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글이와 보낸 30일, 나보다 나은 개로부터 뜻밖의 가르침을 얻었다
'개만도 못하다'. 개가 인간보다 열등할 거라고 당연히 낮잡아보는 이 말은 틀렸다. 개는 위대하다. 개는 강하다. 개는 인내할 줄 안다. 그리고 때때로, 개는 사람보다 낫다. 지난 한 달간 얼떨결에 개를 키우면서 얻은 결론이다.
네 마리 고양이 집사로 살아온 지 10년 차에 임시로나마 견주가 될 기회를 얻었다. 개를 키우던 지인이 꼬여버린 이사 일정 때문에 한 달 동안 반려견을 돌봐줄 사람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몇 달 전에 그 개를 직접 만나서 흠뻑 사랑에 빠져버렸고, 집에서 일하며 24시간 돌봐줄 수 있던 나는 스스럼없이 러브콜을 보냈다. 그렇게 만남이 성사된 건 6월 말. 고양이들과 서로 잘 적응할 수 있을지가 가장 큰 걱정이었는데, 기대 이상으로 서로에게 무심하게 구는 덕분에 남은 기간 동안 우리집에 있기로 정해졌다. 그렇게 개를 맡기러 온 지인과 잘 부탁한다는 인사를 수차례 나누고 예상했던 두 번째 걱정을 마주했다. 개는 주인이 자신을 두고 간다는 걸 받아들일 수 있을까?
지인은 개와 인사를 나누고 현관을 나섰다. 그 뒤를 따라나가려다가 코 앞에서 문이 닫힌 개는 처음엔 흠칫 놀라더니, 멀어져 가는 발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지? 언니가 어딜 가는 거지?' 안심시켜주려고 옆에서 열심히 쓰다듬으니 본능적으로 꼬리를 빙빙 돌리면서도 궁금증이 해소되지 않은 게 분명했다. 한동안 현관문 앞에 망부석처럼 앉아서 들릴 듯 말 듯 낑낑거리더니, 결국은 신발 옆에 몸을 둥글게 말고 엎드린 뒷모습이 얼마나 처량하던지. 나는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 개 옆에 자리를 잡고 조심스럽게 이름을 불렀다.
"몽글아."
이름을 들은 몽글이가 귀를 쫑긋 세우며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주인이 돌아오지 않자 혼란스럽고 슬픈 와중에도 자신을 부르는 사람에게 최선을 다해 응답하는 표정이다. 이름처럼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 순한 눈과 웃는 듯 살짝 벌어진 채 헥헥 대는 입을 보니 나까지 절로 부드러운 얼굴을 하게 됐다. 하지만 그런 얼굴만으로는 개에게 위안을 줄 수 없는 법. 몽글이는 이내 시선을 돌려 주인이 밀고 나간 현관문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우뚝 박힌 듯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마음이 착잡해졌다.
'당분간 주인이 돌아오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널 버리고 간 건 아니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려줄 수 있을까.'
'매주마다 주인이 보러 올 거고 딱 한 달만 있으면 여기를 떠날 수 있다는 걸 말해주고 싶은데.'
그걸 알 리가 없는 몽글이는 낯선 공간에 던져져 기약 없이 기다리라는 명령을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사람보고 견디라고 해도 쉽지 않을 이 고난을 이 작은 개가 어떻게 버텨낼 수 있을까.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을 겪는 강아지에게 임시 보호자가 줄 수 있는 최선의 사랑이 무엇일까.
차갑게 대하는 고양이들보다는 사람과 붙어있으면 조금 더 적응이 쉬울 것 같아 노캣존(no-cat zone)으로 운영하던 침실에 특별히 몽글이를 들이고, 하우스를 놓아주었다. 자리를 옮겨 자는 걸 거부할 거라는 예상을 깨고 몽글이는 순순히 몸을 움직이더니, 남은 밤도 아주 순탄하게 보내서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야행성인 고양이들이 푸닥거리는 소리를 듣고 잠시 으릉거리기는 했어도 내보내 달라고 울거나, 문을 긁지도 않았다. '이렇게나 빠르게 적응을 할 수가 있다고?' 밥투정을 할 수도 있다는 지인의 주의가 무색하게 묵묵히 밥그릇을 비우는 몽글이의 마음이 궁금해졌다. 단 하루 만에 원래 주인에 대한 신의를 저버리고 나를 새로운 주인으로 택한 건 결코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몽글이는 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길래 이처럼 차분할 수 있는 걸까?
몽글이가 사람의 언어를 몰라 주인이 언제 데리러 올 거라고 설명해줄 수 없었듯, 개의 언어에 무지한 나 역시 몽글이와 대화를 할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몽글이가 말없이 보여주는 표정과 행동을 며칠간 열심히 관찰한 결과, 나는 뜻밖의 깨달음을 얻었다.
'몽글이는 지금 인내하고 있구나.'
현관 근처를 떠나지 않고 가끔 발소리가 들리면 반응하는 걸로 보아, 몽글이는 분명히 주인이 떠났다는 사실에 동요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다림의 시간이 하루를 꼬박 잡아먹어도 몽글이는 지치지도 짜증을 내지도 않았다. 그렇게 기다리는 와중 밥도 먹고 산책도 하고, 임시 견주인 나로부터 쓰다듬을 받는 시간도 빼먹지 않았다. 다만 거리를 자주 두리번거리고, 나의 손길에 조금은 절제된 기쁨을 표현하며 마냥 긴장을 놓은 건 아니라는 사실을 넌지시 알렸다. 그러니까 몽글이는 썩 맘에 들지도 않고 물음표 가득한 상황 속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시간을 보내며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마냥 철없이 행복해하지도, 혹은 한없이 불행해하지도 않으면서 말이다.
나는 머리로 이해하지 못하는 건 영원히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어떻게든 앞뒤 논리를 짜맞추고 인과관계를 분석해야만 비로소 마음이 가라앉고, 그 사건이 몰고 온 감정을 해소할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고 믿어왔다. 당연히 삶은 내게 이해할 수 있는 일들만 선물하지 않는데 말이다. 그런 풍파가 닥쳐올 때마다 나는 있는 힘껏 저항하고 운명을 탓하며 화를 내기에 바빴다. "이건 말이 안 돼. 어떻게 나한테 이런 시련을 줄 수 있어? 이건 공정하지도, 정의롭지도 않아. 내 탓 아니니까 빨리 누가 나 대신 대책을 내놔."
몽글이는 그런 나보다 훨씬 더 성숙한 존재였다. 몽글이가 지금 겪는 일은 사람으로 치면 (그리고 약간의 과장을 보태면) 눈을 떠보니 군만두만 주는 방에 갇혀 왜 갇혔는지 설명도 듣지 못하는 영화 <올드보이> 줄거리에 비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이 왜 여기에서 갑자기 살아야 하는지, 언제까지 있어야 하는지 모르고 썩 맘에 들지 않는 밥만 갖다 주니까 말이다. 그런데도 몽글이는 문을 부수고 탈출하거나 대중없는 분노를 표출하는 대신 현실을 침착하게 견디기로 선택했다. 조용히 인내하는 몸짓이 결코 미련하거나 멍청해 보이지 않았다. 아니, 나는 그의 의연한 뒷모습을 보며 경외심을 품기까지 이르렀다. 나도 이런 자세로 과거의 시련을 흘려보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몽글이가 나보다 낫구나.'
그러니까, 개가 사람보다 나은 점이 분명히 있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