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 NOT spend all your time doing research project; you should prioritise your studies."
석사과정을 진행하는 내내, 학과 커리큘럼을 담당하시는 교수님과 더불어 수많은 교수님들에게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소리다. 우리가 석사 과정에 있기는 하더라도, 교수님들께선 우리의 본질은 연구원이 아닌 학생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지 않기를, 또 우리가 소속된 연구실의 교수님들이 우리에게 부담감을 주지 않는 환경이 되기를 바랐다.
오리엔테이션 중 발췌
내가 속했던 캠브릿지 화학과의 M.Sci의 평가과정은 크게 시험 성적과 연구 프로젝트로 나뉘어 있고, 시험의 비중이 50%로 35%를 차지하는 프로젝트보다 조금 더 높았다 (나머지 15%는 학사 때의 성적이다). 모든 강의는 오전 시간에 이루어지고 또 시험의 비중이 더 높기에, 학과는 우리가 1주일 중 3일만 오후 시간을 연구에 할애하기를 권장했다. 물론 모두가 이를 지킨 것은 아니고, 그에는 나도 포함된다. 교수님이나 내 day-to-day supervisor (랩 안에서의 멘토, 보통 4학년 박사 학생이나 포닥)가 압박을 주신 것은 절대 아니고, 내 프로젝트가 유기 합성이기도 했고, 내가 원했기 때문에 스스로 랩에 더 오랜 시간을 할애하기를 결정했다.
내 경험상 랩 안에서 석사 학생이 가지는 책임과 역할은 매우 적은 축에 속했다. 우리에게 프로젝트가 배정되기는 하지만, 애초에 석사 기간이 굉장히 짧기에 끝내지 않아도 된다, 긍정적인 결과가 나오지 않아도 괜찮다며 우리의 부담감을 덜어내고자 하는 말들을 줄곧 듣고는 했다. 연구실의 막내이자, 이제 갓 연구원으로서의 삶에 발을 내디딘 햇병아리에게는 모두가 관대했다. 실험들 몇 개만 나의 힘으로 해내도 잘한다 잘한다 칭찬해주며 토닥여줬고, 또 경험이 없는 우리들을 배려해 첫 1달 정도는 실험하는 방법과 기계를 다루는 법에 대해 가르쳐줬다. 교수님이 학생들의 출·퇴근시간에 간섭하지 않았으며, 또 학생들도 교수님의 요구를 무조건적으로 듣지는 않고 반박의 의견을 마음껏 표출했다. 이러한 자유로운 분위기는 스위스에서 인턴을 했을 때에도 비슷했다. 학사를 졸업하고 석사의 경계선에 있던 나에게 요구되는 의무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고, 아직 '배워가는 단계'라는 인식이 일반적이었다.
두 나라에서 비슷한 경험을 했기에 나는 당연히 대다수의 대학원이 비슷한 양상을 띠고 있을 거라는 안일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박사과정을 하는 지인과 대화를 나누기 전까지는 말이다. 어느 날 서울의 유명 대학에 재학 중인 박사 학생 지인이 교수님이 언제 행정 처리 업무를 맡기실지 모르니 늘 연락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행정 업무? 무슨 행정 업무? 그걸 왜 네가 해?
당연히 하는 것 아니야? 넌 안 해?
나를 포함해서 내가 아는 모든 석·박사 학생들은 단 한 번도 교수님이 부탁하시는 행정 업무를 대신한 적이 없었다. 우리가 하는 최대의 '행정'처리는 기껏해야 교수님께 우리가 필요한 화학 물품에 대한 정보와 구매처를 이메일로 보내는 것, 혹은 학회에 참석하기 위한 기차나 비행기표 정보를 전달하는 정도였다. 한국에서 석사를 하고 캠브릿지로 박사학위를 위해 온 지인은 한국에서는 석사 학생 때부터 실적에 대한 푸시와 압박을 꽤나 받는 편이고, 그렇기에 졸업 때 논문이 여럿 있는 것은 당연하게 여겨진다고 말했다.
캠브릿지 화학과 내에서 석사 학생의 우선순위는 연구나 교수님의 일이 아닌 우리 개인의 학업이고, 박사 학생의 우선순위는 연구이다. 유럽권에서 대학원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나는 모두의 우선순위가 일치하는 것이 사실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물론 이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나는 가장 큰 차이점으로 대학원생들이 각자의 일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되는 것을 꼽고 싶다.
다른 영국 대학교도 우리와 같은지는 단언할 수는 없지만, 캠브릿지에는 연구가 아닌 교직을 전담으로 담당하시는 교수님들이 존재한다. 이 분들이 모여 Teaching committee를 구성하시는데, 커리큘럼 구성 및 학부 1-2학년 때의 대부분의 강의를 진행하신다. 즉, 연구실을 이끌어가시는 교수님들이 교단에 서야 할 부담이 상당히 줄어든다는 것이다. 내가 아는 교수님들 중에서는 아예 강의를 하지 않는 교수님도 계시고, 내가 속했던 랩의 교수님은 1년에 딱 12시간만 강의를 진행하셨다.
또한, 연구실의 규모가 상당히 큰 경우 교수님의 비서 역할을 하는 Personal assistant (PA)가 존재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분들이 행정 및 서류를 전담하시기 때문에, 대학원생들이 그를 담당해야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또한 전문적인 기술적 도움이 필요하면 Lab technician들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면 된다. 교직/ 행정/ 기술적 도움/ 연구. 각자의 역할이 분담되어있고, 또 도움을 줄 수 있는 인력들이 있기에 박사 학생은 연구에, 또 석사 학생은 개인의 공부 및 자신의 석사 프로젝트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다. 박사 학생들이 연구에 집중할 수 있기에, 석사 학생이었던 나는 상당히 그 책임감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고, 덕분에 연구의 ‘맛보기’ 단계를 진정 즐길 수 있었다.
내가 영국에서 배움과 새로운 경험에 집중할 수 있었던 이유는 대학원생들이 각자의 역할에 집중하고 그에 충실할 수 수 있도록 도와주는 수많은 전문적인 인력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이 경험을 통해 석사 기간 동안 연구와 학업에만 집중할 수 있는 것이, 또 박사 기간 동안 연구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연구실 전체의 성취뿐만 아니라 개개인의 정신 건강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깨닫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