서 일어난 과거와 현재의 사건을 교차해 보여주면서 주인공들의 삶의 궤적을 그리고 있다. 공간에 대한 묘사가 직설적이라 머릿속에 잘 그려졌다. 비유법이 눈에 띄는데, 그중에서도 생명력에 대한 비유가 특히 그렇다.(책의 주제인 '귀신'과 연관되어 있는 듯함.) 챕터마다 끊어지는 듯한 느낌이 있었는데, 다섯째 딸의 사망 사건을 기점으로 천 씨 가족의 역사를 한눈에 알 수 있었다.
P: 천 씨 가족 구성원들에게 가해졌던, 가해지고 있는 폭력의 정도가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다. 오랜 시간 폭력을 감당하다 보니, 기억은 깊이 남았으나 분노할 수조차 없다. 폭력의 이유를 스스로에게 돌리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7남매의 스토리가 혼재되어 헷갈릴 우려가 있기 때문에, 책의 앞이나 뒤에 인물관계도를 첨부하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귀신들의 땅'을 읽으며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속 여공의 죽음에도 애도 없이 돌아가는 공장의 모습이 떠올랐다. 퀴어로 묘사되는 인물들의 성별을 지칭하지 않은 점이 좋았다.
Me: 3대에 걸쳐 이어지는 학대의 굴레를 보여준다. 인물들은 역할극을 하고 있는 듯하다. 가부장적인 가족 관계 내에서 분화하지 못해 자아 정체성을 형성하지 못한 구성원들은 가족 내에서 주어진 역할만을 수행하며 인생을 살아간다. 서술하는 현재와 과거 사이에 간극이 꽤 있지만, 그것을 다 채우지 않아도, 이들의 삶이 왜 이렇게 험난하게 흘러왔는지 알 수 있다. 유년기의 기억이 성인 이후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소설은 말하고 있다. 그러나 때때로 과장적이고, 이질적이라는 느낌은 지울 수가 없는데, 이는 아마 한국과 타이완의 사회가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후각, 시각적 묘사를 잘 활용한다. 다만, 문화가 다르기에 그것에 대한 이미지를 그려내는 것은 어렵다. 2부, 3부에서 더 많은 이야기가 펼쳐질 것 같은데, 기대가 된다.
Me에서 조금 더 보충하자면, 천 씨 가족의 서사를 읽으면서 가족 상담에서 보았던 사례들이 떠올랐습니다. 특히, 다세대적 관점에서, 대를 거쳐 불안정한 정서 체계가 이어지고, 구성원들 간의 관계가 갈등 혹은 융합으로 치닫는, 전형적인 문제가족의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은 가족을 증오하면서도, 가족에게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게 그들의 정체성이니까요. 그들의 대부분의 감정(이를테면, 죄책감과 분노, 수치스러움 등)은 전부 가족 내에서 형성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기어이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알 수 없지만, 알고 싶지도 않은 이유로 자꾸만 귀신들의 땅에 이끌리는 것이죠. 유년의 기억이란 그런 것입니다. 알 수 없고, 알고 싶지도 않은데, 참을 수 없는 허기를 느끼며 기억을 되찾으려 땅을 파헤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끝내 그 기억의 조각들은, 살아 있는 한, 하나로 맞출 수 없죠. 그건 귀신이 되어서야 가능한 일입니다.
조원 모두, 여러 인물들과 사건들이 중첩되면서 서사가 전개된다는 점에 동의했습니다. 처음에는 헷갈리기도 했으나, 읽다 보니 정리가 되었고, 이야기들이 점차 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흥미로웠던 지점은, H와 P는 소설과 사회 현상을 연결시켜 감상한 한편, Y와 Me는 소설 자체에 좀 더 집중했다는 점입니다. 하나의 소설도 관점을 달리하면, 다른 방식의 독서가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게 독서모임의 진가이겠죠.
2부: 톈홍이 돌아오다 (2024년 08월 25일, 리라이터즈 6조 카카오톡 게시판)
H: 톈홍이 돌아와서 주변 인물들과 상호작용하기 시작했다. 1부에서 크게 전개된 내용은 없는 듯하다. 여전히 풀리지 않은 의문들이 많다. '스트립쇼를 하던 여자애'가 톈홍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2부에서는 결혼문화의 비극이 중점적으로 다루어진다. 다섯째 딸의 서사가 소설의 핵심처럼 보이는데, 이것이 다른 가족들의 이야기와 어떻게 맞물릴지 기대된다.
Y: 귀신으로 존재하는 '아버지'와 '다섯째'의 시점만을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서술하고 있는데, 이는 과거의 전체적인 상황과 현재 살아있는 사람의 상황을 귀신의 시점에서 객관적으로 전달하는 효과가 있는 듯하다. 1부에 비해 천 씨 가문과 주변 인물들의 연결점이 많아졌다. 천 씨 가문의 각 인물들과 개별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된 주변 인물들이 하나의 망처럼 엮어졌다.
P: 1부에서는 폭력에 무력화된 천 씨 집안의 자녀들을 각각 각인시키는데 집중했다면, 2부는 톈홍이라는 인물이 가진 서사에 조금 더 비중이 실렸다. 폭력의 적나라함을 벗어나 독자로서도 어느 정도 분위기가 환기되면서 흥미로워졌다. 그러나 여전히 산의 연속이다. 아버지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내리막길 없이 끝없는 비탈길을 오르는 중이다. 과연 이들은 3부에서 함께 산을 내려갈 수 있을까. 자녀들이 기억하는 폭력 속에 아버지는 철저히 숨겨져 있다는 사실이 한탄스럽다. 귀신이 되고 나서야 말을 하는 아버지라는 인물은 폭력을 중단시킬 위치에 있었음에도 그를 외면했다. 자연스레 폭력의 가해자가 어머니에게로 치우쳐져 있는 점이 현실적이고 아쉽다. 현재와 과거의 모습이 혼재되어 있다. 이렇게까지 많은 키워드를 하나의 이야기로 풀어내는 묘사는 주의 깊게 볼만하다.
Me: 1부보다는 2부의 문장들이 더 마음에 들었다. 1부는 직접적인 표현들이 주를 이루었는데, 2부에서는 묘사 표현도 자주 등장해 분위기를 환기시켜 준다. 밍르서점 주인들에 대한 서사와 톈홍과 T의 서사가 가장 실감 나게 느껴지는데, 작가와 가장 맞닿아있는 인물들이라 그런 것 같다. 천 씨 가족의 행동들은 다소 극단적이다. 아예 하지 않거나, 아예 하거나. 그렇기에 과장적이거나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표현들이 있긴 하다. 그러나 2부에서 드러나는 가족 역사를 짜 맞추다 보면, 이들의 정신 상태나 행동들이 이해가 되는 측면이 있다.
Me는 개인적으로 1부보다는 2부가 좀 더 흥미로웠습니다. 이제야 인물들 각각의 특성들이 보이고, 사건들이 연결되면서 서사가 개연성을 갖추어 가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또, 밍르서점 주인들의 건의로 만들어진 영화관 장면이나, 갑자기 내린 우박에 사람들이 대피하는 장면에서, 약간 몽글하면서도 기괴한 감정이 들기도 했습니다. 상반된 감정들이 교차하고 얽혀, 깨져버린 관계들을 보여주는 것 같았어요.
톈홍이 썼다는 소설들, 그 속에는 그가 어린 시절 받았던 상처들에 대한 내용이 있었죠. 천쓰홍에게는 이 소설이 그렇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2부에서는 인물들 간의 연결성이 보이기는 했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은 의문점들이 많다는 것이 공통된 의견이었습니다. 과연 그 끝은 어떻게 맺어질지, 3부로 가봅시다.
3부: 울지 마 (2024년 08월 28일, ZOOM)
H: 귀신의 의미는?
사실 저는 이 책의 제목이 '귀신들의 땅'이지만, '귀신'에 초점을 맞추고 읽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H의 질문이 흥미로웠고, 소설에 등장하는 귀신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조원들은 '귀신'에 대해 '과거의 기억들'인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각 인물들이 보는 귀신이 다 다른 까닭 또한 그들에게 족쇄처럼 묶인 과거의 상처가 다 다르기 때문인 것 같다는 의견도 나왔습니다.
저 또한 이러한 의견들에 동의합니다. 귀신은 이승에 미련이 남아 저승으로 가지 못하는 존재들이니까, 귀신이 있다고 믿는다는 건 어떤 존재가 이승에 미련이 남아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니까, 인물들의 죄책감이나 불안이 마을을 귀신들의 땅으로 만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Y: 귀신이란 존재가 강조되는 소설에서 천 씨 가문의 귀신들(아버지, 다섯째)이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되는데, 이러한 작법의 의미는?
이것 또한, 제가 간과하고 있던 부분이었습니다. 저는 서사를 따라 읽느라 시점은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다시 보니 정말 아버지와 다섯 째만 1인칭으로 서술되어 있더군요. '귀신'만이 모든 과거와 현재를 다 알고, 그것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존재이기에, 그 시점으로 천 씨 가족의 서사를 묶은 것 같다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이에 덧붙여, 원래 1인칭은 주관적인 서술을 위해 쓰이는데, 이 소설에서는 객관적인 서술을 위해 1인칭을 썼다는 것이 독특하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저는 천 씨 가족에게 있어서 '말'이란 어떤 것인가, 생각해 보았는데요. 그들은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입을 꿰맨 것처럼 하지 않는 모습을 자주 보입니다. 어쩌면 그들은 귀신이 되고 나서야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살아있는 그들은 귀신보다도 더 자아가 미미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인 거죠.
P: 칠 남매에게 가해졌던 폭력의 대물림 속에서 두드러지는 인물은 어머니이다. 그들의 기억 속에서 지워진 아버지라는 인물은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남매들에게 학대를 가한 것은 주로 어머니였습니다. 특히, 딸들에 대한 가학적인 말과 물리적 폭력은 책을 덮고 싶을 만큼 진절머리가 났습니다. 그러는 동안, 아버지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이에 대해, 아버지는 다른 천 씨 가족 구성원들만큼 '약자성'을 갖추고 있지 않기에 서사에 잘 등장하지 않은 것 같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여성이나 동성애, 정치적 핍박과 같은 약자성이 아버지에게는 없었고, 그렇기에 이 소설의 중심인물이 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추가로, 천 씨 가족의 아버지는 사람 자체가 존재감이 미미한 것이었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중심 사건들에 아버지가 계속 등장하기는 하는데, 그 존재감이 참으로 미미해서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 일 수 있다는 겁니다.
저는 전래 동화 중 '해와 달이 된 오누이'가 떠올랐습니다. 이 동화에서도 오누이와 어머니만 등장할 뿐, 아버지의 존재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아버지의 부재는 오누이가 시련을 극복해 통과의례를 거쳐 성장하기 위한 전제라는 논문을 읽은 적이 있는데요. 가장인 아버지가 존재한다면, 오누이가 시련에 맞설 이유도 없고 당장에 통과의례를 거칠 필요도 없다는 것이죠. 옛 관점에서, 아버지라는 존재는 집안의 기둥과도 같은 것이었으니, 이게 버티고 있다면 아이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어른으로 성장하는 서사는 힘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아버지라는 존재를 지운 것은, 천 씨 남매들의 서사를 전면으로 끌어오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이 소설 속에서도 만약 가장인 아버지의 존재감이 컸더라면, 천 씨 남매들의 수난이 이렇게 실감 나지는 않았을 듯하거든요.
Me: 학대의 대물림이 이어지고 있는 천 씨 가문, 이들에게도 희망이 있을까?
저는 이 소설의 마무리를 지어 보고자 다음과 같은 질문을 준비했습니다. 이에 대해, 남매들 간의 관계는 개선될 여지가 있어도 사회체계 내에서의 학대는 끊기지 않을 것 같다는 것이 종합된 의견이었습니다.
대를 이어 내려오는 한 가족의 문제는 사실상 그 가족만의 문제로 보기에는 어렵습니다.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인 체계들이 영향을 미치면서 문제가 심화되는 것이죠. 이 소설 또한, 천 씨 가족의 문제가 비단 가족 내부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을 곳곳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사회 체계를 변화시켜야 하는 것은, 개인의 정신적 성숙과 사회 구조의 간극이 벌어지는 순간, 갈등이 심화되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톈홍은 동성애가 죄가 아니라는 정신적 성숙을 이루었지만 사회 구조가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해 갈등하고, 그것이 결국엔 가족 해체로 나아간 것이죠.
또 한 가지는, 가족이란 무엇인가, 생각해 볼 일입니다. 혈연적이고 법적인 가족만이 가족인지, 대체적인 가족의 형태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인지. 남아선호사상이나 동성혼 금지 등은 대체로 혈연만을 가족으로 인정하려는 체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당연히 혈연은 부계 중심적이고요. 개인의 정신적 성숙도가 높아지고 있는 현대에는 좀 더 발전된 사회 구조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발대식 이후로 오랜만에 조원들을 만나고, 이야기 나눌 수 있어 즐거웠던 독서 모임이었습니다. 타인과 대화하며 내가 놓쳤던 부분들이나, 다른 관점들을 알아가는 게 참 흥미로운 것 같아요. 이 '귀신들의 땅'은 대화할 거리가 너무나 많은 책이기도 하고요.
여담이지만, 동아리 회식에서 옆자리 분과 책 이야기를 하다가 가장 최근에 읽은 책이 뭐냐는 질문을 주고받았는데, 거의 동시에 '귀신들의 땅'을 외쳤습니다. 그분도 정말 재밌게 읽었다고 하시더라고요.
아무튼, 책 이야기를 하는 건 언제나 재미있습니다. 이런 재미를 보고 싶으시다면..!
2024서울국제작가축제에 방문해 보세요. 9월 6일 금요일부터 9월 11일 수요일까지, JCC 아트 센터에서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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