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

영국 공연계 다양성, 공평성, 포용성의 현주소

by 채유나

"모든 상이 의미 있지만 이번엔 특히 '고상한 척한다'라고 알려진 영국인들에게 좋은 배우로 인정받아서 정말 기쁘고 영광입니다."


2021년, 윤여정 배우가 영화 <미나리>로 한국인 최초 영국 아카데미상 수상자가 되었을 때 그의 수상 소식만큼 화제가 된 것이 바로 그의 수상소감이었다. 윤여정 배우가 특유의 무심한듯한 말투로 던진 이 말이 내 영국 석사 논문의 영감이 되었다.



다양성, 공평성, 포용성을 빼고 요즘 영국 문화 예술계의 뜨거운 감자가 무엇인지를 논할 수는 없을 것이다.

2020년 미국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을 단초로 시작된 Black Lives Matter 운동이 영국 사회 전반에 인종차별과 다양성에 대한 인식을 일깨워 주었고, 그 이후로 다수의 극장들과 제작사들이 공연예술계의 다양성을 보장하고 인종차별을 방지하기 위한 액션 플랜을 만들어내고 있다. 영국예술위원회 (Arts Council England) 역시 매년 예술계 다양성 현황을 분석한 다양성 보고서를 발행하고 있으며, 2030년까지 '우리 모두의 창의성이 그 가치를 인정받고 번성할 기회를 누리도록 하겠다'라는 비전을 담은 'Let's Create'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이렇게 제도만 놓고 본다면 인종, 종교, 성별, 성 지향성, 장애인/비장애인 여부와 무관하게 누구든 평등한 기회를 얻을 수 있는 것이 영국의 문화 예술계다. 하지만 런던 공연예술계의 중심이라고 하는 웨스트엔드의 연극, 뮤지컬 공연에서 이런 다양성이 실현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들었다. 2022년 3월에 보러 간 뮤지컬 위키드에서는 아시아인 앙상블 배우 몇몇과 피예로 역할의 배우 1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백인 배우들이었다. 2018년 가을, 교환학생 신분으로 영국에 왔을 때 느꼈던 것과 비교하면 장족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지만, 비(非) 백인 배우들이나 창작진의 이름을 보면 반가워지는 내 모습을 보면서 영국의 공연예술계에서 이야기하는 다양성의 의미가 무엇인지와 우후죽순 내세우고 있는 다양성 액션 플랜이 얼마나 지속 가능한 지가 궁금해졌다.



영국 국립극장의 경우 극장 내 다양성과 관련된 데이터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있는 편이다. 그리고 영국 국립극장 아카이브를 통해 과거 국립극장에서 했던 공연들의 정보도 찾아볼 수 있다. 석사 졸업 논문을 위해서 영국 국립 극장의 다양성 데이터를 살펴본 결과, 국립극장 내 다양성 증진을 위한 노력에서 나타나는 경향성을 포착할 수 있었다.


최근 4-5년간 영국 국립극장에서 상연된 작품 중 여성이 연출한 작품과 장애인 배우가 출연하는 작품이 증가했으며, 영국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인종과 문화를 반영하는 작품 역시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다. 연출, 감독 등 창작진과 배우진을 제외한 국립극장 내 고용 현황도 인종, 젠더, 종교, 성 지향성의 다양성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 2021년 영국 국립극장에서 상연된 Normal Heart는 1980년대 뉴욕 시내 에이즈 확산과 동성애자에 대한 억압, 그리고 홀로코스트 이후 미국에 정착한 유대인들의 역사를 엮어서 보여주었고, 2022년 상반기에 상연된 The Father and the Assassin은 인도 독립운동의 상징인 마하트마 간디를 암살한 이의 이야기를 다룬 것이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분명히 아직 갈 길은 멀지만, 영국 내의 다른 극장들과 비교했을 때에는 의미 있는 발전 단계를 밟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영국 국립극장 아카이브와 국립극장의 여름 시즌 프로그램을 보며 그 부풀었던 마음이 조금 사그라들고 말았다. 최근 4-5년간 과거에 비해 많은 여성, 장애인, 비(非)백인들이 창작진 명단에 그 이름을 올리긴 했다. 하지만 그들이 연출가로 혹은 각색 작가로 참여한 작품들의 원작은 여전히 셰익스피어나 백인 남성 영국인 작가의 작품인 경우가 월등하게 많았다. 또한 2021년 가을부터 2022년 상반기까지 <The Normal Heart>, <The Father and the Assassin> 등의 작품을 올린 것에 비해 2022년 여름에는 <Jack Absolute Flies Again>과 셰익스피어의 <Much Ado about Nothing>을 올렸는데, 이러한 작품 선택이 관객층의 연령대와 인종 구성에 미치는 영향을 극장에서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물론 가을 시즌에는 또다시 할렘 르네상스를 다룬 <Blues for an Alabama Sky>와 아프가니스탄 아미리 가족의 실화를 다룬 <The Boy with Two Hearts>가 상연된다. 평소에 극장을 잘 찾지 않았지만 이 작품들의 메시지에 공감을 바탕으로 새롭게 극장을 찾게 되는 관객층이 형성될 수 이쓸 것이고,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작품을 상연하는 것 역시 현재 아프가니스탄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회정치적 상황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는 데 큰 기여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렇게 들쭉날쭉한 작품 선택이 얼마나 다양성 실현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될까라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관객을 보통 연극의 3요소 중 하나라고 한다. 그날그날 관객의 반응에 따라 극장의 분위기가 달라지고, 관객이 남기는 리뷰에 따라 연극 혹은 뮤지컬의 존속성이 결정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영국의 내로라하는 극장들에서 다양성 실현에 대한 논의를 할 때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 역시 관객, 그리고 관객들이 보고 싶은 것을 파악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무대에 펼쳐지는 이야기가 관객들의 흥미를 유발하고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이야기여야 한다는 것이다.


무대에 오르는 십수 명의 배우 중 1,2명을 비(非) 백인으로 캐스팅하고, 죽은 백인 남성 작가가 쓴 작품을 여성 연출가가 연출하게 하는 것만으로는 다양한 관객층을 지속적으로 유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작품들은 특정 관객층을 단기간 동안만 반짝 유치하는 단발적인 이벤트로 전락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영국의 연극과 뮤지컬 개발과 상연이 수도인 런던 중심으로 진행되어 왔다는 것 역시 눈여겨볼 만한 지점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영국예술위원회와 영국 공연예술계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맥락에서 런던 외 지역의 예술기관과 극장들에 대한 지원을 확대하고자 하는 계획 역시 비대해진 런던 연극/뮤지컬 시장을 영국 전역으로 분산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이 아닐까 생각된다. 런던 외 지역 극장들은 물리적으로나 재정적으로나 런던의 극장들보다 규모가 작은 경우가 많고, 자연스레 관객층의 규모도 작은 편이다. 배우들의 등용문이라고 하는 연극 학교들 역시 고액의 수업료를 받기 때문에 영국 내에서 런던과 비(非) 런던 지방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 간에 연극/뮤지컬에 대한 노출 정도와 교육 기회 편차 역시 큰 편이다. 이는 연극/뮤지컬계에 진출하는 사람들의 사회경제적 배경 구성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영국 공연계 내에서 지속 가능한 다양성이 실현되려면 관객, 작품, 무대(극장) 3박자가 함께 맞물리며 보다 다양한 배경과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보다 다양한 이야기를 선보일 수 있도록 천천히, 하지만 꾸준히 그들을 장려하는 문화 정책과 경영 방식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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