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헌의 따툰』, 이정헌, 혜윰터, 2025
전화번호를 수첩에 적거나 외워야 전화를 할 수 있는 시절이 있었다. 전화번호부라는 책을 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옛날 사람 축에 속한다. 요즘은 외우지 않고 적어두지 않아도 언제든지 쉽고 빠르게 무엇이든지 찾을 수 있다. 어제의 시간보다 오늘의 시간이 더 급하게 흘러간다. AI가 인간의 모든 기능을 대신 할 수 있는 때가 올 것으로 예측했지만, 그러한 예측 역시 전화번호부처럼 먼 옛일이 되어가고 있다. 빠르다는 말로는 모자란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인공지능 시대에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아직 뚜렷한 답을 찾지 못했다. 어쩌면 영영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항상 고민하고 질문한다. ChatGPT에 물었다. AI는 데이터를 저장하지만, ‘기억’은 사람만이 한다고 대답했다. 저장된 데이타를 타이핑하는 것과 기억을 꺼내어 글을 쓰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이야기를 선택하여 기록으로 남기는 윤리적 판단은 사람에게만 있는 고유한 능력이고 그것이 바로 기억의 다른 이름이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이며 인권운동가였던 김복동 할머니의 외로운 삶과 투쟁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김복동』을 본 뒤 오랫동안 나를 흔들었던 물음이 있다. ‘나는 이제 어떤 목소리를 낼 것인가?’였다. 그 말은 어떤 글을 쓸 것인가, 어떤 일을 기억할 것인가와 같은 말이다.
평생 그림을 그리는 것을 업으로 살아온 사람이 있다. 작품을 통해 묵직한 경종을 울리고, 재치 있는 풍자나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수많은 작가들 틈에서 자신의 무기는 잔잔한 공감과 여운이 있는 그림이라고 한다. 따뜻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그는 어떻게든 기억하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기록해야 하는 것이 남겨진 우리의 몫이며,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이 진정한 애도라고 말한다. 『이정헌의 따툰』은 만평을 통해 그가 사람을 기억하고, 사람을 애도하는 방식이다. 위안부 문제, 검찰 개혁, 세월호, 이태원 참사, 촛불 시위 등 책 곳곳에는 슬픔, 분노, 상처가 있지만 결국 그가 전하고자 하는 것은 ‘당신과 함께하겠다’는 뜻이다. 함께 걸어가며 함께 이겨내고, 비록 떠나보내지만 희망은 절대 놓지 않겠다는, 이정훈의 ‘연대하는 마음’의 기록이다.
“따뜻한 이불 속에서 편히 잠을 잔 내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서 뭐라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펜을 들어 그림을 그렸다. 그저 고맙고, 그저 미안해서, 응원한다는 한마디 말고는 다른 말을 더할 수 없었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그것을 세상에 알릴 의무를 가진 이들이 부끄러움을 잃는 순간 세상은 엉망진창이 된다. 기록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정신으로 그들의 비겁함을 이정헌은 쓰고 그렸다. 진심이고 용기이며 고민의 흔적이다.
그저 고맙고, 그저 미안해서 펜을 들었다는 이정헌, 그로 하여금 계속 그림을 그리게 하는 마음은 무엇일까. 미안하다고 사과할 줄 아는 용기보다, 감사한 일에 고마움을 표현하는 인정보다 더 깊숙한 곳에 있는 마음은 부끄러움이다. 이 책에 유독 많이 나오는 말이기도 하다. 읽는 내내 그 단어를 곱씹었다.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것은 부끄러움을 아는 것, 바로 염치다.